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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피 묻은 87년 연세대 화공과 깃발 '구사일생'

정우민(22·도시공학과), 강승윤(22·전기전자공학부)씨는 공과대 제1공학관 학생회 창고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부지런히 짐을 빼고 있었다.

며칠 후면, 이 건물이 여름방학을 틈타 공사로 철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고 후미진 곳에는 학생들이 '비밀의 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었다. 평소 손 닿을 일이 별로 없어 고장 난 캐비닛 등을 넣어두는 용도로 쓰는 공간이었는데, 두 학생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곳을 살폈다.

이것저것 뒤적이던 그들의 눈에 뿌연 먼지를 뚫고 낯선 물건이 들어왔다.

신문지로 싸인 널찍하고 얇은 사각형 판이었다. 겉에는 '49대 공과대학 학생회 / 화학공학과 학생회에 꼭 돌려줘야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꼭 돌려줘야 한다고?' 호기심이 발동한 둘은 바로 신문지를 뜯어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빨간 바탕에 금색으로 '연대 화학공학과'라 쓰인 천이었다. 유리 없는 액자 형태로 테두리 처리된 상태였다.

오른쪽 아랫부분에 붙은 작은 동판에 쓰인 문구를 읽던 둘은 순간 멈칫했다.

'87년 6월 9일 피 흘리는 이한열 열사를 감쌌던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 깃발 / 2001년 6월 9일 제작 / 87년 화공과 깃발의 보존을 위한 특별위원회'

붉은 천 위에는 핏자국처럼 보이는 검붉은 자국까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며 혹 모조품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볼수록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선배들에게 수소문하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이 발견한 천은 1987년 6월 9일 화공과 학생들이 전두환 정권 규탄시위 현장에 들고 나간 학과 깃발이었다. 그날 최루탄을 맞고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피가 묻었다고 알려져 화공과에서는 '전설' 같은 물건이다.

연세대 공대 학생회 창고에 잠들어 있던 이한열 열사 깃발. 건물이 철거되기 며칠 전 후배들에 의해 발견됐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의식을 잃은 채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던 이 열사를 곁에 있던 화공과 학생이 부축할 때 이 깃발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깃발로 이 열사를 지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열사의 죽음은 그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았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01년 이 열사 후배들이 깃발을 보존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꾸려 깃발을 표구했다.

깃발은 화공과 학생회가 보관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기억에서 잊혔다. 이한열 관련 물품을 수집하는 이한열기념사업회조차 깃발 이야기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정우민씨는 총학생회와 의논한 끝에 다음날 기념사업회에 깃발을 기증했다. 깃발이 발견된 창고가 있었던 제1공학관 일부분은 며칠 안 돼 철거에 들어갔다.

정씨는 13일 "깃발의 존재 자체도 몰랐지만 이렇게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면 제대로 된 곳에 맡겨 오래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나중에 까마득한 89학번 선배한테서까지 '고맙다'는 전화를 받고 깃발의 가치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2001년 특별위원회 구성을 주도한 화공과 졸업생 오승환(44)씨는 "제대로 보관할 공간이 생길 때까지 일단 학생회실에 두기로 했는데 이후 선배로서 제대로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할 민주화 역사의 증거를 후배들이 찾아줬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기념사업회는 깃발을 전문가에게 보내 보존처리하고 이한열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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