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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난민신청 시리아인 713명 중 3명을 받아들였다

  • 허완
  • 입력 2015.09.07 10:01

‘해변이 아닌 요람과 가족의 품에서 잠들길’, ‘수많은 아일란 쿠르디를 추모합니다’.

6일 저녁 서울 명동. 9000여㎞ 떨어진 터키 해안에서 발견된 시리아 어린이 난민 아일란 쿠르디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추모 펼침막을 든 시리아 난민 함단 아셰이크(23)는 “아일란의 사례는 너무 가슴 아프지만 흔한 일이다. 내 어린 사촌동생들도 공습으로 숨졌다”고 했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난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하는 유럽처럼 한국도 변했으면 한다. 유럽처럼 수십만명이 아닌 수백명 수준이다. 공짜로 이것저것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위협 없이 잠시라도 안전하게 머물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추모 행사를 주최한 인권단체 ‘헬프 시리아’의 박지훈 사무국장은 “지난 3년간 모금활동을 해왔지만 시리아 난민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응은 전혀 없거나 냉소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국내에도 수백명의 시리아인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세살배기 꼬마 아일란의 안타까운 죽음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우리 곁의) 이야기”라고 했다.

한국에 온 시리아 난민 등이 포함된 ‘헬프 시리아’ 회원들이 6일 저녁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에 모여 터키 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어린이 난민 아일란 쿠르디를 추모하고 있다. ⓒ한겨레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한국에 난민신청을 한 시리아인은 1994년 이후로 모두 713명(5월 말 기준)이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터지며 급증했다. 2012년 146명, 2013년 295명, 지난해 204명이 난민신청을 했지만, 이 가운데 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지난해와 올해 577명이 난민에 견줘 보호와 권리 보장 수준이 떨어지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박지훈 사무국장은 “난민 지원 활동을 하다 보면 ‘이슬람교가 몰려온다’, ‘왜 우리 세금으로 도와주느냐’, ‘중동 사람들은 테러 집단 아니냐’는 부정적 의견을 들을 때가 많다. 인권 선진국이라고 주장하려면 난민 인정은 마땅히 앞서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시리아는 아주 먼 나라처럼 보이지만,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자료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 난민’들에게 물자를 지원한 40개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2013년 7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난민법’이 시행됐지만, 정작 난민신청자를 대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은 여전히 차갑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 아일란 같은 ‘난민 자녀’를 지원하는 난민법 개정안을 지난 6월 냈지만, 이에 대한 일부 누리꾼의 비난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2008~2010년 300~400여명 수준이던 국내 난민신청자는 2011년 1011명으로 껑충 뛰더니 2013년에는 1574명, 지난해에는 2896명으로 폭증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자료를 보면, 올해(1~7월) 국내에 난민신청을 한 이들은 벌써 2669명이다. 난민인정 소송을 많이 맡아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법무부는 관행적으로 난민법 제정 이전의 지나치게 엄격한 난민 인정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했다. 본국의 ‘정치적 박해’가 아닌 ‘취업 목적’ 등에 심사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전체 난민신청자 2896명 중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은 94명(3.24%)에 불과하다.

한편 난민 1세대 격인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의 내툰나잉(46) 의장이 지난 4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랑군대에 다니던 1988년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됐던 그는, 1994년 버마 군부의 탄압을 피해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1997년 산업연수생 비자가 만료된 뒤 2003년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지내야 했다. 난민 지위를 얻은 뒤에는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를 만들어 버마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해왔다.

동료인 얀나이툰 부회장은 “의장과 나처럼 다른 난민들도 한국에 머물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사람들”이라며 “내년쯤 고국으로 함께 돌아가 버마 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타국에서 숨을 거둬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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