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도심 속 ‘개미 제국' 발견...1000만 마리 한가족 살아남을까

  • 강병진
  • 입력 2015.09.23 10:09
  • 수정 2015.09.23 10:10

안양시 농림축산검역본부 구내 정원 화단의 경계석 사이 개미굴 입구에 몰려 있는 일본왕개미들. 약간 커 보이는 개체들은 일개미 가운데서도 병정개미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경찰서사거리와 현충사거리 사이에 있는 농림축산검역본부 구내 정원은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으로 제법 알려진 곳이다. 일제 때인 1942년 이곳에 터를 잡은 조선총독부 가축위생연구소 지소에서 출발해 이름만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이런 역사를 몰라도 누구나 아름드리 벚나무들 한가운데 우뚝 버티고 선 흉고직경 1m가 넘는 거대한 버드나무만 보면 이 정원이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7000여㎡에 이르는 이 구내 정원과 그 아래 땅속이 정원의 역사만큼 오래된 일본왕개미의 거대한 제국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름과 달리 이 개미는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이름에 ‘일본’이 붙은 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명명돼서다. 인가 주변과 공원, 산지의 건조한 풀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왕개미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개미 120종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몸길이가 최대 15㎜에 이른다.

지난봄 국립생태원에 전시할 열대개미 검역 문제로 축산검역본부를 찾았다가 잠시 쉬려고 정원에 들어선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의 눈에 심상치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일본왕개미들이 정원의 산책로 주변에 수십마리씩 몰려다니고 있었다. 개미들은 산책로와 화단 사이에 둘러쳐진 경계석을 마치 고속도로처럼 이용하고 있는 듯했다. 개미의 생태를 소개한 <개미제국의 발견>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개미 전문가의 탐구심이 발동했다.

최 원장이 본부 구내를 천천히 돌며 살펴보니 본부 건물 앞 정원 전체를 일본왕개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개미들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군체들이 모여 있을 때 종종 발견되는 군체 간 전쟁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 원장은 바로 간단한 실험에 들어갔다.

“멀리 떨어져 활동하고 있는 개미 무리 가운데서 몇마리씩 붙잡아 다른 무리들 사이에 떨어뜨려 봤어요. 서로 군체가 다르면 싸움이 벌어지는데, 아무렇지 않게 섞여들더군요. 어쩌면 정원에 있는 전체 개미가 한 군체, 즉 어마어마한 초군체(supercolony)를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왕개미 초군체가 서식하는 농림축산검역본부 구내 정원을 본부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모습.

최 원장의 연락을 받은 국립생태원 생태진화연구부 연구팀의 정밀조사 결과는 최 원장의 예상대로였다. 연구팀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정원 안에 서식하는 일본왕개미들이 적어도 50년 전에 결혼비행을 마치고 정착한 한마리의 여왕개미로부터 출발한 한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원 땅속에 미로처럼 얽힌 개미굴에는 2만~3만마리 규모로 알려진 일본왕개미 일반 군체 크기의 수백배인 1000만마리 이상의 초군체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고 있으리라 추정됐다. 최 원장의 책 제목 그대로 ‘개미제국의 발견’이었다.

최 원장은 “일본·미국 등 외국에서 확인된 초군체 규모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한 규모”라며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험으로는 국내에서 그 정도 규모의 일본왕개미 군체를 직접 확인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11일 오후 찾아간 농림축산검역본부 구내 정원에서 가장 많은 개미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정원 한가운데 있는 버드나무였다. 어른 둘이 팔을 둘러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이 나무의 표면은 온통 오르내리는 개미들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개미들의 최종 목적지는 잎사귀였다. 이들이 한두마리씩 매달려 있는 잎사귀들에는 모두 검은색의 작은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노푸름 국립생태원 생태진화연구부 전문위원은 “검은색 벌레는 털진딧물 종류”라며 “개미들이 딱정벌레와 같은 진딧물의 천적으로부터 진딧물을 보호해주고, 진딧물은 개미에게 단물을 제공해주며 서로 공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내 정원 안 산책로와 가장자리 곳곳에는 개미들이 굴을 파느라 밀어내 놓은 흙더미들이 쌓여 있었고, 최 원장이 보았던 대로 경계석을 따라 길이 1㎝ 안팎의 개미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가끔 보이는 1㎝ 이상의 큰 개미들은 일개미 가운데서도 병정개미들이었다.

농림축산검역본부 구내 정원의 버드나무 잎에서 공생하는 일본왕개미와 털진딧물. 조용철 생태사진가 제공

국립생태원에서 개미탐험전을 진행하고 있는 최 원장은 “농림축산검역본부 정원은 서식하는 개미 군체의 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개미들이 마치 화단 경계석을 고속도로로 이용하는 것처럼 경계석을 따라 움직이고 있어 개미를 관찰하고 연구·교육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며 “이곳의 개미 군체들을 잘 보존한다면 전체 생태계의 물질 순환을 그대로 보여주는, 우리나라는 물론 국외에서도 보기 힘든 생태 교육·전시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심 한복판에 수십년간 존속해왔으리라 추정되는 이곳 개미제국의 운명은 안양시에 달렸다.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올해 말 경북 김천으로 이전하며 안양시가 개미 군체 서식지를 포함한 본부 터 5만6000여㎡의 새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축산검역본부가 떠난 것을 계기로 이곳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이라도 벌어진다면 개미제국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안양시청 도시정비팀 백수임 주무관은 “시가 2018년 5월까지 매입대금 1293억원의 분납을 완료해 이 땅의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 활용하는 방안으로 공공기관과 상가가 한데 들어가는 관상복합타워, 아이티(IT)·벤처단지, 유보지와 공원 등 다양한 제안을 놓고 검토가 진행중”이라며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개미 #환경 #자연 #사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