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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트리트H 장성환 대표

'홍대앞 동네잡지'를 표방하는 <스트리트H>다. 홍대앞 서식자라면 꼭 한 번은 봤을 법한 잡지다. <스트리트H> 발행인 장성환 대표는 1980년대 홍대 재학시절부터 30여 년간 이곳을 지켜온 '홍대통'이다. 홍대 문화의 생산자이자 기록자,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목격자로서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홍대'의 화려함 그 이면의 진짜 홍대 이야기 말이다.

"어떠한 문화도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떠한 사회도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말했다.  문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표현할 언어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자아의식도 없었을 것이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도 상당히 제한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문화 없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 문화가 부재한 삶은 낯설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문화의 부침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내면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왔음을 기억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일찍이 문화강국론을 설파했다.  '한류'를 대표 상품으로 내놓는 우리 문화계의 현 주소가 '문화강국'과 얼마만큼 일치되는지는 좀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될 것이다.  다만, 장밋빛으로 그려졌던 21세기의 첫 장이 생각보다 녹록하지 못했음을 되새기며, 이와 함께 쪼그라든 우리 내면의 상태를 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연은 '문화예술'로 일컬어지는 분야 - 협의로서의 문화 - 에 종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와 문화가 처한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홍익대를 중심으로 연남동부터 동교동, 서교동, 합정, 상수로 이어지는 '홍대앞 문화지구'는 외국인 관광객이 꼭 방문하고 싶어 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홍대'는 서울의 명물이 된 클럽과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피플, 개성 있는 카페와 음식점들로 가득하다.

이런 홍대앞의 사람, 가게, 페스티벌 등을 알차게 담아내며 홍대문화의 아카이브 역할을 하고 있는 매체가 있다. '홍대앞 동네잡지'를 표방하는 <스트리트H>다. 홍대앞 서식자라면 꼭 한 번은 봤을 법한 잡지다.

<스트리트H> 발행인 장성환 대표는 1980년대 홍대 재학시절부터 30여 년간 이곳을 지켜온 '홍대통'이다. 홍대 문화의 생산자이자 기록자,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목격자로서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홍대'의 화려함 그 이면의 진짜 홍대 이야기 말이다.

- 우선 평소 점심 메뉴를 책임져주시는 것에 감사드린다. '오늘 뭐 먹지' 싶을 때는 네이버캐스트에 올라온 <스트리트H>의 맛집 소개를 참고한다. 그렇게 많은 식당과 카페를 개척하려면 술값, 밥값이 만만찮게 들었을 것 같다.

= 많이 든다. 많이 들지.

<스트리트H>는 동네 잡지다. 동네 이야기를 한다. 그 중에 동네 맛집 정보가 있는 것인데, 네이버의 요청으로 유료 제공을 하게 됐다. 포털에 광고 걸려면 조그만 배너 하나가 얼마나 비싸나. 우리 사이트 주소라도 홍보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6개월 지나니까 잡지 과월호 콘텐츠까지 일괄 구매하자고 해서 매거진캐스트로 게재하게 됐다.

<스트리트H>는 무가지고 광고도 없다. 그런데 광고를 받으면 힘들어진다. 한 페이지에 백만 원이다. 어떤 분은 '와 비싸다' 그럴 텐데, 사실 백만 원이면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제한된 지면에서 광고 넣으면 콘텐츠가 너무 줄어든다. 콘텐츠를 늘리자면 네 페이지씩 늘려야 하는데, 그럼 돈이 엄청 많이 들어간다. 백만 원으로 네 페이지 증면은 어렵다. 딜레마다.

- 처음 <스트리트H>를 만들 때는 '동네잡지'라는 개념이 흔치 않았을 것 같다.

= 정지연 편집장이 뉴욕에 한 1년을 가있었다. 거기서 열심히 사진도 찍고 블로그에 글도 썼는데, 그 성과를 단행본으로 묶어낸 게 '카페탐험가_뉴욕에서 홍대까지'(북노마드)다. 저도 몇 번 가서 보니까 동네잡지가 있더라. 'Village Voice'는 메이저급이고, 포켓판만한 'L Magazine'이라는 것도 있다. L라인이라는 짧고 외진 지하철 노선 이름을 딴 것이다. 소규모 매거진들이 많았다.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아와서 책을 편집하면서 홍대앞 사진을 넣으려고 알아봤다. 전부터 여기 재미있는 곳이 많았다. 특히 안상수(現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교장), 금누리(現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교수) 두 사람이 만든 '일렉트로닉스 카페'라는 곳은 한국 최초의 인터넷카페였다. 그래서 안 선생님께 사진을 좀 달라고 했는데 본인도 없다는 거다. 안상수라는 사람이 기록 집착적인 사람인데 그 자료가 없더라. 구글에도 안 나온다. 이게 뭔가 싶었다. "홍대앞 문화에서 많은 혜택을 봤으니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잡지를 만들자" 그런 이야기를 매일 했다. 술 마시면 "내일부터 만드는 거야!" 하면서도 밥벌이 하느라 생각뿐이었다.

- 생각을 실행에 옮기게 된 계기는 뭐였나?

= 제가 지도에 관심이 많다. 큰 지도를 자비로 만들어 나눠준 적도 있고 상상마당에서 판매도 했다. 그것 때문에 구청에서 보자고 해 들어가게 됐다. 담당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저희 잡지 만들 거예요." 그랬더니 반색을 하더라. 예산을 좀 줄 테니 발행만 구청으로 넣어달라는 거다. 발행은 그렇고 지원으로 하자했더니 그럼 돈이 나갈 수가 없단다. 편집장과 굉장히 많이 논의했다. 반대도 많았다. 나는 경영도 해야 되는 입장이라 6개월가량 제작비라도 나온다니까 그건 좋지 않나 싶어서 오케이 했다.

그런데 한번은 연락이 와서 새우젓 축제를 실어달란다. "그게 홍대에서 열리냐. 여기는 홍대앞 잡지다!" 그랬다. 위에서 어쩌고저쩌고 한다 길래, 그러면 지원 안 받겠다 했다. 만드는 애들이 성질이 더러워서 안 한다고 했다 하면 면피는 될 테니 그렇게 하시라고. 그건 그렇게 넘어갔는데, 문제는 지원이 끝난 후였다. 바뀐 담당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거 좀 안 만들면 안 되겠냐고. 자꾸 자기네한테 문의 전화가 온다는 거다. 어이가 없었다. 공무원 마인드가 그렇더라. 이제는 지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없다.

- <스트리트H>를 볼 때마다 이런 고품질 잡지를 무료로 뿌려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혹시라도 더 못나오게 되면 애독자 입장에서 아쉬운 일 아닌가. 어디서 지원을 받는 게 아닌가 궁금했다.

= 그래서 초기에 고민을 많이 했다.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저는 아예 처음부터 '돈 한 푼 못 벌어도 10년을 만든다'고 천명했다. 그래서 분량이 이런 거다. (16페이지로 얇은 편이다.) 홍대앞에서 여러 번 문화잡지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창간하고 금세 폐간된다. 가만 보면 두껍다. 발행 비용이 장난이 아니다. 광고가 안 받쳐주면 안 되는 거다. 내가 무슨 재벌도 아니고 저래서는 계속할 수 없겠다 싶었다. 지금도 인건비까지 합하면 적은 비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 그렇게 벌써 7년차를 맞았다.

= 작년에 5주년 전시를 할 때 김창환의 노래를 오마주해서 '아니 벌써, 5주년!'이라고 이름 붙였다. 금세다.

- 홍대앞 상권만큼이나 부침이 심한 '동네잡지'계에서 6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 지역대표성의 부재, 지속성의 부재, 동인지 성향, 전문성 부재가 기성 잡지나 신문이 가진 한계였다. 홍대앞 다루는 기사는 어쩌다 한번, 상업 공간 위주고 지역특성이 없다. 그런가하면 소규모 잡지는 취미생활이다. 처음에는 의기투합해서 만들지만 초심이 사라지면 금세 없어진다. 그러니까 누가 돈을 대겠나. 그들만의 리그가 된 거다.

저희는 취재와 잡지 아트 디렉터를 했었으니까 그나마 전문성이 있었다. 제가 꽤 오래 홍대앞에서 활동해서 이곳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 미대의 작업실부터 출판사, 인디밴드들까지 쌓아온 역사가 있다.

- <스트리트H>를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뭔가?

= 사람이다. <스트리트H>의 H는 홍대앞의 이니셜이기도 하지만 Human을 뜻하기도 한다. 저희 모토가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모여서 지역이 된다'이다.

예를 들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한일교류전의 참여 작가를 중심으로 디자인 스튜디오와 디자이너의 이동을 보여주는 관계망을 만들었다. 이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그라픽스가 어떤 역할을 했었지 볼 수 있다. 이 밑으로 가면 땡스북스 이기섭, TYPE.PAGE 박우혁 & 진달래도 나오고, 스티키몬스터도 있다. 저도 이렇게 나온다. 전시장에서는 이것을 인터렉티브로 전시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을 홍대앞에서 계속 해보려고 한다.

물리적 위치나 공간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없어져도 이런 관계망이라는 게 사실 홍대를 만들어온 거 아니겠나. 저런 관계망이 출판에서도 한 무더기, 인디밴드로도 한 무더기일 거고, 여러 가지가 많을 것이다. 저걸 누구도 안 한다. 디자인지에서도 한 적이 없다. 저는 집착적으로 저런 걸 좋아하니까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 <스트리트H>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홍대앞 지도가 아닐까 싶다. GPS까지 연동된 모바일 지도서비스가 대중화된 시대에 <스트리트H>의 지도는 어떤 의미인가?

= 지도는 기본적으로 어디를 찾아가기 위한 위치정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존재정보로 바뀐다. 존재정보라는 단어는 제가 개인적으로 쓰는 단어다. 한양의 고지도는 지금 위치정보로 사용한다기보다 당시 서울의 인문사회적, 경제적인 특징을 파악하는데 활용한다.

저희는 매달 지도를 업데이트한다. 홍대앞 정보만큼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빠르고 정확하다. 포털도 못 쫓아온다. 10년이면 120장의 지도가 생길 것이다. 그걸 1초에 한 장씩만 보여줘도 그 변화가 보일 것이다. 그럼 논문을 써도 될 것이다. 마포구청에도, 서울시에도 없는 자료다.

- 그간 지도 디자인도 좀 바뀌었지만, 그 위에 표시된 가게들도 많이 달라졌다. 홍대앞 상권의 부침을 반영하는 기록이 아닐까 한다.

= 제가 홍대 시각디자인과를 나왔다. 옛날에는 홍대앞이 조그만 했는데, 이제는 연남동 동진시장까지 확장됐다.

(옛 홍대정문 앞 사진을 보여주며) 옛날에 이당약국이 여기 있었고, 이 건물이 없어지면서 지금 정문 앞 마당처럼 된 거다. (옛 홍대앞 약도를 보여주며) 이게 88년도, 94년도인데 옛날 가게들이 있다. 제임스 딘, 주병진이 하던 거다. 계단집이라고, 홍대 OB들한테 전설의 주점이었다. 정문 앞에 서점이 딱 있었다. 지금은 '걷고 싶은 거리'라고 하는데, 가운데 무허가 건물이 이만큼 있었다. 여기가 판잣집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주점들이었다.

- 지금은 너무 달라져서 하나도 모르겠다. 홍대 재학 당시가 이랬다?

= 그렇다. 여기 보면 마당 깊은 집이 아직 있다. 풍경이 바뀌고 없어진 곳도 많다. 홍대앞에 '발전소'라고 클럽의 초기 버전도 있었다. 간판은 안상수 선생이 써준 글씨다.

- 폰트가 안상수의 이상체다. (웃음)

= 90년대가 전성기였다. 이게 겨우 찾아낸 일렉트로닉스 카페 사진이다. 전화모뎀 시절 천리안 동호회들이 모여서 정모를 하고 찍은 것이다. 지금은 이 자리가 부동산이 됐는데, 간판 위쪽 벽돌 모양은 똑같다. 지나가면서 "저기 뭐 있던 자린데"라고 해봤자 이젠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책을 만들었다. 작년 말 소소북스라는 단행본 출판사를 만들어서, 두 번째 낸 책이 <홍대 앞에서 장사합니다>이다. 이런 식으로 시리즈를 만들어보려 한다.

- 대학 시절과 비교해 가장 크게 느끼는 홍대앞의 변화는 뭔가?

= 일단 미대 학생들 작업실이 없어졌다.

홍대 미대 전체가 2천명이 넘는데, 네 명 중 한 명꼴로 작업실을 했을 거다. 큰 작업을 많이 하니까 만원버스에 싣고 다닐 수 없어서 가난해도 작업실을 했다. 옛날엔 차고, 지하실 그런 데가 다 작업실이었다. 그런 곳 500여 개가 밤마다 불빛이 깜빡깜빡한다고 생각해보라. 반딧불처럼. 거기서 작업도 하고 친구들 놀러오면 전축에 신촌블루스 LP 틀어놓고 소주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공간들이 있었다. 거기다 출판사들이 종로가 비싸니까 변두리 마포로 넘어왔고, 90년대 인디음악 하는 예술가들이 모였다. 그런 공간이 있었기에 홍대앞이 가능했다.

그래서 저희는 '홍대앞'을 띄어 쓰지 않는다. 대학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있는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지역의 쓰임 자체를 이야기하는 고유명사라 생각해서 굳이 붙여 쓴다.

제가 학교 다닐 당시에 문헌관이라고 제일 높은 건물에 미대가 있었는데, 공강 시간에 지금의 상상마당 근처를 갔다 오면 "왜 그 먼 데를 갔다 왔니?"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다. 복학해서는 상수·합정 쪽 지하에서 작업실을 했다. 하수구도 없고, 화장실도 없었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데, 길이 지루할 정도로 주택가였다.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여기가 술집으로 바뀌어서 들어갔다가 지금은 단골집이 됐다.

- 홍대앞 젠트리피케이션의 산증인 같다.

= 지금은 당인리까지 다 카페다. 평당 3천, 4천, 5천까지도 간다고 한다. 제자나 같이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이런 친구들 때문에 반지하가 얼마고 원룸이 얼마고 하는 것도 듣는다. 저희 때는 50만원에 9만원, 반지하는 50만원에 6만원이었다. 지금은 원룸이 1000만원에 50만원 정도다. 많이 올랐다. 그래서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잖나.

그나마 홍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밀려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연남동도 꽉 차서 이제 망원으로 가고 있는 추세다. 망원유수지 가는 길에는 벌써 서점도 있고 여러 가게가 생겼다.

-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더라. 사람도 북적북적 하고.

= 홍대도 달라지고 있다. 연대 학생들이 신촌판 스트리트H를 만들려고 찾아왔는데, 신촌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왜냐면 신촌은 확장할 공간 없이 도로와 아파트로 막힌 작은 지역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신촌역 쪽에 재미있는 게 많았는데, 대형 쇼핑몰이 들어오면서 다 없어졌다. 세숫대야에 잉크 한 방울 떨어트리는 것하고, 큰 수영장에 떨어트리는 것하고는 다르다. 홍대에는 아직 녹색지대나 비상업지구가 꽤나 넓다. (당인리발전소 부지) 여기에 문화창작발전소가 생기면 클럽이 들어가겠나 뭐가 들어가겠나. 근처가 바글바글 해지는 거다.

- 지역이나 거리의 확장과 쇠퇴는 어쩔 수 없는 사이클이라 하더라도, 이곳의 문화를 만든 사람들이 밀려난다는 게 서글프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 뉴욕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자본주의니까.

자본주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프랑스의 로베르네집(chez robert)처럼 방치된 옛건물에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점거하고 있었더니 아예 프랑스 정부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바꿔준 케이스가 있다.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런 거다. 아직 가격이 싼 낡은 연립 같은 것을 사서 레지던시로 해주는 것이다. 대신 간섭은 하지 말고.

권리금에 관해서도 많이 얘기가 되고 있지 않나. 기본 계약기간 5년 이상, 권리금에 대한 보장, 이런 것들이 있으면 서글픔이 좀 덜할 것이다.

그건 또 사업하는 사람들 얘기고, 문화 활동 했던 친구들은 여튼 박탈감이 크다. 공간이 없으니까. 스트리트H도 여기 세 들어 있는데, 우리도 공간이 없으면 어디로 가겠나. 연희동 가서 홍대앞을 다루는 잡지를 어떻게 만들겠나. 몇몇 사업하시는 분들은 어떻게든지 홍대앞에 공간을 가지자, 그런 섬이 10개만 되면 이런 저런 격랑이 치더라도 홍대앞 문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들도 한다.

- 보이는 물건, 보증금이라든지 화폐로 환산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문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높이는 작업자에 대한 보장 같은 것은 부족한 상황이지 않나.

= 매년 여름 홍대 일대에서 열렸던 독립예술가들의 축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올해 큰 실험을 했다. 상암동 경기장에서만 행사를 한 것이다. 홍대앞에서 빠졌다. 본인들 관점에서는 이제 홍대앞의 지역성은 없다는 판단인 것이다. '와우북페스티벌'은 아직 어쨌든 홍대앞에서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권리는 어떤 권리금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활동할 수 있게끔 보장하고 지원해주는 것이지. 여튼 <스트리트H>도 고민스럽다. 유명 프랜차이즈, 술집들만 쭉 들어서면 뭘 취재하겠나.

그들이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빨리 한 번 버블이 꺼져서 공실률이 높아지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지금 좀 그런 기미가 있지 않나?

= 중국 관광객들이 자꾸 오는데, 그것도 걱정이다. 우리가 80년대에는 일본에 열광하며 엄청나게 논노 잡지를 원어로 사보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확 꺼졌다. 중국도 금세 빠질 거다. 그러면 그거 보고 투자한 호텔 같은 곳은 어려워질 것이다.

- 당인리발전소 지하화 이후 그 위에 조성되는 문화지구 TFT 같은 데에도 참여를 하나?

= 직접은 아니고 추진되는 활동들을 취재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과 '홍우주 협동조합'이라는 것도 한다. '홍대앞에서 우주로 뻗어나가는 사회적 예술가 협동조합'이라는 건데, 홍대앞 예술가들이 모여서 같이 목소리를 내고, 주머니돈이라도 모아서 뭔가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모임이다. 홍대앞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취지다.

- 디자인스튜디오도 운영하고 계시다. 편집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이 분야도 부침이 있을 수밖에 없는 분야인데...

= 제가 연합뉴스 그래픽뉴스팀 창설멤버다. 거기서 3년반 있다가 동아일보로 넘어가서 잡지로 다시 돌아간 경우다. 첫 직장은 리더스다이제스트였다.

그러니까 인포그래픽 쪽을 계속 좀 특화시키고 싶었는데, 창업할 당시에는 인포그래픽이라는 분야가 거의 없었다. 최근 3년 전쯤부터 되니까 연구소를 만들게 됐다.

편집디자인, 그래픽디자인은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취업할 곳이 적어서 창업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쟁이 심해지니 가격 할인도 심해지고, 정말 레드오션이다.

디자인회사들은 자꾸 자체적인 수익을 고민하게 된다. 팬시 제품 같은 것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것도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인포그래픽 연구소를 만들었다. 지역적인 것과 연계해서 인포그래픽을 통한 컨텐츠 상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거다. 인포그래픽은 텍스트 의존도가 낮기 때문에 글로벌하게 갈 수 있는 상품이기도 하다.

- 인포그래픽을 하는 디자인회사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 스무개 정도 있다고 한다. 인포그래픽은 정말 데이터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픽토그램으로 귀엽고 예쁘게 그리면 된다? 아니다. 저희가 그래서 어려운 프로젝트를 많이 했다. 홍보용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의미가 있는 데이터들을 인포그래픽으로 잘 만들어보려고 했다.

최근에는 전시용 작업도 한다. 국제교류재단에서 진행 중인 '맛 MA:T - 한국의 멋과 정' 전시에 가면 김치 담그는 법, 막걸리, 섞어 먹는 밥을 주제로 한 인포그래픽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 보면 김장김치나 보쌈김치나 비슷하다. 그런데 재료를 막대그래프로 보여주면 차이가 단번에 드러난다. 보통 막대그래프는 안 예쁘다고 기피하는데, 필요하면 써야 한다.

처음에 주최 측에서는 비빔밥을 하자고 했는데, 우리가 조사를 해 보니 '섞어먹는 밥'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 만 밥-국밥, 볶음밥, 콩나물밥 같이 섞어 짓는 밥, 삼겹살을 구워먹던 샤브샤브를 먹던 뭘 하던 간에 남은 것 다 넣어서 먹는 마무리밥. 이게 다 섞어 먹는 밥이다. 그걸 인포그래픽으로 표현했다. 이건 해외 전시에도 활용될 것이다.

- 인포그래픽은 데이터를 취급하는 작업이다 보니 공학적 가공, 기술 중심으로 접근하는 곳도 많다.

= 저희는 컨텐츠와 데이터의 맥락적 파악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데이터를 그래픽으로 시각화하는 곳이 많다. '데이터 연동형 문서'라고, 데이터가 바뀌면 웹페이지 상의 내용도 자동으로 바뀌게 구현하는 것이다. 이런 거 기술적으로는 참 신기한데, 구현된 인포그래픽이 뭘 얘기하는지 알아먹을 수 없는 게 많다.

제가 강의할 때 강조하는 게 있다. 전업주부, 40대, 아이 두 명 키우는 아줌마의 이해도를 기준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이 둘 키우는 전업주부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시간이 없다. 그런 사람한테 최신기술 접목된 복잡한 화면 보여주면 어떨 것 같나? 안 본다.

ⓒ스트리트H

- 좋은 인포그래픽이란 어떤 건가?

= 독해가 필요하면 안 된다. 애들이 만화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독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읽히니까 빨려들어가는 거다. 인포그래픽의 장점은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재미있고 시각적으로 매력이 있는데 쉬운 거다. 텍스트가 많이 붙어 있는 것은 인포그래픽만으로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는 의미다. 저는 '범례'를 싫어한다. 맞춰봐야 하니까.

데이터에 적합한 차트 선택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버블차트는 구체적 숫자를 이야기할 때 쓰는 게 아니다. 대략적인 분표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것이다. 잘 만들어진 인포그래픽은 문제의 실체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통계는 숫자가 아니라 경험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지구에서 달의 거리? 감이 안 잡힌다. 14조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아나. 그런데 예를 들어 축구장 35개의 넓이라고 하면, 우리가 뛰어봤으니까 어마어마하구나 하고 느낌이 오는 거다. 그런 게 경험이다. 그런 맥락적 시각이 없으면 기술이라는 것이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없다.

- '10년까지는 해보겠다'고 말하고 6부 능선을 넘었는데, 그간의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나?

= 사실은 재미있자고 한 것이다. 기록이 안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우리 둘이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밥벌이만 가지고는 안 된다. 디자인회사들이 클라이언트의 작업만 하면 정신노동이 얼마나 큰데. 상상을 초월한다.

포맷도 매년 바꾸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일 년에 한번 전시회 아니면 특집호 내야하고. 그럼 스탭들도 힘들지만, 해놓고 보면 뿌듯해하다. 우리회사에 입사면접 보러 오는 사람조차도 <스트리트H> 보고 왔다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게 힘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독립적인 재원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소소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출판과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편집장, 기자 2명이 상근자다. 매월 컨텐츠를 네이버에 유료 제공하고 있지만 운영비에는 못 미친다.

그래도 저희는 열심히 만들어왔고, 거기에 대해 한 점 후회는 없다. 그렇게 계속 가는 거다.

홍대앞뿐만 아니라 외국 어디를 가도 동네잡지가 이 정도로 나오는 데가 어디 있나 하는 자부심을 갖고 동기부여를 하며 간다.

좀 더 저널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것을 담아낼까, 미디어로서의 기능을 어떻게 좀 더 확장을 해나갈까에 대해서는 고민을 한다.

- 이후의 목표나 바람은 뭐가 있을까?

= 다른 동네에서도 비슷한 것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동네의 기록들. 어르신들이 종편채널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매체들이 있으면 좋겠다. 좋은 판단의 근거 내지는 커뮤니티에 대한 얘기가 담긴 매체 말이다. 그런 것들이 많이 확산되면 재미있지 않겠나?

- 자생적 역량에 의해 만들어져서 커뮤니티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마을만들기'조차도 관 주도로 전국에서 추진되고 있다.

= 민간인이 아무 교육 없이 매체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 매체를 만들 때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아무래도 전문 인력도 필요하고.

다른 지역에서 저희한테 <스트리트H> 같은 거 만들어달라고 하면, 저희는 안 된다고 한다. '동네잡지'는 그 동네에서 살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활동하면서, 그 동네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누가 대신 만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동네잡지들이 많이 생기면 당연히 사회가 좋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 누구나 자신 혹은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매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 첫째, 힘들다. 저는 어디 가서 부자 취미라고 얘길 한다. 회사를 하니까 만들 수 있는 거지, 20대 젊은 친구들이 주머니돈 모아서 어떻게 하겠나. 어디서 돈을 받지 않는 이상. 그런데 돈을 받는 것은 또 무척 위험한 일이다. 특히 지자체는 간섭이 많으니까. 그게 참 어렵다.

둘째, 물어보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 중요한 것 같다. 그냥 알아서 해보려 하고 어른들에 대한 불신도 많은데, 물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많이 묻고, 멘토를 찾고, 공부해야 한다.

셋째, 버티는 게 힘이다. 그런데 억지로 버티기는 얼마나 힘든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서 몰입을 해야 그나마 버티기 수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고 장소에 대한 열망이다. 그게 시작이다.

처음 대면한 장성환 대표는 예술가 특유의 예민함과 시크함이 느껴지는, 함부로 농담을 건네기 힘든 인상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스트리트H> 창간 사연과 홍대앞의 문화적 토양에 대한 얘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는 인터뷰의 절반 이상을 홍대앞 옛 풍경을 설명하는데 할애했고, 특별한 사연을 담은 장소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동네문화, 동네매체, 특히 동네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홍대앞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로 장성환 대표 같은 사람에게 붙여주어야 할 고유명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홍대앞'의 명성은 이런 사람들의 에너지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상권의 발달이라는 격랑에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는 '홍대앞 사람들'의 연대가 이곳 문화 생태계에 어떤 새싹을 틔워낼지 조심스런 기대를 가져본다.

인터뷰 및 정리: 최해선 선임연구원

사진: 서영민 연구원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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