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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갈 수 없는 길

'소유한다(own)'는 단어는 '빚진다(owe)'는 말과 중세적 어원이 같다. 요컨대 소유한 자는 빚진 자이며, 지식이건 부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더 많이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지식이란 것도 우연히 물려받은 두뇌 혹은 인류가 이미 축적해 놓은 지식 위에서 가능했고, 나의 재력도 상속받거나 그 축적 과정에 수많은 이들의 협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는, 사회적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성찰 없는 지식인과 준비 안 된 부자가 이 사회에ㅡ왕왕 그 개인에게조차ㅡ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정말 지겹도록 반복해서 경험해왔다.

  • 고세훈
  • 입력 2015.09.16 10:39
  • 수정 2016.09.16 14:12
ⓒgettyimagesbank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이지만.... 이미 태어났다면 가장 신속히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BC 6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서정시인이며 도덕가인 테오그니스의 말이다. 소포클레스(『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한 세기도 훨씬 더 지난 후의 일이니, 과연 테오그니스야말로 염세주의 철학자의 효시로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온갖 운명적 관계들에 치이다가 비극적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던 오이디푸스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관계의 그물들 속에 던져져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대체로 상처는 깊고 오래가는 것이어서 평화란 아득하거나 짧고 피상적으로 느껴지기 일쑤다. 그리하여 불교 최초 경전이라는 수파니파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서늘한 말을 그리도 장엄하고도 반복적으로 들려주는가 보다. 한 소설의 제목으로 우리에게 먼저 친숙해진 이 말은, 특히 관계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에겐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고혹적이기도 하지만, 외로운 영혼을 고집하면 정말 외로워진다.

문제는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만큼 홀로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데 있다. 그리도 쉽게 요동하는 내 일상의 감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의 이성, 결의, 양심은, 특히 구체적인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겁 많고 취약한가. 최근 한 유명작가는 자신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다 했지만, 그 맥락과 무관하게, 그러한 진술은 실은 나이가 들수록 우리 가슴에 절실히 닿는다. 우리는 과거 자신이 했던 언행조차 기억 못하는 아슬아슬한 세월을 사는 존재인 것이다. 지난 세월 나의 수많은 다짐과 결연한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 후회와 수치심을 불러왔던가를 떠올리는 심사가 더 고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령 역사는 권력자가 스스로 신이 되려 할 때, 그(녀)의 고독이 인류에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지를 거듭해서 보여준다.

더욱이, 이 모든 것 이전에, 혼자 살려 해도 혼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외로움에 몰린 채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힘겨운 사람들이 늘고 있다. 언젠가 "장애는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일 뿐"이라던 북유럽 어느 정치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던 때가 있었다. 내가 아는 어떤 교회는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장애인을 위해 작은 2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들어설수록 그는 자신의 장애를 점차 문제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며, 시간과 더불어 사람들의 의식 또한 바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약자들 전반에 적용된다. 이들의 물리적 생존을 위한 안전망이 자연스럽게 정착될수록 그들은 결핍과 따가운 시선으로 주눅 든 낙오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편입된다. 그들을 위한 장치가 개인차원의 단속적인 시혜ㅡ관계의 인격적 비대칭성을 전제하는ㅡ를 넘어서, 가능하면 공적이고 보편적으로 제도화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국가일 것이다.

어찌 보면 "내 힘으로 컸다"는 말처럼 황당한 말은 없다. 내가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그리 미덥지 못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관찰에 따르면, 그런 이들은 통상 지적으로나 부(富)에서나 이른바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처럼 보상체계가 지식 위주로 왜곡돼 있고, 돈이 우상이 된 사회에서 '당당히' 승자가 된 이들이다.

'소유한다(own)'는 단어는 '빚진다(owe)'는 말과 중세적 어원이 같다. 요컨대 소유한 자는 빚진 자이며, 지식이건 부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더 많이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지식이란 것도 우연히 물려받은 두뇌 혹은 인류가 이미 축적해 놓은 지식 위에서 가능했고, 나의 재력도 상속받거나 그 축적 과정에 수많은 이들의 협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는, 사회적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성찰 없는 지식인과 준비 안 된 부자가 이 사회에ㅡ왕왕 그 개인에게조차ㅡ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정말 지겹도록 반복해서 경험해왔다.

무릇 힘 있는 자는 의지가 없고, 의지가 있는 자는 힘이 없다. 소통이 가장 절실한 자는 약자인데 소통의 칼자루는 언제나 강자의 몫이다.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엉터리 지식인과 부자가 늘고 소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외로움과 분노가 커갈수록 그 사회의 귀추가 어떨지는 불문가지다. 만일 현대인이 인류사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라면, 자살률, 노인빈곤율, 출산율, 불평등지수, 복지국가수준 등 수많은 통계가 보여주듯, 한국인은 가장 외로운 현대인일지 모른다. 기어코 차이를 만들고 그것을 과장하며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느껴야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그 한심하고 못된 습성은 제도적으로 제어돼야 한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말은 픽션이고, 관계는 단절이 아니라 복원됨으로써 비극을 완화한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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