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백낙청과 '창비'가 창피스럽다

아무리 대외적으로는 진보와 민주와 평화를 논의하고 표방한들, 자신이 직접 동원하고 광고하고 형성한, 그래서 직접 자기 자신과 관계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일 수 없다면, 그 집단의 지식과 문학성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대표 지식인 그룹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자신과 관계된 공적인 문제에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외적으로만 진보적인 의제를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많은 부패한 지식-권력의 복합체일 것이다. 나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꼭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주제를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더라도, 실제로는 얼마든지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백낙청이 정점에 있는 창비 시스템이 바로 그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실망하는 것이다.

  • 김진석
  • 입력 2015.09.07 07:47
  • 수정 2016.09.07 14:12
ⓒ한겨레

소설가 신경숙이 표절 의혹에 대해 다소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사과를 한 이후 수그러드는 듯했던 표절 사건이 2개월 만에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창비의 실질 소유주인 백낙청씨(이하 경칭 생략)가 무책임한 말로 신경숙과 창비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간 '창비' 가을호 머리말에서 백영서 편집주간이 말한 다음과 같은 의견표명의 논의과정에 참여했고 그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저희는 그간 내부토론을 거치면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문자적 유사성은 있다고 여겨지지만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발언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논점 흐리기이거나 꼬리 자르기에 가깝다. 창비는 두어 달 전 표절 의혹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표절이 아니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야 겨우 표절 의혹에 대해 찔끔 인정하더니, 이제 다시 그 표절 의혹을 뭉개는 수상하고 당당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 미시마 유끼오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 사이에는 문자적 유사성 이상의 것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작품의 기본 구조가 비슷할 뿐 아니라 인물의 성격도 비슷하고 '기쁨을 아는 몸' 등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이 단순히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문학 비평가이자 지식인의 입에서 그런 비겁하거나 교묘한 말이 나올 때, 그렇지 않아도 퇴락하고 있는 문학과 지식인의 존재는 사정없이 추락한다. '창비'는 정말 우리를 창피하게 만든다.

물론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 '의도적' 베껴쓰기가 작가의 머리 속에서 작동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말하자, 심리적 데이터로서의 '의도'를 증명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만일 백낙청이나 창비가 신경숙의 '속일 의도'가 심리적으로 증명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문자적 유사성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비평가적 양심이 의심스럽다. 문제를 대하는 방식도 너무 기만적이다. 물론 일반 사기 고소사건에서도 8할 정도가 기각되는 이유는 '속일 의도'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 사이에서의 모방과 일반 사기 사건에서 '의도'의 문제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문학에서 표절이 문제가 될 때, 핵심은 작가가 정말 속이려는 의식적인 의도를 가졌는가가 아니다. 플롯과 인물과 언어 형식에 관해 유사성 이상의 동일성이 존재할 때, 작가는 말 그대로 텍스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신경숙은 작가 수업 과정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몇 번이고 공책에 필사하면서 '베껴썼다'고 했다. 여기서 베껴쓰기는 처음엔 공부로서의 베껴쓰기였지만, 그만큼 글쓰기 과정에는 여러 형태의 베껴쓰기가 개입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베껴쓰기 과정은 처음에는 의식의 차원에서 진행했지만, 어느 순간 무의식의 차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 지망생 시절의 의식적 베껴쓰기는 작가가 유명인이 됨에 따라 점점 의식 아래로 내려가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학비평에서 사이-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의식적 모방과 무의식적 베껴쓰기가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모방을 하는 혼성모방이나 패스티쉬의 경우에는 의도적인 모방이 퍼포먼스를 실행하고 완성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무의식적인 모방이 많건 적건 작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무의식적 모방이 텍스트가 구성되는 일반적인 과정이라며 아예 작품의 창조성을 해체적으로 부인하는 관점도 있지만, 이것은 다소 극단적이거나 근본적인 이론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모방이나 베껴쓰기가 실행된 후 텍스트 사이에서 동일성이 확인되었을 때, 비록 그 순간 작가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작가는 그 무의식적 베껴쓰기에 대해 일정하게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와 인물의 성격뿐 아니라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는 신경숙의 경우, 설령 그 베껴쓰기 과정에서 의식이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으로 전환되었을지라도, 작가는 사후에라도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는 치환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백보 양보해서, 표절의 '의도성'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정말 일정 수준 이상의 작가의 텍스트에서 그런 잘못이 나왔다면, 일단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두어달 전 신경숙도, 비록 부족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런 태도를 보였다. 절필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본인이 절필을 선언한다면 매우 책임 있는 태도라고 여겨졌겠지만, 표절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두 단순하게 그것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최소한 책임 있는 자숙의 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백낙청과 창비는 마치 표절 사실을 사과하고 자숙하라는 요구가 작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호도하는데, 억지이거나 왜곡이다. 신경숙은 괜찮은 소설도 몇 편 쓴 작가이며, 그것까지 통째로 부인될 필요는 없다. 특히 초기의 단편 가운데에는 좋은 작품들이 있다. 다만 그가 그동안 문단에서 누린 만큼의 명성과 부에 걸맞게 적절한 수준의 반성의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신경숙은 두어달 전, 비록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듯이 보인 점이 있지만, 그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창비와 백낙청은 이제 그것도 거꾸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이 문제를 관리하는 자리에 있다는 듯이! 그리고 바로 창비와 백낙청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신경숙 표절 사건은 단순히 신경숙의 표절 사건을 넘어간다. 이제 문제는 신경숙에서 결정적으로 창비와 백낙청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실제로 신경숙 표절 사건은 단순히 한 명의 작가의 실수에서 생긴 에피소드가 아니라, 문학자본과 문학권력 그리고 사회정치권력의 무책임한 관행에서 비롯된 일임이 새삼 드러난다. 소설가 신경숙을 현대 한국문학의 '전설'로 만든 대표적인 출판사와 잡지가 <창비>와 <문학동네>라면, 후자는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일단 상대적으로 표절에 대해 인정하고 1세대 편집위원들이 사퇴하기로 했다고 한다. 문학동네 비평가 각자가 이제까지 신경숙을 상찬하며 써온 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논의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문학동네>는 최소한의 자숙하는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창비와 백낙청은 표절 의혹을 깨끗이 정리하기는커녕 오히려 한국 문학을 비루하게 만들고 있다.

만일 우리라 흔히 말하는 문학권력을 출판사와 잡지를 통해 '돈이 되는 작가'를 만드는 시스템으로 이해한다면, <창비>와 <문학동네>는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권력은 단순히 출판사가 잡지를 출간하며 평론가들을 그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동원하는 시스템으로 그치지 않는다(물론 문학출판사가 잡지도 간행하고, 더욱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홍보 행사를 떠맡게 하는 시스템이 애초에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을 이제 와서 '원죄'로 낙인찍는 일도, 그것에만 집중하면, 자칫하면 무력한 일이 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모든 출판사가 잡지를 간행하는 것을 포기하게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논의하기로 해보자). 문학권력에서 문제되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상업주의는 아니다. 물론 그것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핵심이라면 그것은 문학권력이라기보다 그냥 문학자본 혹은 문학상업주의라고 불려야 할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권력이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방식의 문학권력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문학동네>가 일차적으로 문학적인 자본을 구축하는데 집중하면서 문학장 안에서 문학권력을 추구한다면, <창비>는 그와 달리 문학자본 및 문학권력을 넘어서 정치경제적인 이슈를 폭넓게 다루면서 사회정치적 권력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존재해왔다. 문학이라는 비교적 제한된 영역 안에서 자본과 권력을 형성하는 목표를 가진 <문학동네>는 따라서 표절 사건에 직면하여 비교적 영리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동기와 경로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잡지의 편집시스템도 이미 2 세대로 많이 내려간 상태이니, 자본형성이나 편집위원 각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할 때, 표절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의 태도를 어느 정도 내보이며 문제를 정리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와 달리, 창비는 아무리 편집위원이 많아도 여전히 백낙청 1인이 지배하는 구조에 사로잡혀 있다. 의사결정이 민주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울타리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편집위원들이 무슨 결정을 해도 백낙청이 승인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의 비 민주적인 시스템이라는 조소가 횡행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거기에 더해, <창비>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겉으로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기준을 많이 내걸어 왔고, 따라서 일반 대중에게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시스템으로 비추어졌다. 그리고 백낙청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대표 지식인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져왔다. 말하자면 <창비>는 단순히 문학권력에 머물지 않고 사회 안에서 나름 진보적인 정치권력으로 작동해 왔지만, 실제로 그 시스템은 적지 않은 면에서 유사 왕조 메커니즘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시스템은 오작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출판사/잡지가 대외적으로 표명하는 대로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인 방식으로 실제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시스템에 고유한 경직성과 폐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이번 사건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출판사 창비가 비록 신경숙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고 또 신경숙 표절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하지만, 잡지로서 <창비>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 지향적인 주제들을 논의해왔다고. 한 예로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그는 표절에 대해서는 창비가 사과해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창비>가 "'담론'의 영역에서만큼은 어느 잡지도 감당할 수 없는 독보적이며 진취적인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고 그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자임하고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볼 수 없는 관점도 존재한다. 우선, 출판사 <창비>와 잡지 <창비>가 그렇게 간단히 분리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신경숙 소설을 광고하면서 신문에 전면광고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내보낸 출판사 <창비>와, 백낙청을 비롯한 편집위원이 신경숙을 새로운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떠받든 잡지 <창비>는 같은 몸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출판사 <창비>는 사과해야 하지만 잡지 <창비>는 어떤 잡지보다 독보적이고 진취적인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계간지 <창비>가 창간 이후 어느 정도 지식 생산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일 것이지만, 과연 일반적인 명성에 걸맞게 민감한 주제들에 대해 충분히 날카롭고도 신선하게 접근했느냐는 물음을 제기하면 대답은 달라진다. 오히려 사회 문제들에 대해 상당히 정형화된 시각들을 소개하고 재생산하는 데 집중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말하자면, <창비>는 담론의 차원에서도 진보와 민주주의를 주류 기득권의 형태로 재생산하면서, 문학자본을 문학권력과 정치권력으로 확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벌써 오래 전부터 그 잡지는 꼼꼼히 읽지 않고 목차만 훑어보더라도 충분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의 평범한 잡지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이제 어줍잖게 <창비>를 옹호하지 말자. 90년대 이후 신경숙 소설들을 과도하게 상찬하며 한국 문학의 '전설'로 만든 주범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 아닌가.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는 진보와 민주와 평화를 논의하고 표방한들, 자신이 직접 동원하고 광고하고 형성한, 그래서 직접 자기 자신과 관계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일 수 없다면, 그 집단의 지식과 문학성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대표 지식인 그룹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자신과 관계된 공적인 문제에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외적으로만 진보적인 의제를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많은 부패한 지식-권력의 복합체일 것이다. 나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꼭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주제를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더라도, 실제로는 얼마든지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백낙청이 정점에 있는 창비 시스템이 바로 그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실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창비'와 백낙청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들을 매장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전혀 아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에서, 문학과 지식인을 내세우는 집단이 허접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을 '창비'의 문제로 만들고 키운 것은 창피하게도 바로 '창비'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백낙청 #창비 #문화 #사회 #김진석 #신경숙 #표절 #문학권력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