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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요정' 배우 오달수(인터뷰)

  • 김병철
  • 입력 2015.09.26 15:02
  • 수정 2015.10.01 09:53

올해 한국 영화계는 동원 관객 1천만명을 넘어선 영화 세 편을 만들어내는 초유의 기록을 썼다. 전후 격변 시대를 산 아버지 세대의 삶을 그린 <국제시장>이 올해 초 1천만명을 훌쩍 넘은 관객을 모았고, 일제 강점기 독립군들의 친일파 암살작전을 다룬 <암살>과 부패한 재벌 권력에 맞선 광역수사대 형사의 활약이 펼쳐진 <베테랑>이 나란히 관객수 1천만명을 넘었다.

이들 ‘천만영화’에 담긴 앞 세대의 회한과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아픔, 현실을 넘어선 정의 실현과 응징은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음이 틀림없다. 그 환희의 순간들을 모두 함께한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덕수(황정민)의 오랜 친구이자,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의 조력자, 서도철(황정민)의 상관이었던 오달수(47)다.

그는 2002년 데뷔 이후 5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해 ‘명품조연’으로 불리는, 올해 초엔 누적 동원관객 1억명을 넘어서 ‘천만요정’이 된 배우다. 조만간 첫 단독주연의 영화도 개봉한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지난 19일, 그를 만나 영화 데뷔 이전 오랜 세월 몸담았던 연극 무대와 영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는 비극엔 안 어울려…슬퍼도 ‘페이소스’랄까”

▶ 관객몰이를 하며 흥행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엔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좋은 시나리오와 유명 배우, 확실한 배급망 같은. 특히 출연 배우가 누구인지는 영화의 흥망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지금까지 ‘천만영화’에 무려 7번이나 출연한 배우 오달수는 단지 운이 좋았던 걸까요? 실제로 만난 배우 오달수는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영화 속 캐릭터들보다, 더 차분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 ‘반전 캐릭터’ 속에 관객을 홀리는 마력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누런 하늘. 버려진 야적장에 홀로 선 주인공 ‘선우’(이병헌) 앞에 낡은 차 한 대가 다가와 선다. ‘명구’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운전석 창문을 연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 2시간짜리 영화의 한가운데에 러시아 무기 밀매상 명구가 있다.

“어디다 쓸 거요? 돈 아무리 많이 줘도 우린 거 확실하지 않으면 물건 못 주지.”

특유의 억양. 명구는 이어 뒷좌석 외국인과 러시아 말로 실없는 승강이를 벌인다. 그가 쓰는 러시아어엔 한국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였다. 명구는 잠시 뒤 걸려온 전화에 한눈을 팔다 야적장 한곳에 세워진 중장비에 차를 들이박는다. 당황한 표정의 선우. 명구는 왼손과 오른발에 깁스를 한 채 선우를 자신의 보스에게 데려가고 보스와 러시아인 동료, 명구는 선우가 쏜 총에 허망하게 죽는다.

선우가 쏜 총 한 발이 정확히 명구의 미간을 뚫고, 명구가 선우를 향해 쏜 다연발총은 모두 빗나간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명구의 출연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 시종일관 잔혹한 폭력과 살인, 복수로 일관된 누아르 영화에서 유일하게 코믹한 상황이 이 10분 동안 펼쳐진다.

명구를 연기한 배우 오달수(47)의 별명은 ‘요정’이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전작 <도둑들> 촬영 뒤 “관객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관객을 무장 해제시키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요정 같은 존재”라며 오달수를 치켜세웠다. 요정은 최근엔 ‘천만요정’으로 거듭났다. 올해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 세 편에 모두 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국제시장>에선 덕수(황정민)의 오랜 친구 ‘달구’가, 지난 7월 개봉한 <암살>에선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의 조력자 ‘영감’이, 8월에 개봉한 <베테랑>에선 서도철(황정민)의 상관 ‘오팀장’이 오달수였다.

그의 ‘천만영화’ 출연은 도합 7번째다. 역대 한국 천만영화 13편 중 <국제시장>, <괴물>, <도둑들>, <7번방의 선물>, <베테랑>, <암살>, <변호인>이 모두 오달수의 출연작이다. 다음으로 천만영화 출연작이 많은 배우는 3편씩을 찍은 류승룡, 정진영 정도다. 지금까지 오달수의 출연작이 동원한 관객은 1억5천만명에 육박한다. 흥행 성적만으로 가히 독보적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누구나 좋아하는 배우’라 할 만하다.

현실 속 오달수는 영화 속 달구(<국제시장>)와, 영감(<암살>)과, 오팀장(<베테랑>)과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였다.

‘달콤한 인생’의 명구가 최고

지난 19일 오후 현실의 명구는 긴장이 역력한, 어딘지 모르게 불쌍한 표정으로 약속 장소인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Hu:)’에 나타났다. 명구는 50편에 가까운 출연작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역할로 오달수 자신이 꼽은 캐릭터다. 영화의 한가운데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명구에 대해 오달수는 “아주 허접한 지하세계에 존재하는, 남을 죽이거나 해칠 것 같지 않은 그런 악당, 굉장히 연민이 가는 인물”이라 했다.

4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는 시종일관 느린 속도로 단어를 골라가며 말했다. 억양은 특유의 사투리를 느끼기 힘들 만큼 차분했고, 거듭 비슷한 질문을 받은 뒤에야 겨우 말을 끌어냈다. 여러 인터뷰 기사에서 스스로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린다”고 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현실 속 명구는 영화 속 명구와, 달구와, 영감과, 오팀장과 다른 새로운 캐릭터였다.

-오달수가 본명인지를 물어보라는 주문이 많았다.(웃음)

“본명이다. 형님도 ‘수’자 돌림이다. 한데 호적엔 돌림자가 ‘택’으로 돼 있다. 오달택. 항렬 때문에 그렇게 쓴 것 같다.”

-막상 만나니 영화에서 봐왔던 느낌과 다르다. 장난기 많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차분하고 진지해 보인다. 티브이 예능프로 섭외도 다 거절한다던데?

“강호동(<무릎팍도사>)씨 앞에 가서 말로 이길 자신도 없고. 오락프로라는 게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나가면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아 다 고사했다. 영화 홍보를 위해 영화 관련 프로그램 정도만 나간다. 홍보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니까.”

-영화 제작사에서 홍보 차원에서 예능프로 출연을 요청하지는 않나?

“사전 계약서에 그런 걸 넣는다. ‘오락프로는 하지 않겠다’고.”

-연타석 천만영화의 장본인인데 정작 본인은 영화 홍보를 적극적으로 안 하는 것 같다.

“홍보를 안 하려는 게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암살>(배급사 쇼박스)과 <베테랑>(CJ E&M)의 배급사가 서로 다르다. 둘이 붙게 되니 하려면 두 개 다 열심히 하거나 안 하려면 아예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최근 출연한 영화들이 연이어 관객 천만을 넘겼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국제시장>은 저도 시사회 때 보고 많이 울었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그리움 같은 것이 감동을 준 것 같다. <암살>은 배우들부터 시작해 다 훌륭한 영화다. 친일 청산 문제도 한 번쯤은 다룰 만한 것이고. <베테랑>은 기자 시사 때 내가 그랬다. ‘1997년 <넘버3> 이후 내가 본 가장 통쾌한 영화’라고. 까발림, 드러내놓음, 통쾌함 같은 것들이 있다.”

-세 영화에서 맡은 배역이 조금씩 다른 성격인데,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나?

“<국제시장>은 간단명료했던 것 같다. <암살>에선 아무래도 하정우나 나나 비밀스런 인물이라. 관객들한텐 친절한 인물은 아니지만 배우 입장에선 연기하기가 좋았다. <베테랑>의 오팀장 캐릭터는 시원시원하게 잘 드러나 있다. 아마 관객들도 느끼셨을 것이다. 통쾌하게 질러주고 뚫어주는 느낌이 있다.”

-촬영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 같은 게 있을까? 알려져 있지 않은?

“<국제시장> 땐 뱀 때문에 고생했다. 바로 귀 옆에서 나는 기분 나쁜 뱀의 혓바닥 소리는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거다. <암살>에선 내 캐릭터 이름이 원래 ‘영감’이 아니라 ‘포마드’였다. 그게 분장하다 완전히 바뀌었다. 폭탄머리 만들고 러시아 수염 달고 하다 보니 포마드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분장 쪽에서 시나리오에 없던 캐릭터를 만들어낸 거다. <베테랑>에선 독특한 액션, 재밌는 액션을 하려 했는데 편집이 돼 버려서…. 칼 든 조폭과 싸우는 장면이었는데 내가 들고 싸우던 신발이 칼에 잘려 툭 떨어지는 이런 장면들이 다 편집됐다.”

-동원 관객 누계가 1억5천만명 가까이 된다. 어떤 면에선 특정 영화들이 너무 많은 스크린을 점유한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에서 기인한 현상일 수 있다. ‘1억 배우’란 명명이 부담스럽다고 했던데, 그런 생각이 있는 건가?

“그리 깊이 생각하진 않았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다. 천만영화가 들어설 때 100편 이상은 쫄딱 망한다는 거. 근데 답이 없다. 착한 시나리오라 해야 할까. 상업적인 계산이 부족한, 그런 시나리오들이 많다. 그게 그들만의 영화 만드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대기업들이 영화 배급망을 장악한 상황이라 중소 배급사나 제작사도 그쪽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다. 치열하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암살>이나 <베테랑>은 사회적 메시지도 강한 편이다. 영화가 사회 의제를 제기하는 기능도 하는데 배우로서는 어땠나?

“배우에겐 의도가 있을 수 없다. 친일파에 대한 공분, 정의 실현에서 느끼는 통쾌함 그런 건 같이 느끼지만 배우의 입장에선 어떤 편견도 갖지 않는다. 편견이 없어야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 배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연기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 정치 성향은 있을 수 있지만 배우로서는 아니다. 말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내 정치 성향은 이런 거다. 황지우의 시에 그런 구절이 나온다. ‘버스 운전수의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들을 좌편향시킨다’. 이게 내 생각이다.”

첫 주연작 ‘대배우’

십수년간 연극배우로 살아온 오달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를 통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2002년에 개봉해 326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올드보이> 이후 오달수는 한 해 4~5편씩, 많을 땐 무려 9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명품조연’이 된다. <올드보이> 이후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도 이어졌다. 오달수는 박찬욱을 ‘인생의 은인’이라 부른다.

-<올드보이>의 대사 처리가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배우들이 원래 훈련 겸 직업적으로 관찰을 많이 한다. 독특한 사람이 있으면 기억을 해두는 경우가 많다. 극단 백수광부의 연출가 이성렬이란 분이 있는데, 사람은 매우 좋은데 말투나 걸음걸이 이런 게 ‘가져다가 연기에 써먹으면 좋겠다’ 그런 캐릭터다. <올드보이>에선 그분을 의도했다. 그 이야기를 언젠가 술자리에서 당사자에게 했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그러시더라.(웃음)”

-데뷔작은 <올드보이>에 앞서 찍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이다. 연극계 후배가 이 영화의 캐스팅 디렉터로 있었다고?

“그 친구가 ‘감독님 미팅 한번 해보라’고 제의했다. 당시엔 영화 병행하는 연극 선배들이 꽤 있었다. 내가 막차를 탄 경우다. 경제적 사정도 있으니 마다하지 않았다. 아, 한번 마다하긴 했다. 그때 ‘개런티(출연료) 얼마나 생각하느냐, 3회차 출연에 30만원 어떻겠냐’고 해서 바로 짐 챙겨 일어났다. ‘30만원 받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연극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걸 받아버리면 내 후배들은 어떤 대접을 받겠냐’고 했다. ‘얼마를 원하시냐’고 묻더라. 300만원을 불렀다. 사기성으로 부른 게 아니라 몰라서 그랬다. 얼마를 불러야 할지 감이 없어서. 그랬더니 ‘아유 그럼 250만원에 하시죠’ 그러더라. 속으로 ‘얼씨구나’ 했다.”

-박찬욱 감독과는 <올드보이> 이전에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촬영하면서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그 영화 조감독이었던 구자왕 감독이 <해적…>을 보고 박찬욱 감독에게 소개했다. 당시가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박 감독이 삭발하고 그랬던 때다. 별로 안 좋았을 때. 하루 반나절 촬영 마치고 먼저 가려는데 조감독이 내게 ‘거마비’ 쥐여주면서 그러더라. ‘감독님 요 근자에 웃는 거 처음 봤다’고. 왜 웃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후 한참 뒤에 박 감독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3~4개월 뒤 스케줄을 물으며 ‘비워달라, 염두에 두고 쓰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고 하시더라. 나야 당연히 ‘걱정하지 마시라’고 답했다. 그게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가 갇힌 사설감옥의 사장 철웅 역이었다.”

-철웅도 그랬지만, 대체로 악한이면서도 불쌍하고 힘없는 역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난 부산의 극단 연희단거리패에 입단하면서 처음 연극을 하게 됐는데, 연희단거리패의 연출가 이윤택 선생은 세계적인 연출가다. 그분이 그런 말을 하셨다. ‘악할수록 연민이 가야 한다’고. 악한의 전형성이란 건데…. <나홀로 집에>에서 조 페시가 연기한 도둑 같은 역이 대표적이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물은 정말 나쁜 놈, 절대악이잖나. 한데 과연 그런 절대악이 현실에 존재하나. 연민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악한도 결국 죽는다는 거. 옛날에 연애할 때 <바보각시>란 작품을 했는데 이윤택 선생이 하루는 부르셔서 ‘달수야 사람은 꼬라지대로 연기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연애를 하고 난 뒤부터 멋있어 보이려고 한 것 같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바보여야 하는데. 선생님 말로는 난 ‘소상’, 하회탈 같은 ‘웃는 얼굴’이다. 비극 하면 안 어울린다. 슬퍼도 페이소스(비애감)랄까.”

-첫 주연작인 <대배우>가 올해 하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세상일이 다 뜻대로 되지 않는, 고단하게 살아가는 아동극 전문 배우의 이야기를 그린 휴먼 코미디다. 대배우라는 제목은, 정말 대배우여서 그런 게 아니라 주인공의 아내가 전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아내 휴대전화에 뜬다, ‘대배우’라고. 자기 남편이 ‘대배우’라는 거다.”

-연극배우로 오래 살아온,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연극계에 애정이 많은 감독을 만난 건가?

“그런 것 같더라. 어디서 이런 에피소드를 모아왔을까 싶었다. 내가 잘 아는 연극판의 이야기여서 반가웠지만 너무 이쪽 바닥 이야기가 돼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연기를 하는 이유가 사람이 좋아서, 외로워서라지만 결국 관객에게 보여주고 관객에게 심판받는 것이니까. 관객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갔으면 좋겠다.”

-첫 주연인데, 어땠나?

“41회 촬영으로 찍은, 회차로 봤을 때 그리 많지 않은 영화인데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 3번 정도밖에 안 된다. 역시 주연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물론 감독의 부담이 더 크겠지만.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4회차 나오는 것과 40회차 나오는 것은 무게가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가훈, 말을 더듬어라

오달수를 만난 날은 주말이었다. <대배우> 촬영을 끝낸 오달수는 영화 <국가대표 2> 촬영을 위해 주중에 스케이트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맡은 역은 여자 아이스하키팀 감독. 그가 걷어 보여준 오른쪽 팔뚝은 손목 아래부터 팔꿈치까지 길고 굵게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얼음판에서 심하게 넘어진 듯했다.

“꼬리뼈나 고관절 안 다치려고 노력한다. 드러누우면 욕창 걸려서 죽어버리니까.”

이상한 농담. 항상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고 코믹한 역할을 주로 맡는 영화 속 그의 이미지가 잠시 불거져 나왔다. 스스로 숫기 없고 낯을 가린다는 이 사람은 어쩌다 배우가 된 걸까.

-성격이 정말 의외다. 부모님이 엄하신 편인가?

“아버님한테 손바닥 한 번 맞아본 기억이 없다. 대신 아버지로서의 무게감이 있었다. 야단을 치시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계셔도 무게가 느껴지시는 분이다. 성격은… 누나들 덕이 컸다. 누나들이 음악 하는 사람들이라 덩치도 좋고 어렸을 때 얻어터지고 그랬다. 기죽어 살다보니….”

-그동안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이나 가족들 이야기가 잘 안 나타나더라. 아버지가 교직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다.

“(현 경북대 사범대의 전신인) 대구 사범학교(일제 때 설립된 초등교원 양성 학교)를 나오셨다. 평생 교직에 계셨고 풍금을 잘 치셨는데, 6년쯤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살아계신다. 형제는 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큰형님이 계시고 내 위로 3살씩 터울인 누나 둘이 있다. 내가 막내다. 주로 누나들과 지내서 숫기가 없다. 작은누나를 따라 큰누나를 언니라 불렀다. 큰누나가 피아노, 작은누나가 성악을 전공했다. 형님은 큰 배의 배관을 설계하는 일을 하셨다.”

-가훈이 독특하다. ‘말을 더듬어라’라던데?

“서른살 되던 해에 세배를 드리니까 아버님이 덕담으로 ‘넌 이제 어른이니 앞으로 말을 더듬어서 해라’라고 하셨다. 정치인들 보면 왜 ‘에… ’, ‘저… ’, ‘그…’로 말을 시작하지 않나.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지 마라,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해주신 거다.”

-중고교 시절은 어땠나?

“너무너무 평범했다. 튀지도 않았고 고교 때 한번씩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막걸리 마신 것 정도다. 저녁에 술 취해 들어가니 어머니가 황당해하시며 ‘아버지 주무시니까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한 기억도 있다.”

-출생지는 대구인데, 학교를 다 부산에서 나왔다.

“부산으로 온 기억이 없을 정도로 어릴 때다. 사실상 부산에서 자랐다고 보면 된다.”

-그럼 명절엔 부산으로 가나?

“아버지의 고향은 대구 바로 옆 경북 청도인데 대구나 청도엔 먼 친척들만 계시고 부산 영도에 어머니가 계셔서 부산으로 간다. 명절엔 꼭 가려 한다. 좋은 날이니까. 이번에도 어렵게 어렵게 비행기표를 구했다.”

오달수는 21살이던 1990년 우연히 연극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십수년간 연극배우로 살아왔다. 삼수 뒤 겨우 들어간 대학(동의대 공업디자인학과)도 중간에 그만뒀다. 이미 입학 전 연극을 시작해버린 터라 학교를 졸업하는 일이 그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영화배우로 데뷔한 이후로도 꾸준히 연극에 출연한다.

2000년 1월에 만든 극단 신기루만화경의 ‘종신대표’도 맡고 있다. “연극판은 집, 영화계는 직장”이라 부를 만큼 연극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게 자라난” 소심하고 숫기 없는 청년이 20대 초반 우연히 시작한 연극은 삶 그 자체가 돼 버렸다.

-인쇄물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연기를 하게 됐다고 들었다.

“대학에 두 번 떨어지고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쇄물을 배달하러 제일 많이 간 곳이 부산 가마골소극장이었다. 그곳의 연희단거리패는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세계적 극단이었다. 공연 인쇄물이나 소책자 배달할 일이 많았고 자주 드나드니 어쩌다 밥 시간 걸리면 와서 밥 먹고 가라 해서 먹고, 그냥 가기 뭐해서 설거지해주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단원들과 친해졌다.”

연극배우가 위대해 보였다

-이전엔 연극에 전혀 관심이 없지 않았나?

“그랬다. 그런데 연습할 때 조명기 달고 있던, 나랑 편의점에서 같이 물 사먹던 사람이 최종 리허설 때 보면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커 보이는 사람으로 무대에 서 있더라. 연극을 하겠다고 덤벼들지 않아도 그렇게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위대해 보인다. 특히 여럿이 함께 단체로 만드는 수공업적 작업이 남루해 보이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희곡이 나오고 무대가 만들어지고 포스터가 찍혀 나오고 연기를 하고. 극장이란 빈 공간이 꽉 찬 느낌, 수공업적인 창조랄까.”

-그러다 출연까지 한 건가?

“어느 날 이윤택 선생이 ‘배역 하나가 펑크 났다’며 날 불러 맡긴 게 연극 <오구>의 ‘문상객 1번’이었다. 공연 시작 5분 뒤 등장해서 끝날 때까지 2시간 동안 마당에 앉아 화투 치고 앉아 있는 역할이다. ‘쓰리고다’ 이런 대사 하면서.”

-직접 출연하니 어떻던가?

“관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없는 마당극이었다. 문상객으로 앉아 있는 내 바로 뒤에 관객이 있었다. 패닉이 되더라. 정말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근데 이게 세계적 연극이 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이 됐다. 나중엔 독일, 일본으로 순회공연도 다녔다. 고생스러웠지만 계속하다 보니 인이 배고 그러다 연극에 젖어든 거다. 그 뒤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연극만 했다.”

오달수는 연극배우가 된 3년 뒤인 1993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첫 주연을 맡는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여러 차례 <오구>에 출연했다. <오구>는 그의 데뷔작이자, 연기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출연한 작품이었다.

<오구>의 출연진은 20여명인데, 문상객 1번으로 시작한 그는 나중엔 주인공 격인 상가의 맏상제 역까지 맡았다. 오달수가 맏상제였을 때 상대역인 노모가 배우 강부자였다.

-애초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나. 우연히 시작한 일인데 ‘계속해야 하나’ 그런 회의가 없었나?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연극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도 보통 1년 버티면 많이 버틴다고 한다. 많이들 왔다 나간다. 너무 힘들어서 스님이 된 친구도 있었다.”

-뭐가 힘든가? 수입이 적은 것?

“다 힘들다. 쌀은 사야 하니 관객을 모으기 위해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게 첫 번째 부담이고, 다음이 돈이 안 된다는 거. 우리나라에 신극이 들어온 게 1920~30년대인데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신극이 들어온 이후로 올해가 가장 힘들다’는 얘기를 해마다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을 수 있나?

“극장 안에서 같이 굶고, 같이 고생하고, 같이 포스터 붙이고, 같이 밤새우고. 그래도 좋다고 날짜 지난 포스터 둘둘 말고 야구공 만들어서 극장 안에서 야구 하고. 재미있다. 정이랄까. 날 포함해 연극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인간이 그리워서, 외로워서, 그런 사람들 많을 거다. 얼마나 좋나? 앞에 수많은 관객들 앉아 있고, 옆엔 매일 부대끼는 식구들, 동료들 있고.”

-연극을 그만둔 적은 없었나?

“딱 한 번, 결혼을 해야 했을 때. 아내는 이윤택 선생에게 연기 배우겠다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극단 동료였다. 3년 연애해서 결혼했는데, 처갓집에서 연극하는 사람한테는 딸 못 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만두고 1년 동안 주유소에서 일했다. 1년 뒤 처갓집에 ‘난 연극배우 아니다. 주유소 직원이다. 결혼시켜달라’고 했더니 시켜주시더라. 주유소는 그 뒤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스물아홉살 때였다. 그때 조광화라는 극작가 겸 연출가가 <남자충동>이란 연극을 하는데 같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바로 짐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생활은 어땠나?

“힘들었다. 결혼 생활도 얼마 못 갔다.(웃음) 6년 살다 이혼했다.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아내는 연극 그만두고 나름 직장도 다니고 돈도 잘 벌었는데…. 지금은 아이 문제로 의논할 일 있으면 만나고 아이랑 여행 간다든지 하는 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딸은 부산에서 할머니와 고모들이 돌봐주고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골치가 아파졌다. 양육 문제도 신경이 쓰이고 또 정말 외로워지기도 했고. 서울에 그야말로 혼자 남겨졌으니.”

-연극은 어땠나? 어떤 작품들에 출연했나?

“<남자충동>이 굉장한 인기를 끌어서 그때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 잘됐다. 프로필에 <남자충동>이 쓰여 있으면 그거 보고 캐스팅했다. 출연작이 ‘문제작’이라 할 작품들이 많았다. 운이 좋았다. 1999년엔 <흉가에 볕 들어라>란 작품에서 주연을 했는데 센세이셔널한 극이었고, 2001년엔 <인류 최초의 키스>란 작품을 했다.”

-영화에선 주로 이상하거나 코믹한 역을 많이 맡았다. 연극에서는 어땠나?

“임팩트 있는 역할. 어떻게든 관객한테 기억이 되는 역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흉가에…>에선 30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아침에 눈뜨면 내가 여기 왜 왔지? 그러면서. 흉가에 운명적으로 묶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종의 광인. <인류…>는 청송보호감호소 이야기인데, 미친 척해서 감호소를 빠져나가려는 사람이었다. 자기 똥도 먹는.”

함민복·김수영 시인 좋아해

오달수는 부산 연희단거리패 시절 딱 한 번 연극 연출을 한 적이 있다. 공연용이 아닌, 단원들 훈련용으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이때 단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자주 가던 술집 구석방에서 단원들이 오달수 몰래 신발까지 숨겨놓고 술을 마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냥 가려던 오달수가 이상한 느낌에 방문을 열었고, 숨죽이고 있던 단원들과 마주쳤다. 다시는 연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이때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 ‘외로움’, ‘고독’ 같은 것들이 뚜렷이 느껴졌다.

-시구를 인용하며 말씀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좋아하는 시인이 있나?

“함민복 시인을 좋아한다. 강화도에 사는.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이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김수영 시인이다. 함민복 시인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아서 더 좋았다. 김수영은 너무 인간적인 사람 같다. 산문에 보면 그런 게 있다. ‘나는 네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라는 그런 바보 같은 순간이 있다’. ‘나의 가족’이란 시는 감동 그 자체다.”

-언제 주로 그런 문학작품들을 보셨나?

“아버님께서 많이 보셔서 집에 책이 많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설국>을 쓴 일본의 소설가부터 시작해 쇼펜하우어니 헤르만 헤세니… 고교 때 뜻도 모르면서 읽었다.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주의자들은 죽겠다고 산속에 권총 한 자루 들고 들어가서 늙어 죽지 않나.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이 감성의 자양분이 된 거 같다.”

-본인이 맡은 배역은 아니지만 인상적이어서 외우고 있는 대사 같은 게 있을까?

“승룡이(류승룡)가 <7번방의 선물>에서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하지 않나. 그러면 딸이 그런다. ‘내 아버지여서 고맙다’고. 시나리오에서 그 대사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이 들면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20년 뒤에도 배우를 하고 있을까? 맡고 싶은 배역이 있다면?

“살아나 있으면 다행이다.(웃음) 지금이야 개성 있는 역할도 하고 액션도 할 수 있지만 그땐 원하든 원치 않든 프레임 자체가 아주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뭐든 하고 있을 것이다.”

-명절이다. 요즈음 명절에 가장 힘든 이들이 청년실업자들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덕담 한마디 하신다면?

“난 스물한살 때부터 결혼 승낙받기 위한 1년 빼고는 연극밖에 안 했다. 바보 같지만 우직했던 거다. 돌이켜보니 어딘가에 무한 애정을 줬고 그래서 배신당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청년들이 취업 때문에 너무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언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에 무한 애정을 쏟으면 언젠가는 그걸 고마워할 날이 오리라는 게 내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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