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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 보기 부끄럽다

더 배운 사람, 더 가진 사람들의 세계라고 해서 불평등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세계의 여성들이 양성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반드시 더 불행해야 할 조건을 갖출 필요는 없다. 양성평등을 말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어떠한 특별한 자격 기준이 있는가? 그 기준에 따라서 그가 말하는 페미니즘에 등급이라도 매겨지는가? 그렇다면 현대대인으로서 '자유'의 가치를 말하면 그것은 족쇄를 차고 비참한 삶을 살다간 19세기 노예들이 말하는 '자유'보다 질이 낮은 것인가? 여기에 어떤 '진정성'의 위계라도 존재하는가?

  • 꿀곰
  • 입력 2015.09.22 08:43
  • 수정 2016.09.22 14:12

이틀 전, 엠마 왓슨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외국어(한글)로 되어있고, 뉴스미디어에 실린 칼럼이란 형태도 기괴했지만, 아마도 가장 이상한 것은 편지의 내용일 것이다. 언뜻 보기엔 UN의 양성평등 캠페인 "HeForShe"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엠마 왓슨의 활동을 무척 정중히 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아닌게 아니라 글쓴이는 트위터를 통해 "경의를 표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전문을 다 뜯어보고 나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편지'를 요약하자면 이정도쯤 되지 않을까? "네가 유엔친선대사로서 페미니즘 캠페인 HeForShe를 한건 참 잘한 일이야. 근데 네가 빠트린 게 있는데 내가 그걸 가르쳐줄게ㅋ 진짜 페미니즘은 말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너는 1세계 백인 여성이고 돈도 많고 유명하니까 이런 건 몰랐을거야 ㅋ"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에게 이러한 훈계를 할 수 있다는 그 패기만 빼고 이 글은 몹시 절망적이다. 그 편지의 가장 저열한 부분은 말랄라 유사프자이와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을 비교해 자의적인 기준으로 우위를 정하는 대목이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으로, 여성교육에 반대하는 탈레반의 총격에 의해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이후에도 여성의 교육권에 대해 계속하여 주장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글쓴이는 말라라의 이러한 배경 때문에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과 "경험의 질이 다릅니다"고 해놓고 금세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과 말랄라를 비교해 말랄라의 페미니즘이 더 온전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둘러댄다. (정작 말라라의 이러한 배경 정보는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글쓴이가 정말로 -말랄라를 모를 수도 있는- 한국 독자가 아닌 엠마 왓슨을 상정하고 쓴건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호날두 앞에서 "메시의 골은 질이 다릅니다" 라고 해놓고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과 메시를 비교해 메시의 축구가 더 대단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셈인데. 비교해놓고 비교한게 아니라고 하는 이 대단한 위장술인지 기만인지-는 이 편지의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다.

결국 이 편지의 핵심 주장은, (글쓴이가 보기에) '탈레반에 의해 총 맞아 죽을 뻔한 파키스탄 소녀'의 여성운동은 '어려서부터 <해리포터>의 스타인 돈 많은 영국 아가씨'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데, 그 문제가 바로 뭐냐면 엠마 왓슨이 성 지향/인종/장애/계급을 빼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틀렸을 뿐더러 순억지에 불과한데, 그러한 모든 차이에 기인한 차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권리를 포괄하여 보장하기 위해 '인권'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즉, 글쓴이는 페미니즘을 얘기한 엠마 왓슨에게 '왜 인권을 얘기하지 않느냐'라고 항의한 셈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떡볶이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에게 튀김/순대/오뎅 등을 빼먹었다며 '왜 분식에 대해 얘기하지 않느냐'라고 항의하는 거랑 비슷한 일이다. 페미니즘이 왜 페미니즘으로서 따로 필요한지에 대해 글쓴이는 전혀 이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1세계의 유명하고 돈 많은 백인 여성'인 엠마 왓슨에게는 필요 없다. 정말 그럴까?

그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엠마 왓슨과 비슷한 직업군과 환경에 속해 있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서 찾아보자. 올해 2월 열렸던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은 <보이후드>의 패트리샤 아퀘트의 차지였다. 그녀는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 여러분, 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모든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 왔습니다. 이제는 미국에서 평등 임금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은 남자배우들에 비해 훨씬 적은 출연료를 받는다. 리즈 위더스푼 또한 "여자로 일하는 것이 힘든 것은 할리우드나 다른 어떤 산업에서도 마찬가지(It's hard being a woman in Hollywood or any industry)"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할리우드 여배우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일반인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라고 말하는 것이 양성평등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

현재 할리우드 여배우 중에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는 제니퍼 로렌스다. 활동기간과 작품수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높은 출연료를 고려해보면 그는 현재 단연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배우다. 그런 제니퍼 로렌스는 누드 사진이 유출되어 큰 고통을 받았는데, 이러한 외설적인 사진이 유출되어 고통을 당하고 피해를 보는 쪽은 항상 여배우쪽이다. 상대 남자 파트너의 사회적 명예나 경제적 수익은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 진관희 때도 그랬다. 유명인이나 일반인이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어 손해를 보는 쪽은 항상 여자다. 남자가 아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은 늙고 추하고, 더 이상 예쁘지 않다고 조롱받기도 한다. 미국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먼 작은 나라 한국 인터넷 언론에서조차 비아냥을 받아야한다. 맥 라이언과 카메론 디아즈 등 "왕년의 할리우드 미녀스타"가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실베스타 스탤론이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등의 늙음을 조롱하지는 않는다. 여배우는 50, 60살이 지나도 예쁘고 탱탱해야하는 "꽃"이다. 예쁘고 아름답지 않은 여배우는 가치 없다. 내가 최근 본 가장 충격적인 영화 감상평은 <아메리칸 허슬>에 대한 짧은 감상평이었다. "에이미 아담스가 팜므파탈로만 안 나왔어도 이 영화는 성공했을거야. 다 늙어빠진 년이.."

<아메리칸 허슬>의 "다 늙어빠진 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최근 키라 나이틀리와 함께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인터뷰어가 키라 나이틀리에게 "worn out"이라고 말하자 '어떻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한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냐'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적이 있다. 키라 나이틀리 또한 그 자리에서 "Yeah, Fuck you!"하며 받아쳤다. 단순히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한 건데, 이들이 지나치게 과민반응한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은 아마도 작품이나 연기에는 관심이 없고 여배우의 외모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미디어의 변태적 강박에 대한 예민함일 것이다.

남자배우가 아닌 여배우로서 겪는 이런 모든 부당함, 불편함, 불평등에 대해 양성평등이 아니면 무엇으로 주장해야 하는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탈레반과 면접이라도 보거나 제3세계 비백인 여성의 체험 삶의 현장 같은 조건이라도 갖춘 뒤에 이야기해야 하나?

양성평등, 페미니즘, HeforShe의 가치는 불우한 여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히잡을 쓰고 억압당하는 무슬림 여성이나,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피해여성이나 임신/육아를 이유로 고용 불평등을 겪는 평범한 여성들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심지어 이부진에게도, 박근혜에게도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의 입장을 떠나서, 박 대통령이 '여성'이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더 먹고 '여성의 특징'에 기인한 모욕을 당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자라서 손해보는 일은 또 있는데, 유독 대통령의 '패션'이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해외순방시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박 대통령의 어떤 액세서리가 '품절'이 되었는지가 부각되는 것은 당사자나 국가에 모두 비극적인 일이다. (동아일보는 2013년 9월 7일 토요판 커버스토리로 4개 면을 할애해 대통령의 패션을 집중보도 함)

이부진도 마찬가지다. 이부진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얼마짜리 가방을 들었는지가 화제가 된다. 이부진의 경영 능력과 성과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다. 당장 같은 남매인 이재용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정치인, 기업인이지 연예인이 아니다. 기업경영과 국정운영으로 평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로 쓸데없는 부분까지 관심을 받는다.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더 높은 장애물에 부딪치는 경우는 동서고금 분야를 막론하고 숱하게 존재해왔다. 학계나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손쉽게 예를 들면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조차 여성이기 때문에 아카데미 회원도 될 수 없었고 그 외에도 끊임없이 공격받았다. 더 배운 사람, 더 가진 사람들의 세계라고 해서 불평등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세계의 여성들이 양성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반드시 더 불행해야 할 조건을 갖출 필요는 없다. 양성평등을 말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어떠한 특별한 자격 기준이 있는가? 그 기준에 따라서 그가 말하는 페미니즘에 등급이라도 매겨지는가? 그렇다면 현대인으로서 '자유'의 가치를 말하면 그것은 족쇄를 차고 비참한 삶을 살다간 19세기 노예들이 말하는 '자유'보다 질이 낮은 것인가? 여기에 어떤 '진정성'의 위계라도 존재하는가?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 하고 싶으면 IS대원에게 목숨을 위협 받고 와봐라, 라는 억지와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떻게 단 한 순간도 여자였던 경험이 없었던 그 사람은 평생을 여자로 살아온 엠마 왓슨에게 "경험의 질이 다릅니다"라고 평가하듯 말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뭘 근거로 본인이 UN홍보대사인 엠마 왓슨보다 인권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판단하는 걸까. 전 세계적 스타임에도 동양의 50대 아저씨에게 맨스플레인 당해야 하는 20대 여자의 심정은 헤아릴 수 없는 걸까. 그러는 본인은 엠마 왓슨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인종/계급/장애/성지향을 뛰어넘어 소수자들을 위해 행동했을까. 과연 오지랖의 질이 다르다.

fin.

+

흥미로운 사실.

이 글은 꽤 많은 문단의 시작마다 "당신은"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당신'인 엠마 왓슨을 상정하여 이 모든 것이 그가 했던 연설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척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두번째 문단부터 무려 여덟번째 문단까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연속으로.

당신은 그 연설을 통해

당신은 연설에서

당신이 지적했듯

당신이 지적했듯

당신은 연설에서

(첫째,)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둘째는) 당신도 알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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