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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 VS 인간의 시간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 사건의 재현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다른 민족과 인종을 비인간으로 보는 인종주의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인종주의와의 싸움은 일상에서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짐승의 시간에 조선인을 구하려고 했던 일본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평소 조선인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조선인을 일본인과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 이태경
  • 입력 2015.09.07 13:42
  • 수정 2016.09.07 14:12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 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 九月、東京の路上で 1923年關東大震災ジェノサイドの殘響'을 읽는 시간은 무참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몸서리치게 경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작가 가토 나오키(加藤直樹)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 바로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 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작가는 혐한의 기운이 다시 높아가고 있는 지금 90여년 전에 일어났던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는 과거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 일원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수십만의 일본인들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됐고,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의 재산상 피해가 발생했다. 공황 상태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들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탔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자경단에 의한 대규모 조선인 사냥과 학살이 7일 이상 지속됐다. 경찰과 군도 이를 방치하거나 심지어 가담하기까지 했다. 학살된 조선인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적어도 수천명은 넘으리라는 짐작만 가능하다. 조선인들이 백주에 사냥당하고 온갖 방법으로 학살당하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고 짐승의 시간이었다. 작가가 시간 순으로 정리한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행과정은 아래와 같다.

- 1일 오후 3시 경시청에서 최초로 '조선인 방화' 유언비어를 확인, 오후부터 '조선인 폭동' 유언비어 확산, 밤에는 일부 지역에서 학살 시작

- 2일 유언비어 확산, 각지에서 자경단 결성, 자경단 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 확산, 도쿄 시와 도쿄 부 5군에 계엄령 시행, 경시청이 각 경찰서에 불령자 단속을 지시

- 3일 혐의가 없는 조선인은 보호하되, '수상한' 조선인은 경찰이나 헌병이 적당히 처분하라는 정부의 지침이 내려짐

- 6일 계엄사령부가 조선인에 대한 '난폭한 대우'를 '절대 삼가하라'는 주의를 발표

- 7일 출판 및 통신을 포함한 모든 유언비어를 처벌한다는 긴급 칙령을 발표, 이 무렵부터 조선인에 대한 폭행 및 학살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듦

- 16일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등이 헌병에게 살해당함

작가는 평소 일본인들이 식민지 조선인에 대해 지녔던 멸시의 감정,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의 정서, 군과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지극히 부적절한 대응, 사실확인에 소홀한 채 유언비어의 매개 역할을 한 매스미디어의 역할 등이 뒤섞여 조선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관동대지진 직후 발생한 조선인 학살을 가능케한 요소들이 현재도 온존한다는 데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 일대를 강타한 이후 벌어진 백인 자경단의 흑인 공격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상황과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우리에게 한 줌의 희망이 되는 건 지옥 속에서도 인간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마야 역에서 열차에서 내리는 피난민 중 조선인을 색출하려고 모인 3천여 군중 앞에 양 팔을 벌려 가로막고 선 채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당신들, 우물에 독 타는 걸 보았던가요?"라고 호소하던 오시마 사다코라는 여성, 잔인하게 살해당한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의 시신을 수습해 절에 안치하고 묘비도 세운 안마사 미야자와 기쿠지로, 자경단에 맞서 자기 마을에 함께 살던 조선인 2명을 목숨을 걸고 지킨 도쿠다 야스조, 중국인 유학생이 자신의 눈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걸 평생 기억하고 괴로워한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야만과 광기에 결연히 맞선 일본 지식인들도 기억해야 한다. 희곡 「해골의 무도」를 써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고발한 아키타 우자쿠, 『모래연기』라는 시를 통해 조선인 학살을 신랄하게 비판한 민속학자이자 작가 오라구치 시노부,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제국 의회에서 야마모토 곤노효 수상을 직격한 무소속 의원 다부치 도요키치(그는 미국과의 전쟁도 반대한다) 등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 사건의 재현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다른 민족과 인종을 비인간으로 보는 인종주의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인종주의와의 싸움은 일상에서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짐승의 시간에 조선인을 구하려고 했던 일본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평소 조선인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조선인을 일본인과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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