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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리아를 떠나 독일로 탈출한다

터키에서 나는 그리스의 코스 섬으로 가는 배에 탔다. 2m 길이의 배로 원래 5인승이었지만, 배에 탄 사람은 20명이 넘었다. 대부분 시리아인들이었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항해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배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무거웠기 때문에 오래 걸렸다. 신생아를 데리고 탄 여성도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물 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Rami
  • 입력 2015.09.19 10:59
  • 수정 2016.09.19 14:12

시리아에서 독일로 간 라미(17). 세르비아에서 라미가 원조 단체 케어(CARE)의 닌자 타프로기에게 자신의 여정, 그의 고향에서 벌어진 전쟁, 그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 했다.

Image Credit: Taprogge/CARE

내 이름은 라미다. 나는 4개월 후면 만 18세가 된다. 나는 집에서 먼 곳에 있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축하할 수는 없지만 생일이 무척 기다려진다. 나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왔다.

18일 전에 나는 부모님, 형과 누나를 떠나 새로운 삶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내 가족들은 모든 희망을 내게 걸었다. 내 배낭을 채워주고, 모아둔 돈을 전부 내게 주었다. 약 3천 달러 정도이다. 아버지는 은행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학교 교장이고, 형은 호텔에서 일한다. 내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족들은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저축해 왔다.

우리 가족은 내 미래를 보장해주고 싶어했다. 1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구하려고 사는 곳을 떠나야 했던 시리아의 내전에서 먼 곳에서 말이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교실의 의자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매일같이 내 또래들은 나라를 떠났다. 국경을 건너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돈이 많이 들었다.

이미 시리아를 떠난 사람도, 아직 탈출 시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3주 전에 마침내 학교의 내 의자도 비게 되었다. 나는 차를 몰고 시리아-레바논 국경으로 갔다. 그 국경을 건너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돈이 많이 들었다. 나는 베이루트를 지나 터키로 들어갔다.

터키에 가자 처음으로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성공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겠다는 나의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이미 독일에 간 내 친구들은 그곳의 삶이 얼마나 좋고 평화로운지 내게 말해준다. 호의적이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말한다.

터키에서 나는 그리스의 코스 섬으로 가는 배에 탔다. 2m 길이의 배로 원래 5인승이었지만, 배에 탄 사람은 20명이 넘었다. 대부분 시리아인들이었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항해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배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무거웠기 때문에 오래 걸렸다. 신생아를 데리고 탄 여성도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물 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해하는 내내 갓난아기는 소리지르고 울었다. 바다는 거칠었고, 승객 상당수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수영을 잘 한다. 나는 언제라도 물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돈, 여권, 휴대전화를 비닐에 싸두었기 때문에 전부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고 코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코스에는 나흘 동안 있었다.

아주 비쌌지만 우리는 쉬어야 했다. 코스에는 새로 도착하는 난민들을 돕는 원조 단체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도와 시리아 동포들과 다른 난민들에게 물, 쥬스, 우유, 음식을 나눠주었다.

하루는 해변의 언덕 위에 앉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탄 배 한 척이 뒤집히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 연안 경비대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들은 달려가서 전원을 구조해냈다. 그런 모습, 그런 기억이 내 의식에 불로 지지듯 새겨졌다.

마케도니아에서도 내 마음 속에 불처럼 새겨진 모습이 있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에서 완벽한 공포를 경험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세르비아 국경으로 향했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었고,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들 같았다.

마침내 세르비아 국경에 도착하자, 세르비아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벌써 2천 명 정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 합류했고, 곧 국경을 넘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모두 제일 먼저 들어가고 싶어서, 부주의하게 행동하며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시리아에서 알고 지냈던 가족과 함께 움직였다. 이 가족의 어린 여자아이 아말이 사람들 몸뚱아리 아래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우리는 아말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내리눌러 아말은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아말의 할아버지는 아말을 찾을 수 없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아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아말을 끌어올려 안고 국경을 건넜다.

오늘에서야 세르비아 북쪽의 수보티차에 도착했다. 어떻게, 언제 더 나아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최종적으로 독일에 도착해 안전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독일에 도착하면 가족들을 데려올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헝가리에 들어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하고, CARE와 같은 원조 단체에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휴대 전화로 세르비아 국경 상황을 더 알아보려고 노력 중이다.

유럽에 도착한 친구들은 나를 위해 뉴스를 보며 내 남은 여정에 아주 도움이 되는 정보를 보내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세르비아-헝가리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르겠다. 배터리를 아껴야 해서 휴대 전화를 꺼두었다. 마지막으로 휴대 전화를 100% 충전한 것은 벨그라드의 호텔 방이었는데, 돈을 아주 많이 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100유로 정도가 들었다. 너무 지쳤고, 전기를 써야 했기 때문에 그 날은 사치스럽지만 거기에 묵었다.

몇 안 되는 내 소지품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내 휴대 전화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게 없으면 어머니께 문자를 보낼 수 없다. 어머니는 나를 걱정하시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매일매일 어디 있는지 아셔야 한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다른 도시에서 눈을 뜬다. 나는 길모퉁이, 나무 밑, 들에서 잔다. 언제나 탈진한 상태다. 4년 넘게 계속된 시리아 내전은 나의 내면에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이번 여정에서 잊을 수 없는 상황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내게 왜 이렇게 위험한 여정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내가 시리아에 남아 있는 게 이것보다 얼마나 더 위험한지 모른다. 이건 내가 징병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리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나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다. 조부모들, 부모들에게 더 많은 고통과 비통함을 가져다주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그리고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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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허핑턴포스트US My Escape to German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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