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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는 명절에 가족들과 봐야 한다

  • 김병철
  • 입력 2015.09.26 14:09
  • 수정 2015.09.26 14:10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추석 때 가족들끼리 보라고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네요.” 영화가 어땠느냐는 질문에 <사도>(2015)를 먼저 보고 온 이는 이렇게 답했다. 그 무슨 당연한 소리를. 아들이 칼을 들어 아비를 죽이려 들고, 그 아비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참극을 가족끼리 오순도순 보고 돌아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쉽게 앞질러 생각을 정리하려던 게으름은 스크린 앞에서 무참히 깨졌다.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걷어내고 역사적 기록을 충실히 옮긴 <사도>는 예상보다 더 묵직했다.

오랜 세월 정설로 여겨지던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쟁이라는 요소를 걷어내고 부자관계에 집중하자, 자식에게 기대와 애정을 넘치게 주다 못해 통제광이 되어버린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그 속에서 숨막혀 서서히 미쳐가는 아들 세자 이선(유아인) 사이의 애증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러자 내심 마음속에 엉뚱한 오기가 돋아났다. 어쩌면 <사도>야말로 명절을 맞이해 가족끼리 보고 오면 나눌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오기 말이다.

본디 수험생들에게 추석은 결코 반가운 명절이 아니었다. 가을 초입에 돌아오는 추석은 수능을 대략 한달 보름여 남겨둔 시점에 찾아오고, 안 그래도 부담감에 짓눌려 있는 학생들에겐 친척들이 별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한마디들이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지기 십상이다. “친척 아무개는 이미 수시로 합격했다더라. 너는 어찌 되어가냐”는 말은 불안과 자괴감을, “넌 원래 잘하는 아이니까 큰 걱정 안 한다”는 말은 그 기대감을 혹시라도 실망시키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을 더해준다.

이 부담이 어디 수험생만의 일이랴. 한해 동안 기울인 노력의 결과물을 얼추 확인할 시점에 자리한 명절이다 보니, 수많은 취업준비생과 고시생, 불완전고용 노동자들은 아예 귀성을 피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다.

묻지 않았으면 좋을 질문을 던지고, 하지 않으면 좋을 간섭을 충고라는 미명하에 던지는 가족 친지를 견뎌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흔히 ‘명절 잔소리 스트레스’라는 대수롭지 않은 단어로 요약되곤 하는 젊은이들의 귀성 회피는, 사실 어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남의 삶을 멋대로 예단하고 간섭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한국의 가족문화 자체에 대한 환멸에 가깝다.

과거엔 티브이가 이런 스트레스를 피할 가장 저렴한 도피처였다. 오늘날의 티브이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권위적인 태도로 자식의 삶을 통제하려는 부모들을 애써 ‘어떤 마음이신지 이해는 간다’며 변호해주고는 화급히 자식과 화해를 권유하는 에스비에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2015~)나, 아이들을 기습적으로 청학동 예절학교로 보내놓고 그 과정을 다 같이 지켜보던 제이티비시 <유자식 상팔자>(2013~)와 같은 쇼들은, 부모 자식 간의 소통 단절을 극복해보겠다는 지극히 선의로 가득 찬 기획의도와는 달리 종종 뒤틀려 있는 가족관계를 ‘화목’이라는 단어로 덮어버리며 진짜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렵게 시작한 부모와의 대화가 어정쩡하게 봉합되는 과정을 티브이에서까지 봐야 한다니, 자식 된 입장에선 보고 앉아 있는 일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과거엔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과 사교육 열풍을 비판하는 염치라도 갖추고 있던 티브이는, 오늘날엔 오히려 노골적으로 그 욕망을 부추긴다. ‘성적 향상의 욕망을 지닌 이들을 위한 토크쇼’라는 부제를 달고 방영되었던 티브이엔 3부작 토크쇼 <성적욕망>(2015)에, 그 욕망의 주체가 수험생 본인이 아니라 수험생의 부모들이었단 사실은 큰 비밀도 아니었다. 사교육 홍수 속 돈낭비를 막을 비책을 알려주겠다는 홍보 문구와 달리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들은 유명 사교육업체 대표강사들이었고, 방송사는 해당 업체가 제작비의 일부를 댔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게스트로 초대된 김범수 아나운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학생의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제작진은 그 말을 한차례 더 압축해 자막으로 제시한다. “학창시절 효도=공부를 잘하는 것” 저마다 제 적성과 지향에 맞춰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학창시절 삶의 방식을, 제작진은 ‘효도’라는 프레임을 씌워 한 가지만 정답으로 인정한다.

자식에게 과도한 기대와 투자로 숨쉴 틈을 막아버리는 풍토에 대해, 티브이는 더 이상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20여년 전 처음 강남 지역에 영어 유치원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언론은 진영을 막론하고 이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우리말을 깨우치기도 전에 영어부터 가르치는 데서 오는 여러 문제들을 교육적으로 먼저 헤아려보”라는 충고부터(1995년 3월14일 <동아일보> 사설 ‘유아영어교육의 문제점’),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남의 나라 말을 그렇게 일찍 가르치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이성을 벗어난 풍조”(1993년 1월28일 <한겨레> 사설 ‘코흘리개 영어교육과 말의 자주성’)라는 준엄한 꾸짖음까지.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제이티비시 토크쇼 <연쇄쇼핑가족>(2015~)은 영어 유치원 열풍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부모 세대가 영어의 중요성을 너무나 사무치게 느꼈기 때문에 내 아이만큼은 영어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 때문에 영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이중언어 사용자로 자랄 것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의 고충은 지극한 자식 사랑의 결과 정도로 포장된다.

통제광 아버지와 그 기대감과 질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해버린 미치광이 아들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 <사도>가 그려 보인 지옥도는, 250여년 전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졌던 참극이 오늘날 각 가정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대놓고 암시한다. 마흔 넘어 본 아들이 지나치게 총명했던 탓에, 영조는 간신히 돌을 넘긴 이선을 세자로 책봉한다.

세살짜리 아이가 ‘사치’라는 단어를 보고 “비단은 사치요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고 구분을 하는데 세상 어느 부모라고 이 아이의 비범함을 무시할 것이며 영재임을 불신하랴. 그러나 본디 어려서 천재 소리 한차례 안 듣고 자란 아이가 더 드문 법이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배가 되는 법. 글줄 외우고 읽기보단 내관들과 칼싸움하길 즐기고 그림 그리길 즐기는 소년으로 자란 세자에게 영조는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다 마침내 미움을 품는다.

서울 안에서도 유난히 교육열이 뜨거운 목동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게, <사도>의 풍경은 마치 “네가 어렸을 땐 참 똑똑했는데 어째 공부 머리는 자라지 않느냐”는 한탄 속에 자기모멸을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알아서 포기하던 주변 친구들을 다시 보는 것처럼 익숙했다.

자식이 공부를 멀리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문제를 삼으며 숨통을 조여서 끝끝내 광인으로 만들어 놓고도, 영조는 그 결과를 안타까워할 뿐 원인에 대해선 “그게 다 너 제대로 된 왕 만들려고 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부러워하며 이해를 갈구하던 이선은, 폐세자의 신분으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아비의 말에 피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소.”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아비의 콤플렉스를 과도한 조기교육의 형태로 투사당했던 유년, 뒤틀린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해 세손과 비교당하고, 말투부터 성향까지 죄다 아비의 기준으로만 재단당했으며, 공부하는 것이 효도라는 <효경>의 구절에 얽매여 잠도 편히 자지 못했던 나날들은 어두컴컴한 뒤주 속에서 저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못 보던 가족을 만나 화목하게 보내고 와야 한다는 명절의 강박관념은 종종 진짜 문제를 덮어버린 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고생과 이해를 강요한다. 좋은 날 왜 불편한 얘기를 꺼내느냐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여느 가족에게나 다 있을 법한 갈등을 손쉽게 은폐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돌이켜볼 때, 명절의 진짜 의미란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족이란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던가? 그저 웃는 모양새로 명절을 마무리하고 싶다면 <사도>는 당연히 피해야 할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명절을 그 거죽만이 아니라 속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심을 나누는 계기로 삼고 싶다면, 용기 내어 도전해볼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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