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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의학이 발전하고 나서는 그냥 죽는 일이 좀처럼 없다. 이제 대부분 사람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용감하게 메스에 몸을 맡기고 장과 폐를 열어젖힌다. 하버드 출신 외과의인 저자 아툴 가완디는 시간 대부분을 수면과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삶의 질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버려가며,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먼 마지막을 택하는 환자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는 지난 세기 인류가 의학을 통해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인가(연명치료)'에 대해 논의해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할 순간이라고 말한다.

  • 박세회
  • 입력 2015.09.25 09:28
  • 수정 2016.09.25 14:12
ⓒgettyimagesbank

인생의 마지막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며 이런 상상을 해봤다. 한 달에 한 번 내 인생의 행복도를 1부터 10까지 등급을 매겨 평가하는 상상.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죽을 때쯤엔 인생을 점수로 환산할 수 있지 않을까? 죽기 직전, 일기장을 모아놓고 그간 차곡차곡 기록해 놓은 각 달의 행복점수를 모두 더한 후 개월 수로 나누고는 '흠, 내 인생의 중간값은 5.3이고 평균값은 5.7이고 표준편차는 1.2 정도니까 꽤 행복하고 고른 삶을 살았군'이라고 인생을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 대니얼 카너먼 박사에 따르면, 우리는 이런 산술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대장 내시경 시술과 신장 결석 수술을 받는 환자에게 전 과정 동안 60초 간격으로 1부터 10까지 통증 정도를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시술이 끝난 후 '전 과정의 통증 점수'를 물었다고 한다.

이를 비교한 결과 흥미로운 결론이 나왔다. 환자들이 매긴 통증 점수는 시술 과정에서 기록한 통증 데이터의 중간값이나 평균값과는 달랐다. 대신, '가장 아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더해서 나눈 값과 가장 비슷했다. 그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정점과 종점 규칙(Peak-End Rule)'이라는 중요한 원리를 세웠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조금 어렵고 복잡한 방법으로 '유종지미'의 중요성을 입증해낸 것일 뿐이다.

마지막은 고통 스러워졌다

1900년대 이후 의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백 년 전과 비교하면 '인생'은 두 배가 넘는다. WHO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의 기대연수는 1900년엔 31세, 1950년에는 48세였고, 2010년에는 67.2세로 늘었다. 그 어느 호황기에도 누려본 적이 없는 '초'장수 시대로의 돌입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마지막은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예전에는 말에서 떨어지거나 흑사병에 걸려 짧은 고통의 순간을 넘기고 바로 유명을 달리했지만, 의학이 발전하고 나서는 그냥 죽는 일이 좀처럼 없다. 이제 대부분 사람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용감하게 메스에 몸을 맡기고 장과 폐를 열어젖힌다. 2014년 아마존이 선정한 최고의 책으로 꼽힌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하버드 출신 외과의인 저자 아툴 가완디는 시간 대부분을 수면과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삶의 질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버려가며, 존엄한 죽음과는 거리가 먼 마지막을 택하는 환자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는 지난 세기 인류가 의학을 통해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살 것인가(연명치료)'에 대해 논의해왔다면, 이제는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할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우리 모두 이렇게 죽읍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내가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지에 대한 얘기뿐이다. 어떤 죽음이냐에 따라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현대인은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남성의 경우 70~79세까지가 가장 많은 사람이 죽는 나이로 이 연령대의 사망 원인 중 암이 차지하는 비율이 34.4%에 달한다(2013년 통계청 자료).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더 좁혀보자. 만약 죽을 암에 걸렸다면 나는 어떻게 존엄을 유지할 것인가?

안락사는 싫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안락사다. 스위스에는 '디그니타스'라는 병원이 있다. 영어 '디그니티'(Deginity)의 어원인 '디그니타스'(Dignitas)는 '존엄'의 뜻이다. 이 병원이 하는 일은 안락사의 지원이다. 이달 초 영국의 일간지 '더 선'은 표지에 '나는 오늘 두 시에 죽을 것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안락사를 도와주는 것은 물론 디그니타스 병원에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인 영국의 68세 남성 밥 콜 씨가 디그니타스 병원에서 죽음을 택한 이야기다. 18개월 전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안락사를 택한 후, 본인 역시 폐암의 일종인 중피종 진단을 받은 밥 콜 씨의 죽음이 '존엄하지 않았다'고 말하긴 힘들다. 1998년 병원 설립 이후 작년까지 이 존엄 병원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은 모두 1천905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봐도 안락사는 나같이 소심한 겁쟁이의 길이 아니다.

호스피스를 선택할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아툴 가완디는 자신의 환자 새라를 예로 든다. 폐암 판정을 받았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이었고 배 안에는 39주 된 아기가 있었다. 그녀는 엘로티닙, 카보플라틴, 파클리탁셀을 비롯한 거의 모든 화학요법을 시도했으나 결국 네 번째 화학요법을 받다 숨을 거뒀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 순간은 지옥이었다. 인생은 한 번이라 선택과 결과를 놓고 비교할 방법은 없지만, 그 3개월을 다르게 살 방법이 있었다. 연명치료를 그만두고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는 길이었다.

아직도 논란이 되는 2008년의 한 연구가 있다. 호스피스 단체에서 주관한 이 연구에서는 말기 암이나 울혈 심부전을 가진 4,493명의 메디케어 가입자들을 회귀 조사했는데 몇몇 질병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선택한 환자들의 생존기간이 더 높게 나타났다. 췌장암은 3주, 폐암은 6주, 울혈 심부전은 6개월을 더 살았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이력을 다시 되짚어보는 회귀 조사의 성격상 연구의 설계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조사한 6개의 질병 중에서 3개의 암을 제외하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3개의 암에서조차 생존기간이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 아닌가?

새라의 경우 의료진과 환자는 마지막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호스피스의 길을 택하지 못한 이유는 죽음을 테이블 위에 속 시원하게 올려놓고 얘기한다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었다. 아툴은 이 책에서 사회학자인 컬러스 크리스터키스가 말기 환자 500여 명의 주치의들과 그 환자를 추적 조사한 연구를 소개한다. 주치의에게 환자의 상태를 물은 이후 환자들의 병세 추이와 비교했더니 63%의 의사는 환자의 생존 기간을 실제보다 길게 잡았으며 평균적으로 530% 과대평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의료진도 인간이고 질병과 싸우는 환자를 앞에 두고는 본인도 긍정적인 암시를 받기 마련이다.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사는 없다.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내가 70세가 된다면(지금의 음주와 흡연 습관을 보면 이것도 거의 꿈에 가깝지만) 그리고 암에 걸려 치명적인 상태에 다다른다면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를 찾을 것이다.

기계의 힘을 빌리고 싶진 않지만

몇 주전 한 친구와 어떻게 죽을 지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 친구가 자기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줬다. 친구의 어머님께서는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 등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연명을 의지하는 모든 수단을 거부하시고 심지어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제로 시신기증을 기증할 의사를 밝히셨다고 한다. 아들로서는 서운하고 충격적일 수도 있겠지만 2008년 '암에 대처하기'라는 전미 규모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이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결정이다.

이 연구에서는 말기 암 환자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 중환자실에 들어가 집중 치료를 받았을 경우와 그런 인위적 개입을 받지 않았을 경우를 비교했다고 한다. 죽을 사람을 되살려 낸 경우와 죽음에 순응한 케이스를 비교한 것. 그 결과 후자의 경우가 마지막 일주일의 삶의 질이 훨씬 높았으며, 전자가 후자보다 사망한 사람을 돌봤던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세배나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기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라고 생각해보면 선뜻 내리기 힘든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심장 한번 멈추는 게 무슨 대수인가? 살려낼 수 있는데 포기하는 건 막상 닥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특히 가족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살아나 획득한 삶의 마지막이 가치가 있을까? 친구의 어머님도 이런 고민을 하시고 결정을 내리셨겠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존경스럽지만, 만약 지금 내 앞에 누군가가 '심장이 한번 멈추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서약서를 들이밀고 서명을 하라고 하면 당장에 거절할 것이다. 그래서 당장 친구 어머님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숙하고 합리적인 인격을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물론 건강하게 살았을 때의 이야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도서출판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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