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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민족이란 멍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 문화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저녁을 먹는 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 민용준
  • 입력 2015.09.22 07:40
  • 수정 2016.09.22 14:12
ⓒgettyimagesbank

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시대다. 집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편리함이 항상 즐거움으로 기억되던가?

배달의 민족이란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지만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선 조선시대부터 일찌감치 음식 배달 문화가 있었으니까. 18세기 조선 후기 학자인 황윤석의 <이재일기>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배달을 해 주지 않는 가게도 걱정하지 마라.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으니까.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면 결제까지 손쉽게 되는 배달 앱이 있으니까. 최근엔 전국 팔도 맛집의 음식을 당일 혹은 익일에 배달해 주는 '미래식당'이란 사이트도 생겨났다. 목포의 민어회를 서울의 방 안에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배송비는 고작 3천원 정도란다. 세상 좋아졌다. 전국의 음식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는 시대라니. 그러니까 내가 사는 그 집이 미식 문화의 미래라는 것이다. 항상 같은 식탁에 앉아서 다양한 식당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어딘가 허무하지 않은가.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 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홀로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식사라는 건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먹을 것인가?'라는 다채로운 물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이다.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기는 미각적인 경험을 넘어 말하고, 듣고, 웃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식탁이 단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앉아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은 단지 음식값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관계를 소비하는 비용까지 포함된 내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과 함께 소비한 경험에 대한 지불이라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값으로 식사만 배달해 먹었다면 그런 경험적 지불의 대가를 포기한 셈이니 여러모로 손해다. 하지만 그만큼 여유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당신이 어제 야식을 배달시켜 먹었다면 야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 보면 야근의 괴로움과 야식의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 문화는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배달 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 문화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저녁을 먹는 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배달 음식의 편의는 인정. 그리고 배달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건 식당을 찾아갈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미식을 즐길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배달의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다.

(ELLE KOREA에 게재된 칼럼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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