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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 이와이 슌지의

50대의 감독이 10대 소녀의 감성을 포착해내는 작업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특유의 감성과 선을 표현하기 위해 과감하게도 로토스코핑 기법(Rotoscoping, 움직임을 실사 촬영한 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기법)을 채택했다. 영화적 앵글에 로토스코핑 기법이 버무려지니 중간 중간 애니메이션답지 않은 고퀄 장면들이 나온다. 썰물처럼 달려 나오는 발레 연습 장면, 등교길 남학생과의 시비 장면, 밤하늘 아래 하나와 앨리스가 춤추는 장면 등은 프레임과 앵글 하나하나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호흡을 맞췄는지 숨이 막힐 정도다.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감독 이와이 슌지, 99분, 일본, 2015년

"유다가 4명의 유다에게 살해당했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시골로 전학 온 아리스가와 데츠코(앨리스)는 요즘 기분이 영 별로다. 염탐하는 옆집의 시선도, 전염병처럼 멀리하는 반 친구들의 행태도 전학생 신분으로 돌리기에는 모두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의 전모가 하나둘 밝혀진다. 원인은 1년 전 같은 반에서 유다라는 남학생이 4명의 유다에게 살해당한 것. 그리고 문제는 살해당한 유다의 책상을 아리스가와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 사건으로 1년째 등교하지 않는 뒷자리 주인공이 옆집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살해당한 유다의 집이 바로 아리스가와가 이사 온 집이라는 것 정도다. 삼재도 이런 삼재가 없다.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의 최대 피해자가 된 아리스가와는 하나의 집을 향한다.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 살인사건』은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 작품이다. 10년이나 훌쩍 흘러 나온 속편은 전편의 불과 1년 전 시간으로 돌아가 하나와 앨리스의 첫 만남과 그들이 단짝이 되기까지의 굵고 짧은 일화를 다룬다. 형식과 시간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오이 유우, 스즈키 안 등 전작의 출연진이 성우로 참여해 '목소리'로 두 작품을 하나로 잇고, 음악까지 섭렵한 이와이 슌지 감독은 도입부에 전작의 음악을 되살려 넣으며 관객을 10년 전으로 초대한다.

아오이 유우 : 앨리스(상), 스즈키 안 : 하나(하)

1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쫓는 마음

아리스가와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묻기 위해 하나의 집에 무단 침입하지만 하나에게 간단히 제압당한다. 하나는 지루한 아리스가와의 이름을 '앨리스'라고 멋대로 줄여 부르고는 다짜고짜 유다 생사 확인 작전에 착수한다. 감히 전화 걸 용기가 없는 하나는 앨리스에게 유다 아빠의 반응을 통해 유다의 생사를 확인한다는 손 안대고 코 풀기 작전을 구상하고, 여기에 후루룩 휘말린 앨리스는 핸드폰 하나만 달랑 들고 떠밀리듯 홀로 도시로 향한다. 그렇게 오후 반나절에서 다음날 아침으로 이어지는 소녀들의 풋풋한 탐정일지가 시작된다. 아리스가와가 아닌 '앨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시작되는 첫 모험이.

하지만 긴장한 앨리스는 모든 스테이지에서 연전연패.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그런 앨리스가 답답하다 못해 서서히 걱정되는 하나는 1년 만에 집 밖으로 나선다. 어른들에겐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들이 그 둘에겐 매 순간 생사를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긴박한 선택지들로 닥쳐온다. 극적으로 재회한 둘은 집으로 향하는 막차를 놓치고, 소리만 질러도 응답할만한 간격을 유지한 채 유다의 집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 다음 날 아침 하나와 앨리스는 용기 내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후련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출발할 때는 각자였지만 돌아가는 길은 나란히 함께 앉아서. 하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건 사랑의 고백이야."

앨리스의 발레(상)와 하나와의 첫 만남(하), 빛이 스며드는 순간들.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영화 『하나와 앨리스』가 개봉한 2004년 즈음부터 이미 하나와 앨리스의 첫 만남에 대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10년을 담금질해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은 모든 영화에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아내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마도 『하나와 앨리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50대의 감독이 10대 소녀의 감성을 포착해내는 작업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특유의 감성과 선을 표현하기 위해 과감하게도 로토스코핑 기법(Rotoscoping, 움직임을 실사 촬영한 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기법)을 채택했다. 영화적 앵글에 로토스코핑 기법이 버무려지니 중간 중간 애니메이션답지 않은 고퀄 장면들이 나온다. 썰물처럼 달려 나오는 발레 연습 장면, 등교길 남학생과의 시비 장면, 밤하늘 아래 하나와 앨리스가 춤추는 장면 등은 프레임과 앵글 하나하나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호흡을 맞췄는지 숨이 막힐 정도다. 학원물에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녀들의 재잘거림과 발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프레임 하나하나가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들을 알 것도 같다. 인물들의 섬세한 동선은 다홍과 자주색 사이의 빛살과 선처럼 흐르는 구름과 나무의 풍경과 함께 어울려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로 새겨진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여운은 꽤 오래 간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소녀들의 풋풋함과 설렘이 저녁 내음을 담고 아침 햇살처럼 번지듯 되살아난다. 하지만 『하나와 앨리스 : 살인사건』의 여운은 단지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과 세상과 마주하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친구의 소중함을 환기시켜 주기 때문인 듯하다. 한 명쯤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며 문득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들과 나의 가장 빛나던 순간도 함께.

글_장윤석/만화평론가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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