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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김희애'의 하차와 변신

  • 원성윤
  • 입력 2015.09.07 18:46
  • 수정 2015.09.07 19:33
ⓒSBS

SBS <미세스 캅>은 김희애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도 매우 의미 있는 작품임은 확실하다. 20대에 연기대상을 두 번이나 받으며 일찌감치 정점을 찍은 33년차 배우의 첫 원톱 주연 장르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김희애는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해왔음에도 주 활동 영역은 가정멜로드라마 분야에 속해 있었다. 반면 <미세스 캅>은 기본적으로 형사물이고, 타이틀롤 최영진은 강력계 베테랑 경감이다. 러브라인도 없다. 김희애 본인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밝혔듯, 이 작품은 이미 한 분야의 톱으로 올라선 40대 여배우가 다시금 맨땅에서 구르고 달리는 파격 도전기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김희애가 일관되게 연기해온 ‘여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진은 남편 없이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가장의 역할까지 겸해야 하는 워킹맘의 삶은 강력계 형사의 공무수행 못지않게 지난하다. 영진이 매달리는 사건 대다수가 여성과 아이를 지키는 일과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도 그녀의 형사 이야기는 확장된 모성 드라마로 읽힌다. 즉 <미세스 캅>은 사회적 보상이 거의 없는 엄마들의 노동을, 강도 높은 강력계 형사의 노동으로 가시화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김희애의 드라마는 늘 우리 시대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스무 살에 첫 주연을 맡은 KBS <여심> 이후 그녀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시대의 한 전형이 담긴 여성상을 선보였다. 김희애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한국 드라마 여성 캐릭터의 성장 혹은 변천사를 압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 자신도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991년 MBC 연기대상 수상 뒤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여심>에서만 해도 지순한 여성상을 연기했는데 <산 너머 저쪽>에서는 활달하고 개성 강한 직업여성 역을 맡았다”며 “시대가 바뀜에 따라 여성상도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희애는 여성주의 드라마가 만개하던 시절인 1990년대에 들어서자 MBC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부터 <아들과 딸><폭풍의 계절><연애의 기초> 등의 대표작에서 꾸준히 주체적 여성 서사를 이어갔다. 함께 ‘90년대 트로이카’로 불린 최진실이 트렌디드라마로, 채시라가 시대극 대작으로 여성의 자의식을 이야기할 때, 김희애는 주로 가부장적 시스템 아래 가정멜로드라마 안에서 누군가의 딸, 애인, 아내, 며느리로서 같은 작업을 해왔다.

결혼으로 인한 공백기를 거친 뒤인 21세기에는 가정멜로드라마 분야의 또 다른 두 거장 김수현·정성주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여자 이야기의 심화 확장판을 보여준다. 김수현 작가의 <완전한 사랑>(SBS), <부모님전상서>(KBS)가 기혼의 삶에 들어선 김희애의 현실과 만나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서의 여성 심리를 한층 절절하게 드러냈다면, <내 남자의 여자>(SBS)는 반대로 남편의 죽음, 친구 남편과의 불륜을 거치며 시스템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여자의 이야기여서 더 파격적이었다.

사회파 가정멜로드라마라 할 만한 정성주 작가의 JTBC <아내의 자격>과 <밀회>는 젠더 문제를 한국 계급사회 안에 위치시키며 더 적극적인 탈주를 이야기했다. 두 작품 속 여성들이 어느새 시스템에 다시금 길들여져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잊어갔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작가의 작품 안에서 김희애의 중년 기혼여성 캐릭터들은 1990년대 여성주의의 수혜를 입은 신세대 여성들이 여전히 보수적인 가족제도 안에 다시 편입되면서 나이 들어갈 때의 실존적 고민을 담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김희애는 정성주 작가와의 세 번째 작품에도 출연했을 터였다. 한국사의 굴곡을 통과해가는 한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시대극이었다. 하지만 편성 과정에서 로열패밀리 가문의 갈등을 그린 현대물로 바뀌었고 김희애는 하차했다. 이유는 <미세스 캅> 제작발표회에서의 발언으로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그녀는 “중년 여배우는 남편을 뺏기거나 엄마 역할 등으로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며 “활동적이고 바로 설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김희애는 오늘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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