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집에 가자! 집에 가자! 그런데 누가 맞이해줬나

  • 원성윤
  • 입력 2015.09.13 14:07
  • 수정 2015.09.13 14:09
ⓒ영화암살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를 처단하는 영화 <암살>과 형사가 망나니 재벌 3세를 응징하는 영화 <베테랑>이 각각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연일 화제다. 어쩌면 정의 판타지라 불러야 할 두 영화. 그만큼 대중의 정의실현 갈망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근현대사를 전공하다 보니 <암살>과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진짜 저렇게 사진 찍었냐? 진짜 저렇게 경성 바닥에서 총 쐈냐? 안옥윤 같은 여성 독립군이 진짜 있었냐? 일본이 항복하는 장면을 보던 독립운동가들이 “집에 가자! 집에 가자!”를 외칠 때 가슴이 찡했다는 이들도 많다.

진짜 저렇게 사진을 찍었냐고 묻는 분들이 제법 있는 것을 보면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이 선서문을 목에 건 채 총과 폭탄을 들고 사진을 찍던 장면이 조금은 어색해 보인 모양이다.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사진을 찍었다. 윤봉길과 이봉창, 두 분의 사진이 남아 있다. 영화에서는 김원봉이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지만, 태극기 앞에서 무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백범 김구가 이끌던 애국단 스타일이었지 김원봉의 의열단 스타일은 아니었다.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던 의열단원들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멋진 옷으로 깨끗이 차려입었다고 한다.

정말 경성에서 총격전을 벌였나

이봉창은 씩 웃으며 사진을 찍은 반면, 윤봉길은 굳은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영화 <암살>에는 윤봉길이 던진 폭탄을 맞고 죽은 자와 죽다 살아난 자가 나온다. 영화의 뒷부분에 해방 후 임시정부 청년들이 모여앉아 일본이 항복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 영상 속에 등장한다. 일본이 연합국에 공식 항복하던 1945년 9월3일(중국은 이날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심하게 다리를 절며 조인식장으로 다가갈 때 영상 속의 해설자는 그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맞아 다리를 잃었다고 덧붙인다.

한때 롯데 신격호 가문의 일본 이름 시게미쓰가 이자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니다라는 심각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이름이다. 윤봉길의 폭탄을 맞고 죽은 자 중 하나가 일본의 상해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당시 자신들의 영웅 시라카와를 죽인 윤봉길 의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그를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총살했다. 일제는 윤봉길의 무릎을 꿇렸고 그의 머리를 흰 천으로 둘렀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이마의 정중앙에 한발의 총알을 쏘아 그의 목숨을 끊었다.

영화 <암살>이 크게 기여한 바는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었다는 것이다.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꼽히는 남자현(왼쪽)은 손주까지 있는 할머니로 암살단에 나섰다. 좌파에서 대표적인 김명시(가운데)는 조봉암과 어깨를 나란히 한 혁명가였다. 우파에서 대표적인 정정화(오른쪽)는 해방 뒤 살아서 돌아온 여성 중 가장 세게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 제공

총살이 집행된 아침 7시27분은 윤봉길의 폭탄을 맞은 시라카와가 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뒤 죽었다는 그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모습이 무릎을 꿇은 채로 일장기를 그리게 만들 만큼 윤봉길을 증오했던 일제는 윤 의사의 유해도 묘지에 제대로 매장한 것이 아니라, 육군 묘지로 가는 길바닥 평지에 아무렇게나 매장해 오가는 사람들이 짓밟게 했다. 그 후 윤봉길을 그렇게 보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되살려내 자신의 일본 이름으로 삼고, 그 이름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자가 있다. 수구세력들이 한국전쟁의 영웅이라고 떠받들며 죽고 못 사는 백선엽, 바로 그의 이름이 시라카와 요시노리였다고 김효순의 역저 <간도특설대>는 전한다.

<암살>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물어오는 질문 중 하나는 1933년, 정말 경성에서 저렇게 총격전을 벌였냐는 것이다. 아쉽게도 1930년대에는 영화와 같은 활극은 없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의열단은 여러 번 경성 시내를 들었다 놨다.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기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대와 전설적인 400 대 1의 혈투를 벌인 김상옥,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감쪽같이 빠져나가 상하이 황푸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대장을 저격한 김익상,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일제의 대표적인 착취기관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연거푸 폭탄을 먹이고 일본 경찰 여럿을 사살하고 자결한 나석주, 영화 속의 김원봉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처음으로 이름을 부른 고향 형 최수봉 등등…. 김산은 1924년까지 의열단원으로서 일제와 싸우다 희생된 사람이 3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영화 속 오달수는 “우리 잊으면 안 돼”라고 말을 건네 온다. 그러나 어째 벌써 잊어버린 걸…. 김원봉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사람도 그렇게 많았다는데….

<암살>이 크게 기여한 바는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었다는 점이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사람이 1만3000명이 넘는데 그중 여성은 채 300명이 되지 않는다. 광복회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약 15만명으로 추산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여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그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남자현을 꼽는다. 남자현은 영화 속 안옥윤처럼 젊고 예쁘지는 않았다. 그가 독립운동에 팔을 걷고 나선 나이는 마흔일곱,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할매 나이였다.

실제로 남자현은 할머니였다. 남편이 의병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은 뒤, 남자현은 유복자를 키웠다. 그 아들을 장가보낸 뒤 의병 나가 죽은 남편에게나 시가에나 양반집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한 남자현은 이제 남편의 복수도 하고 나라도 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자식 같은 젊은이들이 일본과 싸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자 남자현은 두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단결을 호소했다. 남자현은 두차례나 암살단으로 나섰지만 불행하게도 두번 다 실패했다.

첫번째 암살 대상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였다. 1926년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남자현은 멀리 만주에서부터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남자현 일행이 거사에 착수하지 못한 이유는 송학선이라는 청년이 먼저 사이토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투사들이 나섰기에 같은 날 사이토의 목숨을 노린 자가 그리 많았을까. 어디 사이토뿐이랴, 1908년 3월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스 저격사건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같은 사람을 노린 조선 청년 둘이 제각각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장인환과 전명운 두 사람은 공범이 아니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조선 사람이라고 해봐야 기백명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암살 시도의 ‘더블부킹’ 사례는 또 있다. 백범이 윤봉길을 보낸 그 현장을 이회영의 지시를 받은 백정기 일행이 또 노렸었다.

귀신 같던 김원봉, 그리고 노덕술

1933년 환갑을 넘긴 나이에 남자현은 다시 암살단에 자원했다. 목표는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이번에는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자현이 왜놈의 밥은 먹지 않겠다고 보름을 버티다 다 죽게 되자 일본은 송장 치기 싫다고 남자현을 풀어주어, 남자현은 하얼빈의 여관에서 아들과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도대체 어떤 흉악한 밀정이 남자현을 밀고했을까.

<암살>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럴듯한 사건들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암살>의 뒷부분, 염석진이 반민특위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난동을 부리는 바로 그 장면과 유사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 주인공은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 남자현을 밀고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대동신문>은 지금으로 치면 종편 더하기 <조선일보>쯤 됐다. 법정에서 이종형은 나는 평생 독립운동밖에 한 것이 없다며 나 같은 애국자에게 훈장을 달아주지는 못할망정 빨갱이 말을 듣고 나를 처벌하려 드냐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남자현은 쓸쓸하게 죽어 이국땅에 묻혔지만 살아서 돌아온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좌파에서는 김명시, 우파에서는 정정화를 들 수 있다.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서 조봉암과 어깨를 나란히 한 혁명가였다. 조봉암은 징역을 살고 국내에 남아 있다가 전향했지만, 김명시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동맹(연안파)에 가담하여 여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동아일보>는 김명시를 조선의 잔 다르크라 부르며 김명시 여장군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고 당시 가장 인기있던 종합 월간지 <신천지>는 ‘김명시 여장군의 일대기’를 실었다.

<암살>에서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 “집에 가자”가 실현되어 여장군이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김명시를 다룬 논문에서도 그의 화려한 귀국 뒤의 이야기가 자료 부족으로 빠져 있었다. 최근 네이버가 주요 신문기사를 저장한 덕에 뜻밖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경향신문> 1949년 10월10일자는 1단 기사로 김명시가 부평경찰서에서 자살했다는 단신기사를 실었다. 짧은 기사 속에 오제도와 선우종원 같은 공안검사들이 현장으로 쫓아갔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지하투쟁과 무장투쟁으로 단련된 여장군 혁명가가 진짜 자살했을까. 다른 자료가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고문살해 당했다는 심증을 떨칠 수 없다.

조선의 또 다른 잔 다르크 정정화는 해방 뒤 살아서 돌아온 여성 중에서 가장 세게, 가장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분이었다. 그 정정화가 전쟁통에 다리 끊고 도망갔다 돌아온 자들에게 부역자로 처벌받았다.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정정화가 고문을 당하는데 저쪽에서 웬 놈이 자신을 유심히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두들겨 맞으며 저놈이 누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20여년 전 비밀리에 압록강을 넘나들다가 일제에 체포된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을 고문했던 놈이었다. 전쟁을 전후한 시기 보도연맹 학살, 부역자 처벌, 민간인 학살을 거치며 독립운동가들은 씨가 말라버렸다.

영화에서는 일본이 항복하는 영상을 보던 백범이 “집에 가자”를 외치는 청년들을 뒤로하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원봉이 작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촛불에 불을 붙이며 먼저 간 동지들을 추모하고 있다. 너무 많이 죽은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하고 김구와 김원봉은 살아서 고국땅을 밟았다. 김원봉이 고향 밀양을 찾던 날, 밀양사람 전원이 거리를 메워 차가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폭탄만 터졌다 하면 김원봉이 보낸 사람이었기에 김원봉에 대한 현상금은 천정부지로 올라갔었다. 김구도, 김일성도, 여운형도, 안창호도 다 일본이나 중국 관헌에 체포된 적이 있지만 김원봉은 단 한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 그런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노덕술 따위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풀려난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집에 가 사흘을 대성통곡을 했고 남북협상 길에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 밀양에 남은 조선 최고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월북자 빨갱이 가족이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친동생 셋과 사촌 다섯이 빨갱이로 학살당했다. 그때 죽다 살아난 또다른 동생은 4월 혁명 뒤 밀양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애쓰다가 5·16이 터지자 감옥살이를 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었다. 뱃속 깊숙이에서 터져 나온 묵직한 소리, “집에 가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타고 앉은 고향은 결코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하와이피스톨? 살인청부업자 백민태?

살인청부업자 하와이피스톨. 너무 멋있게 그려져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실제 저런 살인청부업자가 있었냐고 물어온다. 지워지고 잊혀서 그렇지 우리 역사에는 없는 게 없다. 반민특위 역사에 백민태라는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한다. 반민특위 활동이 본격화되자 친일경찰들이 살인청부업자에게 의뢰하여 반민특위 위원들과 검찰관, 재판관들을 암살하려 한 것이다.

백민태는 해방 전 중국국민당 첩보기관에서 활동한 인물로 나름 세상을 보는 눈도 있고 애국심도 있는 인물이었다. 염석진의 의뢰를 받은 하와이피스톨은 안옥윤 일행을 추적하다가 안옥윤 등이 진짜 독립운동가임을 알고 입장을 바꿔 안옥윤 편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다. 친일경찰들로부터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라는 의뢰를 받은 백민태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명단에 있는 인물들이 애국자임을 알게 되자, 살인청부업자로서의 직업윤리를 저버리고(!) 친일경찰들의 암살 음모를 백일하에 폭로했다. 백민태의 폭로로 곤욕을 치른 친일경찰은 백민태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했는데, 그 후 백민태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현실의 백민태는 스스로 암살을 포기했지만, 영화 속 친일파가 고용한 암살청부업자는 염석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증인을 재판 직전 죽여 없애버린다. 증거불충분. 심증은 가나 확실한 증거나 증인을 확보하지 못한 특별재판관은 어쩔 수 없이 염석진에게 땅땅땅 무죄를 선고하고 분에 못 이겨 방망이를 집어던지고 나가버린다. 여유있게 나가는 염석진. 영화 속 외딴곳에서 만난 안옥윤과 명우는 단호한 손짓으로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이라는 16년 전 임무를 지금 수행한다며 염석진을 쏘아 죽였다. 통쾌한 장면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장면이다.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백범 암살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우리가 단순히 친일청산에 실패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청산된 비극을 겪었다. 현실에서는 안옥윤과 명우가 염석진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염석진이 안옥윤과 명우를 죽여버렸다. 아니, 김구와 김원봉마저 죽여버리고 역사에서 지워버린 것이 바로 저들이 한 짓이었다. 16년이 지난 뒤에 우리는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은 훌쩍 흘러버렸다. 많이 늦어 이제 83년이 되었지만 그 임무, 이제라도 수행할 방도는 없는 것일까.

1948년 10월12일은 국회에서 반민특위 위원과 재판관, 검찰관을 선출한 날이다. 67년 뒤인 2015년 10월12일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를 출범시키고자 한다. 83년 전의 임무를 뒤늦게라도 수행하고 싶은 이들, 헌법 파괴한 이들 몇명 이름 적는다고 민주화된 세상이 당장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이들, 그동안 잊고 살아온 것을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는 이들, 안옥윤과 속사포와 황덕삼에게 술 한잔이라도 따라드리고 싶은 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준) 시민편찬위원 참여 연락처 badmen0815@gmail.com, 후원계좌: 국민은행 006001-04-198120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한홍구 재미있는 현대사 칼럼의 세계를 열어준 털보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관장, 평화박물관 상임이사로 일한다. 현재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준)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2004년부터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한겨레21>과 <한겨레>에 ‘역사이야기’와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유신과 오늘’을 연재했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사> 1~4권과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유신>, <역사와 책임>이 있다. ‘한홍구의 역사’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안윤옥 #암살 #사회 #해방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