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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02일 05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02일 14시 12분 KST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 그 고뇌의 원형 | 빈센트 반 고흐의 『반 고흐 서간 전집』

만사를 금전적 가치나 사회적 지위라는 척도로 재단하고 서열을 매겨야만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런 척도에 맞지 않는 인간, 그런 척도와는 다른 가치를 신봉하는 인간은 고립당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고흐의 서간이 오래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믿는 바로는, 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고뇌의 원형'이 특이할 정도로 면밀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 '고뇌의 원형'은 글자 그대로 혼신을 다해 고투를 벌여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삶을 마감한 땅, 파리 교외의 오베르쉬르와즈를 찾은 것은 1983년 11월 1일이었다. 어떤 경위, 어떤 심경으로 그곳을 찾아갔는지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써놓았다.

그때 가장 만년의 작품 <폭풍이 몰아칠 듯한 하늘과 밭>과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묘사된 사람 없는 풍경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흐가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한 풍경이다.

"금방이라도 폭풍이 불어올 것 같은 하늘 아래 광막한 밀밭에서, 나는 작심하고 슬픔이나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빈센트와 동생 테오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지를 찾아갔다. 고흐의 묘비에는 '1853~1890'이 각인돼 있었다. 서른일곱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테오의 묘비에는 '1857~1891'이라 새겨져 있었다. 형이 죽은 지 반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서른세 살이었던 셈이다. 그때 묘비 앞에 섰던 나와 같은 나이였다.

생전에 작품이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던 고흐는 자신이 동생과 그의 가족(테오는 신혼이었고,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의 가치에 혼을 바쳤으나 그런 그를 평생 겁박한 것은 '생활'이라는 문제였다. 당시의 나 역시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구체적인 인생 계획도 없는 젊은 무직자였다. 한마디로 '생활 낙오자'였다. 게다가 내게는 고흐처럼 목숨을 걸고 혼을 바칠 만한 대상도 없었다.

애초 그 여행길에 나서기 전까지 고흐의 묘소에 참배할 생각은 없었다. 고흐에 대해서는 나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거기로 발걸음을 옮겼을까?

내가 언제 고흐의 실제 작품을 봤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흐의 편지를 단편적이나마 처음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그 기억도 모호했다. 그래도 고흐라는 인물은 사춘기 이후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당시, 즉 1960년대에 일본 사회에서 사춘기를 보낸 사람에게 고흐는 그런 존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에서 고흐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소개됐다. 1910년(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해다!)에 창간된 잡지 《시라카바(白樺, 자작나무)》가 고흐를 비롯해 마네, 세잔, 고갱, 로댕, 마티스 등 당시의 최첨단 서양미술을 정력적으로 소개했고, 그 뒤에도 고흐에 관한 평론이나 편지 번역 등에 자주 지면을 할애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파리에 유학하던 일본인 화가가 급증했고, 그들은 고흐 작품을 보러 오베르 마을을 찾아갔다. 고흐는 서양미술에 관심 있는 일본인에겐 '성인', 그가 삶을 마감한 땅은 '성지'가 됐다.

전후(戦後)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가) 1948년에 『고흐의 편지』라는 책을 썼다. 극단 민예의 다키자와 오사무(瀧澤修)가 1951년에 <화염 같은 사람 반 고흐의 생애>(미요시 주로 각본)를 초연한 뒤 평생 그 공연을 이어갔다. 1955년에는 미국 영화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빈센트 미넬리 감독, 커크 더글러스 출연)가 개봉됐다. 1958년에 처음으로 도쿄 국립박물관과 교토 시립미술관에서 본격적인 고흐 전람회가 열렸는데, 나는 그때 겨우 일곱 살이어서 그걸 보지 못했다.

어쨌든 근대 이후 일본 사회에 공기처럼 충만했던 '고흐 신화'의 세례를 어린 재일조선인이었던 나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내 발걸음이 오베르 마을로 향한 것도 그런 '성지' 순례를 무의식적으로 답습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에 관한 한 그 순례를 통해 얻은 것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본 사회가 버블(거품) 경기로 들떠 있던 1988년, 어느 생명보험회사가 <해바라기>를 3630만 달러에 낙찰받았고, 1990년에는 대기업 소유주가 <의사 가셰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낙찰받아 화제가 됐다. 한 사람의 '혁명적 예술가'를 '성인'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터무니없이 큰 돈으로 환산해서 숭배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때로부터 다시 25년쯤 지난 지금 일본 사회에서 고흐에 대한 관심은 크게 줄어든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가 남긴 작품과 편지는 사람들이 들으려 하든 말든 변함없는 열기를 계속 발산하면서 우리의 사대주의나 속물근성을 가차 없이 고발하고 있다. '고전'이란 그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1983년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고흐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때까지 고흐에 대한 내 이해가 얼마나 천박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근엄한 목사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빈센트는 열여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의 소개로 화상(畫商) 구필 상회에 취직했다. 네 살 연하의 테오도 같은 구필 상회에서 일하게 된다. 스무 살의 빈센트는 런던에서 하숙집 주인의 딸에게 실연을 당하자 절망한 나머지 일자리를 팽개치고 네덜란드의 부모 밑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스물두 살 때 구필 상회의 파리 지점에서 일하게 됐지만 점원 일에 적응하지 못해 또다시 때려치우고 해고됐다.

그 뒤 기숙학교 교사가 됐으나 빈곤한 학생들의 가정에서 월사금을 받아내지 못해 해고됐다. 기독교 보조설교사가 돼 신학을 공부한 뒤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형식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수업에 반발해 신학을 배우기 위한 국가시험 응시를 포기했다. 스물다섯 살 때 정식 전도사 자격도 없는 상태로 벨기에 탄광촌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그 지나칠 정도의 열성 때문에 오히려 교회 상층부가 그를 꺼리면서 활동을 금지당했다. 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처럼 거듭 좌절을 겪은 뒤 스물일곱 살이 되고 나서였다. 화가로서는 뒤늦은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스물여덟 살 때 연상의 사촌으로 네 살짜리 아들이 있던 미망인 케 보스(Kee Voss)를 연모해 구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빈센트는 포기하지 않고 케의 부모(자신의 큰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때 큰아버지한테서 "너의 집념에는 구역질이 난다"는 심한 말과 함께 거절당한 그는 타오르는 램프 불꽃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고는 "이 손을 불에 대고 있는 동안 그녀를 데려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야말로 '스토커'다.

그다음 해에 그는 두 살 연상의 창녀 시엔과 알게 돼 동거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던 가족과 지인, 유일하게 자기 편이었을 테오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주인 나리들. 당신들 바른 예절과 교양을 소중히 여기고, 또 그게 사실 거짓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소중히 여기는 게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런 당신들에게 얘기하겠는데, 어느 쪽이 더 섬세하고 세련되고 남자다울까. 여자를 버리는 것과 일가친척 없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 중에서?

이 겨울에 나는 홀로된 임신한 여자를 만났어. 남자한테서 버림받았는데 그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었지. 아이 밴 여자가 겨울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빵을 구걸해야 했다, 이게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을 거야. (......) 나로서는 요만큼이라도 가치가 있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경우에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봐. (......) 좋은 모델을 얻어 내 소묘 실력이 좋아졌어. 여자는 길든 비둘기처럼 나를 따르고 있어. 나도 한 번은 결혼할 수 있는 몸이야. 그렇다면 이 여자와 결혼하는 것만큼 좋은 결혼이 있을까? 그건 그녀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야. 안 그러면 그녀는 궁핍해진 나머지 예전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이처럼 고흐는 시엔과의 동거를 묵인해주기를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옳다"며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시엔한테서 성병이 옮아 입원까지 해야 할 처지였는데도 자신만이 이 가련한 여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게다가 이렇게 쓴 그 편지에서 자신과 시엔을 위해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얼마나 염치 없고 자기중심적인 말투인가.

하지만 이건 "옳은" 행위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성가시다거나 독선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옳다"는 그의 주장을 도대체 누가 논파할 수 있을까.

"나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고 싶다"고 염원하지만 거듭 좌절당하면서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굳혀가던 빈센트는 마침내 거기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길든 비둘기"라는 비유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진정으로 대등한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할 순 없다. 그는 자신보다 무력한 존재를 자신을 버팅기는 수단으로 이용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 그는 시엔을 모델로 삼은 소묘 <슬픔>을 통해 그런 소망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882년, 헤이그에서 그린 그 소묘, 처진 유방, 바라지 않은 임신으로 부풀어 오른 배, 피로에 지친 나머지 웅크리고 있는 나체는 분명히 그때까지 서양화 역사에서 누구도 그린 적이 없는 인간의 슬픔 그 자체이며, 보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다.

빈센트는 결국 그 시엔과도 이별하게 된다. 이때 그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곧 파리에서 열리는 들라크루아 전람회에서 <바리케이드>라는 작품을 보라고 재촉한다. 그 그림은 나중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는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이며,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830년의 파리 7월혁명을 제재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는 그 무렵 그것을 1848년 2월혁명을 그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거야 어찌됐든.

1882년, 헤이그에서 그린 고흐의 소묘, <슬픔>. 처진 유방, 바라지 않은 임신으로 부풀어 오른 배, 피로에 지친 나머지 웅크리고 있는 나체는 분명히 그때까지 서양화 역사에서 누구도 그린 적이 없는 인간의 슬픔 그 자체이며, 보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다.

당시 서로 대립하던 사람들 속에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누구인가. 루이 필립의 대신(大臣) 기조가 한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연구자인 미슐레와 키네가 있다.

기조와 루이 필립부터 시작해보자. 그들은 악당이었나, 폭군적이었나.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보는 바로는 그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구필 노인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겉보기에는 실로 존경할 만하고 생각이 깊고 성실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좀더 엄밀하고 날카롭게 관찰해봐. 그들에게는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 정도로 음울한, 침침한, 생기 없는 면이 다분히 있어. 이런 얘기가 지나친 걸까? (......)

내 생각에는 만일 너와 내가 당시에 살았다면 너는 기조 쪽에, 나는 미슐레 쪽에 가담했을 거야.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일관된 태도를 굽히지 않고 서로 적군과 아군이 돼 슬픈 마음으로, 예컨대 저런 바리케이드를 경계로 서로 대치했을 거야. 너는 정부군 병사로 바리케이드 저쪽 편에, 나는 혁명의 무리 또는 반도叛徒로 이쪽 편에. (......) 너는 바리케이드를 향해 발포한다. 그래서 공을 세우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거기에 내가 있는 거야.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편지다. 그리고 뒤이어 빈센트는 돈 얘기를 쓴다. 누군가로부터 뜻밖에 소묘나 유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지인이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돈을 주려는 행위가 아닌지 의심하고는 '대금'을 받는 건 단호히 거절하고 소묘만을 그냥 보내주었다는 얘기다. "정말 돈이 궁할 때 돈을 거절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라는 말을 덧붙여서. 이 편지를 받은 테오는 "너는 기조 편"이라는 형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죽을 때까지 형이 생활을 계속 지탱해갈 수 있게 해주었다.

고흐 미술관에 따르면, 현존하는 고흐의 편지는 테오에게 보낸 것이 651통, 테오와 그의 처 요에게 보낸 것이 7통, 기타 누이나 동료 화가 등에게 보낸 것까지 포함해 모두 819통이나 된다고 한다. 한편 고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83통, 그중에서 테오 또는 테오와 요 연명連名으로 돼 있는 것이 41통이다.

여기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소개했지만, 고흐의 편지는 근대 고백문학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반생은 아를에서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다 파탄난 일(귀를 자른 사건), 생레미 정신병원에서의 투병, 테오의 결혼을 축복하면서도 그 결혼으로 동생의 사랑과 지원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데 대한 불안, 오베르 마을에서의 최후 등으로 이어져 간다. 그 시기의 편지에서도 소개할 것들이 많지만 하나만 더 보기로 하자.

모든 예술가, 시인, 화가가 물질적으로 불행한 것은, 비단 행복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분명 기묘한 현상이다. (......) 그것은 영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에겐 삶 전체가 눈에 보일까. 그렇지 않으면 살아생전엔 그 반쪽밖에 알 수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제쳐놓고 생각해보자. 화가는 죽으면 매장되지만 그 작품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그다음 몇 세대에 걸쳐 말을 건다. (......) 화가의 생애에서 죽음은 아마도 최대의 난관은 아닐 것이다. (......) 지도 위에서 도시나 마을을 나타내는 검은 점이 나를 몽상에 빠지게 하는 것처럼, 그냥 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까닭 없이 몽상에 빠진다. 왜 창공에 빛나는 저 점이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보다 다가가기 어려운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기차를 타고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갈 수 있다면, 죽음을 타고 어딘가의 별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추론 속에서 절대로 틀림없는 것은 죽어버리면 기차를 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한 별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1888년 아를, <론 강의 별과 달이 빛나는 밤>을 그렸을 때의 편지, 발병해서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의 편지다. 고흐는 죽음을 타고 별에 갔을까.

테오에 대해서도 덧붙여둬야 할 얘기가 있다.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1947년에 『반 고흐: 사회가 자살하게 만든 자』를 발표해, 테오도 고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회의 일원이며 그 죄를 나눠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테오는 바리케이드 저쪽에서 오직 자기 보신에만 급급했던 속물은 아니었다. 1872년 8월의 첫 편지부터 1890년 7월의 마지막 편지까지 651통의 편지와 사후에 발견된 유서의 초안까지, 그것들은 모두 테오에게 반드시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음에도 테오가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기에 이 무서울 정도로 적나라한 인간정신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889년, 빈센트가 생레미 병원에 막 입원했을 무렵이다.

2, 3일 전에 형이 보내준 귀중한 화물이 도착했어. 멋진 작품이 들어 있었지. (......)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아름다움은 없지만 뭔가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듯한 진실에 육박하는 것이 있어. 현란한 색칠을 한 그림을 사는 소박한 사람들보다 우리가 옳은 것인지 어떤지, 실은 그런 건 알 수 없어. 오히려 그들이 그런 그림에서 찾아내는 매력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같잖은 녀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동과 조금도 다름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형의 작품에는 착색 석판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강인함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색이 덧칠돼 있어서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거야.

이 글을 보더라도 테오는 동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형에 대해 소극적인 지원을 했다기보다는, 형의 작품의 가치를 확고히 믿고 당시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에 형의 '동지'로서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빈센트의 유서에 씌어져 있는 "너는 나를 중개자로 삼아 어떤 폭락에도 꿈쩍하지 않는 어떤 그림 제작 자체에 스스로 참여한 것이다"라는 얘기는 테오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빈센트의 사후에 테오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아, 어머니, 그는 바로 나만의, 오직 한 사람의 형님이었습니다!" "이 슬픔은 이제부터 언제까지고 나를 덮쳐 누른 채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 없겠지요. 굳이 뭔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건 그가 훨씬 전부터 소망했던 휴식을 그 자신이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테오는 형의 유작전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그 자신도 정신에 이상이 왔고, 위트레히트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테오도 또한 별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빈센트와 테오의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형제애' 따위의 평범한 표현으로는 드러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쪽이 없었다면 다른 쪽도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두 사람으로 한 사람의 천재가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오베르 마을을 찾아간 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어느새 테오의 두 배나 되는 시간을 산 셈이다. 당시 옥중에 갇혀 있던 두 형들은 살아서 출옥했다. 나는 책을 쓰게 됐고 일본과 한국에서 적지 않은 독자를 얻었다. 예상도 하지 못했으나 대학에 직장을 얻어 생활은 안정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간 몇 가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 나 개인은 그런대로 평온한 날들을 보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던 걸까. 이런 얘기를 해도 이해해줄 사람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 나이 때 죽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인간에게 오래 산다는 게 지고의 가치일까. 평온하게 생명을 연장하면 그걸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때때로 저 밀밭 풍경과 함께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솟구쳐온다.

가능한 한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다시 한번 얘기해두자면, 너는 단순한 코로의 화상과는 다른 어떤 사람이다. (......) 너는 내가 아는 한 그런 화상이 아니다. 너는 현실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행동하면서 방침을 정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너는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자신의 가슴을 권총으로 쏜 고흐가 입고 있던 옷에서, 그의 사후에 발견된 테오에게 보낼 유서 초안에 나오는 얘기다. 코로는 당시에 가장 비싸게 팔린 풍경화가다. 따라서 "코로의 화상과는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동생에게 금전 이상의 가치, 예술적 가치에 목숨을 바치라고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동생은 화상이었고, 그 동생의 지원으로 그림을 그리고 생활을 유지해왔는데도, 그걸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면서 굳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전 생애의 무게"가 걸려 있다.

이 말에 대해 미술평론가인 사카자키 오쓰로(坂崎乙郞)는 "(이상을 품지 않고, 자기실현을 포기하고, 평균적인 삶과 평범한 죽음을 바라는) 우리야말로 고흐의 가차 없는 고발 대상이 아닐까"라고 썼다(「고흐의 유서」).

"가차 없는 고발". 그렇다. 나 자신도 그때 이후 끊임없이 "너는 기조의 편이다"라는 고발의 소리를 귀 깊숙이 들으면서 살아온 듯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내가 이 고발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1914년, 테오의 아내 요가 서간집으로 간행했다. 이후 그것은 서서히 확충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간행됐다. 1953년, 고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암스테르담에서 네 권짜리 서간 전집이 출판됐고, 1958년에 그 영어판(3권)이 미국에서 출판됐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참조한, 미스즈쇼보(みすず書房)에서 펴낸 일본어판 전집은 이 영어판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초판은 1963년에 3권으로 출간됐으나 1970년에 총 6권으로 재편집돼 재간됐다. 내가 30년 넘게 늘 곁에 두고 보는 책으로 삼아온 것은 이 6권짜리 전집이다.

2001년에는 최근에 공개된 원문의 면밀한 독해를 토대로 예전에 일부 있었던 삭제나 생략, 복자覆字, 伏字 등을 복원한 새 번역 선집 『반 고흐의 편지』가 마찬가지로 미스즈쇼보에서 출간됐다. 고흐의 서간 교열과 번역 작업은 1911년에 프랑스에서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서간집』이 나온 이래 1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계속되고 있다.

만사를 금전적 가치나 사회적 지위라는 척도로 재단하고 서열을 매겨야만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런 척도에 맞지 않는 인간, 그런 척도와는 다른 가치를 신봉하는 인간은 고립당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고흐의 서간이 오래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믿는 바로는, 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고뇌의 원형'이 특이할 정도로 면밀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 '고뇌의 원형'은 글자 그대로 혼신을 다해 고투를 벌여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가 계속되는 한 고흐 서간집의 고전적 가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어느 때 자본주의가 과거의 것이 된 시대가 온다면, 고흐의 편지는 과거 인간들의 고뇌와 고투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내 서재 속 고전>(나무연필, 번역 한승동)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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