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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동대표가 되다

아래, 위층 간 소음을 둘러싼 갈등이 격한 감정 대립으로 비화한 사례가 발표됐다. 심야에 세탁기나 운동기구 사용을 하지 말아달라는 방송을 아무리 해도 막무가내인 세대가 있게 마련이다. 운동기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사례가 적지 않단다. 자폐증을 앓는 아이가 한밤중에 발을 구르고 벽을 마구 두드리는 소동처럼 아예 대책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보다 난감한 건 심야 부부싸움이란다. 30분 정도면 참아줄 수 있다는 인내심을 발휘해보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물건을 서로 던져가며 점점 가열차게 진행되는 위층의 부부싸움을 견디다 못해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한 세대들이 드물지 않다는 얘기였다.

  • 정경아
  • 입력 2015.09.29 07:16
  • 수정 2016.09.29 14:12
ⓒgettyimagesbank

햇볕 따갑던 8월, 아파트 대청소의 날 공고문이 떴다. 전례 없는 일이다. 지은 지 28년이 지났고 무려 802 세대가 살지만 단 한 번도 이런 행사 안내를 본 적이 없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공지를 본 딸이 함께 참가하잔다. 겨울에 쌓인 눈 치우자는 단지 내 방송에도 응한 적이 없어 내심 켕기던 터. 긴팔에 챙 넓은 모자로 완전 무장하고 나갔다.

예상대로 극심하게 낮은 호응도. 몇몇 동대표자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전부였다. 일반 입주민은 우리 모녀 뿐. 살짝 난감했지만 단지 내 꽁초와 쓰레기 줍기를 한 시간 정도 해보자는 주최 측 설명을 들었다. 이어 집게와 비닐봉지를 지급받았다. 매의 눈으로 골프공, 과자봉지와 플라스틱 옷걸이, 흙에 반쯤 파묻힌 유리병 조각까지 찾아내다 보니 후딱 한 시간이 갔다. 목 마르고 땀이 흘러 빨리 집으로 갈 생각밖에 없던 차, 뜻밖의 제안이 왔다. 내가 사는 114동 동대표가 1년 넘게 공석이니 우리 모녀 중 누군가 동대표를 맡아달라는 거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사는 게 목표인 나. 그러나 거절을 매끈하게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어물어물 동대표 입후보를 하고 입주민 투표 절차를 거쳐 당선됐다. 임기는 2년, 득표율은 약간 수상한 98%.

9월 초, 임시 동대표 회의가 소집됐다. 동대표 9명 전원이 아파트 단지 내 시설 점검 투어에 나섰다. 관리소장의 안내로 메인 기계실과 전기실, 온수 공급시스템을 둘러봤다. 아파트 옥상 누수 현장도 봤다. 응급 보수나 보완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전기·기계실 실무진의 브리핑 후 현장 토론이 벌어졌다. 6억 6천만 원에 이르는 장기수선충담금이 있지만 집행은 주민 과반 동의 투표를 거쳐야 하기에 쉬운 문제가 아니다.

2년 후면 단지가 완공된 지 30년이다. 최근 재건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재건축 요건 충족을 위한 안전 진단 등 절차를 내년부터 밟을 예정이라는 게 대표자회의 회장의 말씀. 이 때문에 시설 보수·보완에 덜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고 예방을 위한 선제적 대응엔 원칙적으로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입될 비용의 효율성과 노후 설비로 인한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 사이의 저울질을 해야 하는 게 현실. 이건 시설 관리 실무자들 뿐 아니라 동대표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할 사안이다. 동대표회의가 지닌 의결권 때문에 사태 발생 시 민·형사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회의 참석비로 5만원을 받는 것도 심리적 부담을 준다.

9월 중순, 이번엔 월례 동대표회의가 열렸다. 첫 번째 의안은 8월 관리비 부과 내역을 심의하고 승인하기. 온수의 톤당 가격에 대한 질문에 이어 온도를 둘러싼 격론이 벌어졌다. 지역난방공사에서 보내온 뜨거운 물이 단지 내 열 교환실을 거쳐 각 가정으로 배달될 때 온도는 38도 내지 45도 정도로 낮아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열효율을 높이려면 열 교환실 설비뿐 아니라 각 세대의 온수 배관을 새로 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는 온수를 많이 쓰는 집이 덜 쓰는 집보다 이익이라는 관리소 측의 설명. 일종의 불공평이다. 그 배경이 되는 비용 계산법을 알려줬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했다.

얼마 전 시설점검 투어 결과 긴급보수를 요하는 사안들의 우선순위를 정할 차례. 심하게 부식된 지하배수관 교체를 포함, 옥상 누수 대책 등을 일단 실행하기로 했다. 또 하나의 안건은 층간소음관리위원회의 구성이었다. 아파트관리규약에 따르면 동 대표자, 관리사무소장 등 5명 내외로 구성해야 된다나. 동대표회의 회장과 관리소장 외에 나와 또 한 명의 여성 동대표, 그리고 한 분의 입주민을 위촉하기로 했다. 일층에 살면서 단지 내에 온갖 꽃을 심고 가꾸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여준 할배 한 분이란다. 5명의 위원 중 관리소장을 포함해 여성이 3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싸움보다 조정에 강한 여성들의 중재 능력을 믿고 싶기 때문이라는 게 동대표자 회의의 중론.

제 3자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해진 층간소음 갈등은 이웃사촌들 간 우정결핍증을 씁쓸하게 증거한다. 그간 아래, 위층 간 소음을 둘러싼 갈등이 격한 감정 대립으로 비화한 사례가 발표됐다. 심야에 세탁기나 운동기구 사용을 하지 말아달라는 방송을 아무리 해도 막무가내인 세대가 있게 마련이다. 운동기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사례가 적지 않단다. 자폐증을 앓는 아이가 한밤중에 발을 구르고 벽을 마구 두드리는 소동처럼 아예 대책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보다 난감한 건 심야 부부싸움이란다. 30분 정도면 참아줄 수 있다는 인내심을 발휘해보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물건을 서로 던져가며 점점 가열차게 진행되는 위층의 부부싸움을 견디다 못해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한 세대들이 드물지 않다는 얘기였다.

층간소음위원회가 정식 출범하게 되면 먼저 함께 모여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조정 전문가를 초청해서라도 사례별 대처 매뉴얼을 익혀야 하지 않겠는가. 사안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먼저 당사자 쌍방의 말을 잘 듣는 게 첫 번째 단추다. 갈등 당사자들이 함께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다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은 더 헤아리게 되지 않을까. '비폭력 대화'의 기술을 함께 공부하고 익혀 나가는 것도 한 요령일 것 같다. 섣부른 중재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타협점을 찾아내게끔 의사소통을 부채질하는 촉매자 역할을 하게 됐으면 좋겠다.

단지 내 부녀회 임원들과도 조만간 만나 함께 할 일을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모여서 책 읽는 모임을 내심 구상하고 있다. 관심을 가진 여성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조급할 건 없다. 무엇을 하든 신참 동대표로서 오늘의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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