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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폭력'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이 기억나는 규칙들. 일병 때까지 혼자 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상병 때까진 거울을 봐서도 안됐다. 스스로 부대 밖을 걸어나가려면 병장이 되어야만 했다. 한도 끝도 없는 규칙들은 매일 같이 구타를 양산했고, 동시에 군생활의 유일한 낙을 제공했다. 권리를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는 군생활. 온갖 고난으로 각자가 쟁취해 낸 권리는 예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귀신을 잡지 않았다. 시스템을 지켜 짬밥과 권리를 얻었고, 점점 커져 나가는 권력의 달콤함은 군대 밖 사회라고 다를 게 무엇인가.

  • 이진호
  • 입력 2015.09.06 06:41
  • 수정 2016.09.06 14:12

2007년 초입, 스스로 내디뎠던 '발 끝'

입소 후 7주간의 해병대 교육 훈련 중, 지금까지도 뚜렷하고 뜨거웠던 무언가로 기억되는 것. 공익 판정을 받고도 라식 수술을 해가며 온 친구들이다. 다수의 친구들이 처음부터 '특수 수색대'를 지원해서 입대했다. 결과적으론 5% 정도만이 수색대로 합격했지만, 떨어졌든 일반 병으로 지원했든 하나같이 자원해서 입대했고, 자부심이 가득했다. 우린 끌려온 게 아니었다 분명히.

자대 배치 후 1시간쯤 후였나, 일단 맞았다. 이유는 기억이 안 난다. 그 순간부터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의 공기 자체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이후로 거의 매일 맞았다. 그리고 '기수열외'로 설계된 거대한 구타/가혹행위 시스템은 21살짜리 애송이에게는 그저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야 할 '새로운 환경' 정도였지, 판단하고 고민하고 이성적으로 성찰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난 부모님의 반대와 친구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자원했었다. 그냥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나가야 했다.

2007년 여름, 스스로 휘둘렀던 '발 끝'

맞고 때리고 지지고 볶는 게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여섯 기수 아래 내무실 후임에게 이성을 잃고 발길질을 날리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일명 '관리 기수'라고, 같은 계급 안에서 선임에 비해 후임 숫자가 많아, 일종의 '미친개' 역할에 충실했었다. 그날 밤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난 이 시스템의 개가 되어있었다.

매달 '사고사례'라고 해서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고, 죽어나간 타 부대 선후임들의 사례가 철저히 내부에서만 공지되었다. 휴가 나가선 찾아 볼 수 없던 그 얘기들. 그 이야기들의 효과는 그저 내부적으로 들리는 '조심해라, '적당히 해라'였다. 우린 다같이 얘기했었다. '우린 잘 하고 있는 거'라고. 특히 난 '안 걸리게 조지는' 걸로 유명했다. 나름 명석했던 머리와 주도면밀함으로 '시스템'을 지켰다. 나라를 지켰다고 할 만한 기억은 없다.

2010년, 스스로는 떼어낼 수 없게 된, '발바닥의 굳은 무언가'

예비군, 동기 모임, 여러 기회들로 해병대 예비군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단 한차례도, 단 한 명도 훈련소에서 가졌던 자부심과 자긍심을 지키고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물론 그 놈의 '기수부심'만 갖고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봤다. 시스템을 지켜낸 자부심과 2년 간의 세뇌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일명 '개병대 위아래부심'을 심어줬다.

내가 시스템의 개가 되었다고 느꼈던 순간을 수시로 되새긴다.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해야만 살아남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수십 년 간 쌓여온 시스템 안에서 '병사 1명'이 바꿀 수 있는 건 분명히 없었다. 죽음으로 신념을 지키지 않는 이상. 난 아마 히틀러 밑에선 나치가 되었을 것이고 김정은 밑에선 빨갱이가 되지 않았을까. 군대 사고는 참 꾸준도 하다. 사람들은 싸이코를 욕하고 악마를 욕했지만, 난 속으로 지옥을 욕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나도 악마가 되어서야 거기서 기어나왔다.

해병대교육훈련단 - 해병대 수색대 극기주 훈련

다시 2007년 늦여름. '육체'에서 '인격'을 빼다

'소원수리함'이라는게 있었다. 구타 가혹행위를 고발할 수 있게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던 빨간색 우체통 비스무리한 것. 그걸 누군가 열어본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일병이 다 되어서였나. 굳이 아무도 열어보지 않던 걸 병장이 재미로 열어봤나 그랬고, 그날 상병 밑으로 안 털린 사람이 없었다. 새벽에 몰래 화장실에서 쓴 종이를 넣었던 누군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두컴컴한 새벽. 모두가 자는 침상에, 나와 내 후임 한명이 양반다리로 각을 잡고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잠도 자지 말라는 선임의 명령. 후임은 잠을 안 자려고 하는 듯했다. 이 새끼 넌 잠 안자나 봐라. 난 앉아서 잤다. 자건 안 자건 어차피 아침이면 맞고 저녁에 또 맞을 걸 잠이라도 자면서 맞아야지. 어김없이 아침부터 불호령이 날아왔다. "잤냐?" "똑바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잤냐고" "잤습니다." 그런데 아직 노하우가 없던 내 후임이 "안 잤습니다." 했고, 구라 친다고 매타작이 커지기 시작했다. 걔가 잤는지 안 잤는지는 나도 모른다.

밤을 지새우는 척했던 그날 아침, '일상'에 불과했을 매타작이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건, 자신이 직접 때릴 가치가 없다는 듣도 보도 못한 논리로, 쓰리쿠션 매타작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병장이 날 때리고 내가 내 후임을 때리는 '전달' 방식. 분명 '후임이 선임 앞에서 손아래 후임을 때려선 안 되는 것'이 규칙이었다.

열 대가 넘어갈 때 쯤이었나, 난 극심한 살인충동을 느꼈다. 구타와 구타 사이 '전달 매개체'가 된 난, 내게 처맞고 있는 후임보다도 훨씬 인격이 상실된 것 같았다. 내 자신이 '구타 도구'로 느껴지면서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고, 그 점을 병장이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서 구타는 멈췄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선임 앞에서 후임을 때려선 안된다"던 규칙은 매우 잘 설계된 시스템의 한 조각이었다.

그날 점심쯤이었나, 여전히 얼굴이 벌게져 있던 나와 후임과의 대화. 앞으로 인생에서 기회가 있다면 그 병장을 꼭 죽이겠다 내가 말했었다. 난 같은 내무실을 썼기에 그와 매일 살을 부비고 살았고 그에게 충성을 다 바쳤지만, 그가 휴가를 나갈 때마다 교회에 들려 제발 뒈지라고 저주를 기도에 섞어 퍼부었다.

그리고, 2008년 가을. 그 '인격'. '회생'이 안 되더라

시간이 지나 그가 전역하고, 내가 병장이 되어 당직실을 지키던 어느 날. 포항에 살던 그가 놀러 온 동기들을 데리고 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그야말로 키 작고 귀엽게 생긴 동네 형이었는데, 난 당장에라도 쏴 죽이고 싶은 분노와, 그 분노를 짓누르는 뼛속까지 박힌 그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온몸이 굳었다. 그는 나한테 반갑게 인사했고, 난 아무런 대답도 움직임도 못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사실, 2007년 가을. '방법'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내 군 생활 중 이 시스템을 이탈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6개월 차이 후임. 한 달을 못 버티고 시스템을 고발했다. 섬처럼 떨어져 있던 우리 부대를 고발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수송병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시끄러웠고, 다시 잠잠해졌고, 시스템에서 사라진 건 한 명의 수송병 그게 다였다. 영창 15일이면 다들 밝은 얼굴로 돌아오더라.

알고보니, 2011년 겨울. 거기에도 '인격'은 없었다

전역 이후 친했던 부대 선 후임들과 술을 먹다 알게 됐다. 수송병이었던 이탈자는 가끔 차를 타고 사단을 돌다 옛 동지들을 마주했고, 군생활 내내 후회했다고 말했단다. 시작부터 꼬였다고. 그는 어딜 가도 '기수열외자'였다.

결국, 2015년 지금. '죽음'

살다보니, 군대에서 참 꾸준히도 누가 죽어나가더라. 내가 행했던 구타가 급소를 건드려 누군가 죽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꾸만 생각했다. 진짜로 자꾸만 계속.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숨기고 있던 멍, 상처가 다 드러났겠지. 난 살인자가 됐을 테고, 군 감옥에 수용되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매번 누군가 '죽어서' 난리지만, 지금도 어디서 누군가 죽이고 죽어가고 있다. '죽이고', '죽어간다'. 적도 아니고 또래의 남자애들 서로가.

나는 좌측에서 두 번째에 서있다.

잊혀지지 않는 여름. 2007년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이 기억나는 규칙들. 일병 때까지 혼자 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상병 때까진 거울을 봐서도 안됐다. 스스로 부대 밖을 걸어나가려면 병장이 되어야만 했다. 한도 끝도 없는 규칙들은 매일 같이 구타를 양산했고, 동시에 군생활의 유일한 낙을 제공했다. 권리를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는 군생활. 온갖 고난으로 각자가 쟁취해 낸 권리는 예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귀신을 잡지 않았다. 시스템을 지켜 짬밥과 권리를 얻었고, 점점 커져 나가는 권력의 달콤함은 군대 밖 사회라고 다를 게 무엇인가.

부대 전화번호로 개인적인 전화를 수신할 수 있는 건 병장부터였다. 난 애초에 어디에도 부대 번호를 알리지 않았다. 미쳤다고 비극을 자초하겠나. 일병을 막 달았던 2007년 8월 1일. 유난히 쨍쨍하고 더웠던 낮에 "일병 이진호 당직실 전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순간 몸에 흘러내리는 땀이 차갑게 느껴지면서, 부대원들 중에서도 유난히 까맣던 내 피부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씨발 뭐지? 난 뒤졌다" 부리나케 달려가 받아 든 수화기에 고모가 울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에 전화를 안 하는 편은 아니었다. 전날 밤에도 했었는데, 오전에 돌아가신 걸 어쩌나. 아버지는 온갖 인맥을 동원해 해군 고위 장교 라인을 탔고, 행정관에게 다이렉트로 전화가 꽂혔나 보다. 안 그래도 무더웠던 날, 병장들은 행정관실로 불려가 이병들 전화 잘 시키라고 털리기 시작했고, 비극이 커져가는 것은 눈에 훤하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휴가복을 입는 둥 마는 둥, 6기수 위 일병 4호봉 선임의 수송차에 올라 타, 사단 출구로 향했다.

차에 내린 후, 오늘 내가 초래한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선임은 날 잠시 부르더니, 구석에서 담배를 한 대 같이 피면서, "조심히 갔다 오라고. 잘 갔다 오라고" 했다. 경례를 하고 뒤돌아 나가는데, 그 때부터 억장이 무너졌다. 서울로 가는 내내 울었다. 그 전까진 정말이지 슬픈 줄도 몰랐다. 장례식장에 도착 한 후엔 눈물이 안 나왔다. 발인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방울도 울지 않았다.

특별휴가를 복귀한 그 날부터였을 거다. 내가 악마가 되기 시작한 순간. 장례식 내내 부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 때문에 얼마나들 맞고 있을까. 내 맞을거리는 얼마나 쌓여가고 있을까. 근 5개월간 복명복창 외의 언어를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글자도 눈에 잘 안 들어왔다. 복귀하면서 굳게 다짐했었다. "이왕 할 거 지독하게 잘 해내겠다." 난 내 밑 후임들의 잘못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새벽마다 불러내서 조졌다. "난 잘 해내고 있다." 힘겨웠던 쫄병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자기위로법'이었다.

철저히 외곽에 위치한 채 훈련이라곤 없었던 부대, 내가 유일하게 참여했던 사단급 훈련은 '전투수영'이었다. 처맞고, 처때리던 또래의 남자애들이 온몸을 달구고, 땀에 쩔은 몸을 바다에 식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재미있고 즐거웠다. 물놀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훈련만 계속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군생활이 행복할까 싶었다. 그러나 부대로 돌아가면 짠내가 가득한 채로 처맞았다.

'온몸'에 '소름'. 2015년

8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고이 모셔져 있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여전히 어색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때의 난, 판단력, 사고력, 언어능력은 물론이고 기억마저도 죄다 찌그러져 있었다.

페이스북에 글을 연재하면서, 부대 선 후임들한테 많은 연락을 받았다.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이전에도 함께 맞고 때렸던 가까운 기수 선 후임들과는 간혹 술잔을 맞대면서 이야기했었다. "이젠 다 추억이라고". 그렇게나 악독했던 악마들이었지만 이젠 다 추억이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다. 한 끗 차이로 "살인의 추억"이 될 수도 있었던 그것이 지금도 반복되는 것을.

건너 듣기로, 육군을 비롯해 다른 예비군들은 같은 시간에 함께 있었거나, 같은 공간을 공유한 사람들과 그다지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는단다. 우리는 인격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공장 같은 시스템에서, 서로의 밑바닥까지 모든 걸 봤고, 구타와 가혹행위를 주고 받으면서도 뭔가를 함께 성취했던 공감대로 묶이는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성취와 고통과 공감대는 분명 다른 것으로 설계되었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게 훈련이 됐든 무엇이 됐든. 그들 중 누군가 내 손에 죽어나갔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반복되는 군대사고를 볼 때 마다 소름이 돋는다.

돌아보니 '전쟁 없음'과 군대의 '몸통'

'기수열외'. 자대배치 후 처음으로 받았던 교육. 지난 2011년 해병대 김상병 총기사건 당시, 생소했으나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그것. 2014년 '군대 왕따'가 오르내렸듯이.

'기수열외'는 신병에게 바로 세뇌교육을 가동해야 할 만큼 체계의 핵심개념이었다. 일종의 '추방'이자, 가장 강력한 '경고'. 한 기수 차이가 하늘 땅 사이라는 위계사회 속에서 '기수열외자'들은 그야말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죽었다고 봐도 다름없었다.

일말의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극한의 위계가 없으면 누가 전쟁터로 뛰어들 것이며, 그러라고 있는(줄 알았던) 해병대를 '자원입대' 했는데 당연했다. 당연했기에 견뎠다. 뭐 판단의 자유도 없었지만.

그런데, 차츰 맞는 횟수와 때리는 횟수가 비슷해질 즈음에, 이 체계가 온전히 당연하진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전쟁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병이든 부사관이든 장교든, 그 누구에게도 '전역'만이 있었지, '전쟁'은 없었다.

적이 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전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위계질서'는 각자의 일을 하등 계급에게 떠넘기는데 이용됐다. 심지어 기본적인 '군인정신'까지도. (필자가 근무했던 곳은 방공포대. 얼추 90%의 초소근무 상황에서, 하급 근무자가 '전방'이 아닌 '군기 순찰'을 경계했다. 상급 근무자가 자빠져 자야 했기 때문에)

부대 내 모든 일의 총량은 이병(=아메바), 일병(ㅄ) 들에게 80% 부여됐고, 상병 15%, 병장 5%정도의 비율이 유지됐다. 모든 규칙과 규율과 위계, 구타 및 가혹행위는 전쟁이 아니라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했다.

'지옥 같은 일/이병'에서 '왕족 같은 상/병장'으로 나아가는 이 군생활 프로세스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생활의 유일한 활력이자 희망이었다. 전쟁과 전투가 없는 휴전군대에서 유일한 성취는 '적의 목'이 아니라 '짬밥'과 그 대가로 얻은 '착취'와 '안락'이었다. 정리하자면 군대는 '전시를 가정하는 위계', 이와 결탁된 '짬밥 절대주의' 그리고 이 모두의 강력한 뒷배경인 '전쟁 없음'이 '삼위일체'가 되어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사이 사이에 '구타', '가혹행위', '기수열외', '비윤리', '군인정신 상실' 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돌고 돌아 '임병장'과 '윤일병'

군생활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2014년 여름, 누군가 동료들에게 총을 겨눴다. '임병장 사건'. 임병장이 사회에 던진 화두는 또 다시 '기수열외'. '관심병사'와 '왕따'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임병장'이 당한 부조리를 자신의 아픈 경험에 빗대며, 살해된 병사들의 순직처리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사회에서 겪은 경험에 의한 공감대가 괴롭고 아플 순 있겠으나, 군대 내 왕따는 사회 내 왕따와 엄연히 다르게 보아야 한다.

미성숙으로 인한 '치기'나 '시기', 이유 없는 '악의'가 절대적인 이유가 아니라, 강력히 뿌리 박힌 체계 유지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힘든 거 다 알면서도 모두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군생활, 피하려는 자가 묵인된다면 체계는 흔들린다. 하고 싶어서 하는 자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왕따' 없이 돌아가지 않는 '학교'가 있다면, 바로 그곳이 '군대'다.

아마 본보기를 삼고자 했을 것이다. '저런 취급 당하지 않게 참아내야 해.' 이걸 일 이병들에게 심어줘야 군대가 돌아간다는 거 간부들도 다 안다. 간부들이 무지해서, 어려서, 싸이코라서 그런 게 아니다. 임병장도 알고 있었을 거다. 자기가 왜 왕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죽일 만큼의 분노와, 그 분노를 생산할 수 밖에 없던 시스템, 그리고 5명의 어이없는 죽음. 어느 한 쪽으로 원인과 책임을 묻기가 주저스럽고 그저 안타까운 이유는, 이 비극이 '정신적 살인', '육체적 살인' 이전에 '시스템적 살인'인 걸 직접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방부가 직접 나선 '게임 탓', '왕따 탓', 죽인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탄 돌리기'는 분명 치졸했다. 게임 못하게 휴가군인 피시방 금지령도 내릴 것인가? 군대 내 왕따 없앤다고 GOP도 동기끼리 근무세우고, 이병들 열외시킬 것인가?

거 며칠 지났다고, 22사단에서는 또 한 명의 관심병사가 자살을 선택했고, 부대원들의 집단 가혹행위로 사망한 일명 '윤일병 사건'의 진상이 공개됐다. 임병장 사건과 달리 가해자가 '왕따 피해자'에서 '절대권력의 악마'로 바뀌었고, 살인에 이른 가혹행위 증거들이 참혹하고 충격적이었기에 보다 명쾌해 보였다.

수많은 예비군들은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임 지고 옷을 벗는다 해서 '휴전 중 징집제도' 국가의 장병들이, 국방의 의무와 책임과 긍지를 불태울 수 없게 하는 문제의 핵심 본질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의 발생과 잊혀짐은 수도 없이 반복되어왔다.

국방부 스스로 인정하고 개혁해야 한다. 엄연한 국제 깡패 주적국을 둔 국방부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왕따'당한 관심병사의 '인권'이기 이전에, '악마'가 되어버린 장병들의 '처벌'이기 이전에, '문책'당할 책임소재 '밥그릇'이기 이전에, 지금 이순간에도 '있던 애국심'과 '자긍심'마저 소멸하게 만드는 '분노 유발 시스템'이다.

지금도 돌아가는, 쭈뼛 선 '머리', 군대의 '몸통'을 향해서

임병장, 윤일병 사건의 가해자와, 나를 비롯한 내 군생활의 동료들이 다른 게 있었다면 단 하나다. 사실 뭐가 달랐던 건지 잘 모르겠으니까 굳이 하나만 억지로 꼽는 거다. 악마 한 명의 손놀림에 사단이 나지는 않았고,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다 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사이 사이에 서로를 위로했다. 군 감옥에 갇힌 가해자들이 서로를 위로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철저히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한다. 우린 그냥 20살 21살짜리 평범한 애들이었다. 시스템에 악마가 들어온 순간, 어김없이 누군가 죽어나갈 거다. 아니 그 악마,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 시스템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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