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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안보법안 반대시위 청년들에게 던져진 질문: "너네들 여기 연애하러 온 거 아니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해온 것은 평화헌법(일본 헌법 제2장 9조에서 전쟁을 위해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고 국가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지난주 평화헌법의 기반이 뿌리째 뽑힐 수 있는 법안이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 17일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안보법안’이 참의원 특별위원회(이하 특위)에서 가결된 데 이어 19일에는 본회의마저 통과했다. 이로써 아베 신조(일본 총리)가 추진한 안보법안은 4개월의 논란 끝에 국회 심의를 통과하고 최종 성립됐다. 올해 초만 해도 안보법안이 일본 전체에 큰 이슈가 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속전속결 처리였다. 아베의 숙원인 “보통 국가”,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일본은 한걸음 더 성큼 나아가게 됐다.

두개의 저항이 있었다. 대체로 언론들은 국회 안에서 대립하는 여야를 조명하느라 분주했지만 국회 바깥에서도 의미있는 저항들이 있었다. 일본의 시민사회단체가 그 바깥에서의 저항을 이끌었는데 실제 주인공은 단체가 아니라 시민들 그 자체였다. 저항이 싹트던 5월과 저항이 본격화한 7월, 안보법안이 통과되던 지난 19일까지 국회 앞에서 그 저항들을 목격했다. 언론에 잘 전달되지 않은 일본 시민들의 날것 그대로의 저항의 단면을 전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아시아의 민중들이 ‘일본인은 다 똑같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의 민중들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9월14일 도쿄도 지요다구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실즈’ 멤버인 한 20대 여성이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안보법안 반대 집회장에는 20대 젊은이들이 외치는 힙합 구호를 어른들이 따라 외치는 모습이 화제였다.

산케이신문의 시위대 숫자 계산법

5월3일 헌법집회(일본 ‘헌법의 날’을 기념한 집회)까지만 해도 좀 그저 그런 저항에 가까웠다. ‘전쟁을 시키지 않는 1000명 위원회’, ‘해석으로 헌법 9조를 무너뜨리지마! 실행위원회’, ‘전쟁하는 국가 만들기 반대! 헌법을 지키고 활용하는 공동센터’라는 사상적 배경이 다른 세 단체가 연대해 ‘총궐기행동실행위원회’를 결성한 것 정도가 좀 신선한-그러나 이 역시 전후 처음 있는 일- 정도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었고 늘 보던 얼굴들이 함께하는 분위기였다.

6월 초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변했다. 6월3일 헌법학자 166명이 ‘안보법안 철폐’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4일 중의원 헌법심사회에 참석한 헌법학자 3명이 모두 아베의 안보법안을 “위헌”이라고 답변했다. 이 중에는 자민당이 추천한 학자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전혀 새로운 부류가 집회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의 엄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7월5일 세 아이의 엄마이자 대학원생인 누리꾼이 페이스북에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엄마모임’(이하 엄마모임)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었다. 개설한 지 9일째 되는 7월13일 37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엄마모임’은 “전쟁에 보내려고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다. 누구의 아이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지역별로 자발적 모임을 발족시켰다.

엄마들에 이어 학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법학자를 중심으로 7월에 ‘입헌 데모크라시 모임’이 발족했고,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 모임’이 발족했다. <마이니치신문>이 8월23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의 모임’이 집계한 결과 소속 교수와 학생이 안보법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대학이 8월22일 기준 약 90개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 19일 새벽 도쿄 국회의사당 앞 시위대가 들고 나온 하트 모양의 일장기.

헌법학자가 왜 안보법안이 위헌인지 설명하고 대학교수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우자 학생들도 나섰다. 학생운동 단체 ‘실즈’(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그 중심에 섰다. 젊은 학생들은 어른들 앞에서 과감하게 힙합 리듬에 맞춘 구호를 외쳤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도 힙합 구호를 즐겼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연예인도 집회장에 나와 ‘전쟁 반대’를 외쳤다.

이것은 일본에서 매우 새로운 풍경이었다. 3년 전부터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의 시민운동을 지켜보고 다양한 주제의 집회에 참여했지만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엔 주로 집회의 발언자가 남자였고, 2시간 집회 중 1시간30분은 저명인사들의 연설이었다. 그러나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내 머릿속에 기록돼 있다.

#장면1. 2015년 8월30일 오후.

총궐기행동실행위원회는 8월30일 ‘10만명 국회 포위 행동 및 전국 100만명 행동’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하는 집회임에도 오전 11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꼬마가 자기 덩치만한 크기의 스케치북에 ‘아이들을 지키자’라고 크레용으로 글씨를 쓴 손팻말을 목에 걸었다. 이어 데이트 장소로 집회장을 고른 듯한 남녀 커플, ‘헌법 9조를 지키자’고 쓴 손팻말을 들고 온 중년 부부, 투명 비닐우산 위에 ‘안보법안 반대’라는 글자를 붙이고 온 노년 남성, ‘전쟁법안 반대’ 깃발을 자전거에 달고 국회 주변을 계속 도는 사람들, 빗속에서도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나온 엄마들이 국회 앞을 뒤덮었다.

전에 볼 수 없던 시위의 풍경에 다음날 일본 언론들은 발칵 뒤집혔다. 대부분 신문사가 조간 1면에 이날의 시위 현장을 실었다. 1960년 안보투쟁(1960년 미국 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 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운동으로서 일본 민중운동사의 최전성기로 평가된다) 때의 모습과 2015년 8월30일을 비교하며 실은 신문사도 적지 않았다. 참가자 수는 주최 쪽 추산 12만명, 경찰 추산 3만3천명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벌어졌던 2012년 9월23일 ‘탈원전 촉구 집회’(잘가 원전 1000만명 액션) 때 20만명이 모인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린 것이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일본의 보수신문들도 한국처럼 집회 참가자 수에 문제 제기하는 보도를 하는 모습이었다. 보수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8월31일치 기사에서 ‘안보법안 반대 데모, 진짜 참가자 수를 본사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정문 앞 경비를 섰던 경찰차량 앞에 기동대원이 15명 서 있었던 항공촬영 사진을 기준으로 해서 3만2400명이 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8월30일 국회 앞에 10만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자 국회 앞에는 전에 없던 차벽이 등장했다. 참의원 심의회의 중계를 하지 않은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사에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엔에이치케이는 9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참의원 특별위원회 심의회의 중계방송을 해야 했다.

인기 없는 야당을 향해 “힘내”

#장면2. 2015년 9월17일 저녁.

“여러분, 준비되었나요?” 힙합 리듬에 맞춰 사람들이 저마다 양손에 손팻말과 야광봉을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데이트 복장을 한 여학생과 야구모자를 쓴 콧수염 남학생 두 명이 무대위로 올라왔다. 안보법안 시위에서 가장 주목받은 ‘실즈’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은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뭐야?”

“이거야. 여기에 우리가 모인 것. 민주주의란 우리가 싸워서 얻어내는 것.”

“민주주의가 어떻게 생긴 거지?”

“민주주의는 이렇게 생긴 거지.”

“야당 힘내.”

“아베 그만둬.”

가장 인상 깊었던 구호는 “야당 힘내”라는 외침이었다. 한국에서 제1야당이 그 영향력에 비해 시민사회에서 인기가 없는 것처럼 일본의 민주당과 공산당도 이곳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야당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시각 국회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법안 저지를 위해 총리를 비롯해 방위성장, 참의원 의장 등에 대한 면책결의안을 제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회 중간중간 참의원, 중의원의 야당 의원들이 시위대를 찾아왔다. 국회 내 상황을 전했다. “여러분의 목소리가 국회의사당에서도 들린다”고 말하자 시위대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시위대 주변에서 ‘카페’를 열어 무료 음료수를 나눠주던 사람들, 소형 이동 발전기를 가져와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피시를 충전할 수 있도록 도운 ‘발전소 사람들’의 목소리도 함께 커졌다.

#장면3. 2015년 9월19일 새벽 2시18분.

9월19일 0시를 넘어 재개된 심의회에 모두의 눈이 쏠렸다. 의원들의 투표가 시작됐고 국회 앞의 사람들은 결과를 기다렸다. 중앙 무대에서 태블릿 피시를 통해 시시각각 전해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전쟁 반대, 절대 반대”를 외치던 구호가 “채택 철회”로 바뀌었다. 안보법안이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어서 나온 구호는 “선거하러 가자”였다. 일본 민중이 ‘정치는 생활이고 지속하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포함해 지금까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얘기를 듣던 젊은 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얘기해서도 어느 정치단체에 소속해서도 이른바 동원된 발상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나아갈 방향,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 고민하고 일어선 것입니다.” 지난 15일 열린 일본 참의원 특별위원회 중앙공청회에 참석한 실즈의 오쿠다 아키(23·메이지학원대 4학년)의 발언 중 일부이다.

실즈가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일본의 지상파 방송 <아사히 텔레비전>의 오락방송이 ‘실즈를 해부한다’라는 주제로 프로그램(비트 다케시의 어떻게 생각하나요)을 내보낸 적이 있다. 크게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었다. (1) 연애하려고 집회 참가한다 (2) 뒤에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특정 정당이나 단체가 있다 (3) 앞으로 자신의 진로에 도움을 받기 위해 참여한다(국회의원 출마 등). 방송은 실즈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실즈 회원들이 가장 불쾌해한 질문은 1번이었다. 한마디로 그러려면 클럽이나 다른 곳에 가면 되지 굳이 여기 안 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2번과 3번에 대해서도 앞서 인용한 오쿠다 아키의 발언에 이미 답이 있다. 이런 황당한 방송이 만들어진 배경은 젊은층의 정치적인 발언과 행동에 일본 사회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집회에 나온 내 주변의 20대 젊은 친구들은 “하라주쿠나 시부야에 있을 법한 또래의 친구들이 이제 구호를 외치거나 하는 모습들이 어색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생각보다 재미있다”, “신선하다” 등의 의견을 보였다.

“데모는 무서운 것? 이제는 일상”

일본 사회에서 1960년 안보투쟁 이후 ‘데모’는 무서운 것이었고 특정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렇지 않다. 더이상 데모는 일본 사회에 낯설지 않고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정치가 자신의 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고 발언하는 20대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실즈는 19일 새벽 안보법안이 통과하자 바로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날 헌법학자 등 100여명의 원고단이 구성돼 ‘헌법 9조를 위반했다’며 향후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70명의 다양한 분야 연구자와 학자들이 “헌법 9조하에서 지속해온 평화주의를 내다버린 폭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9월19일부터 23일까지 일본에는 이른바 ‘실버위크’라 불리는 연휴가 시작되었다. 정부 관계자 및 여당은 공공연히 연휴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안보법안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발언했다. 여당이 새벽에 법안 통과를 강행한 배경에는 그런 인식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23일 연휴의 마지막날 2만5천여명의 시민들이 다시 안보법 철회를 요구하며 도쿄 요요기 공원에 모였다. 같은 날 각 언론사가 발표한 여론조사는 아베 2차 내각이 임기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여전히 80% 이상의 국민은 “안보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물론 지금의 저항 분위기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 이어질지 불안한 시선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실즈의 활동에 자극받은 40~50대가 ‘미들스’(MIDDLEs)란 네트워크를 만들고, 안보법안에 반대했던 연구자, 헌법학자, 엄마들은 이제는 ‘법안’이 아닌 ‘법’이 된 안보법제에 계속 반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단체 이름에서 ‘안’을 빼고 그대로 활동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가까운 장래에 10만명이 모이는 데모를 다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데모가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되었다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지금, 일본 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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