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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수상 '상금 100억원, 세계 최고의 문학상 선정 작가 손아람' 인터뷰

“저는 일관되게 공모문학상의 완전폐지를 주장할 생각입니다. 동시에 공모문학상이 폐지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 역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새 문학상의 이름은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며 상금은 100억원입니다. 제1회 수상작은 제 소설인 <디 마이너스>입니다…. 앞으로 제가 낼 소설의 띠지에는 빠짐없이 다음 문장이 들어갑니다. “상금 100억원, 세계 최고의 문학상 선정 작가 손아람이 돌아왔다!”(손아람의 페이스북. 2015년 7월16일)

손아람.

손아람은 35살의 신예 작가다. 자신의 힙합밴드 경험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2008), 올여름 영화로 개봉된 <소수의견>(2010)에 이어, “상금 100억원의 문학상 수상작”이 된 <디 마이너스>(2015)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아마도 제2회 ‘세계 최고의 문학상’ 발표는 그가 다음 작품을 출간할 때쯤이 될 것이다. 대형 문예지가 주최하는 문학상 공모가 ‘출판사-평론가-스타작가’의 담합구조를 만든다는 우울하고 불편한 얘기를 하는 중에도, 그는 능청스런 유머코드를 잃지 않는다.

손아람의 작품엔, 그의 연배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발랄함과 묵직함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법정 드라마나 1990년대 대학가 운동권 얘기를 하는데도, 그의 소설엔 가끔씩 ‘푹~’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힘이 있다. 죽음과 폭력과 취조와 배신을 얘기하는데도 그의 작품은 따뜻하고 훈훈하다. 이문구와 윤흥길과 공지영의 문학적 유전자가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손아람은 1980년생이다. 나 같은 50대가 1980년 5·18 광주를 이정표 삼아 성인식을 치렀다면, 그는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이정표로 성인이 된 세대다. 그의 신작 <디 마이너스>는 97년부터 2007년까지 학생운동을 했던 90년대 세대의 이상과 좌절을 그렸다. 세상은 흔히 이들을 취업난에 맞닥뜨린 ‘아이엠에프(IMF)세대’, 연애·결혼·육아를 포기한 ‘삼포세대’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삶의 좌표를 세우던 20대 청년시절에 무엇을 꿈꾸고 어떤 상흔을 가졌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발랄하지만 가볍지 않고, 묵직하지만 지루한 걸 질색하는 30대 손아람을 통해서 90년대 세대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지난 19일 서울 망원동의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용산참사 모티브로 40일 만에 쓴 <소수의견>

-영화 <소수의견> 재미있게 봤어요. 솔직히 저도 영화 보고서 소설책을 산 독자 중 한 사람이에요. 불행하게도 윤계상 사진이 들어간 판본은 구하지 못했지만.(웃음)

“하하, 네.”

-그 영화에 카메오로도 직접 출연했다던데, 어느 대목에 나오셨는지 기억이 안 나요.

“젊은 법무부 직원으로 나왔어요. 100원 소송 할 때 ‘변호사님, 경력 낭비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유해진씨가 ‘지 경력에 넣을 거라곤 토익점수밖에 없게 생긴 애가 나한테 말하더라’ 할 때 바로 그 애죠.”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랬나?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히 튀지 않았어요.(웃음)

“제가 영화 각본 작업을 했는데, 제가 쓴 대본엔 없었어요. 나중에 감독님이 선물로 주신 컷이죠.”

-원작자가 영화 각색에 참여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저도 사실 빠지고 싶었어요. 각본 작업에 매달리면 최소한 몇 달, 길면 1년까지 또 그 작품에 파묻혀 있어야 하니까요. (다른 새로운 걸 해야 하는데) 여기서 못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싶었지요. 근데 김성제 감독이, 이 작품에 전문적인 영역(법조계)이 많이 등장하니까 다른 작가를 붙여서 하긴 힘들다고 ‘니가 해라’ 한 달 가까이 얘길 하셔서….”

<소수의견>은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재개발지역 철거민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을 둘러싼 법정공방을 다루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실제 판례와 실화를 차용해 쓴 것이다. 국가를 상대로 한 100원 소송은, 지율 스님이 <조선일보>에 대한 정정보도를 위해 제기한 10원 소송에서 영감을 받았고, 국민참여재판을 회피하기 위해 증인을 60명이나 신청하는 검찰의 꼼수도 실제 용산참사 재판에서 따온 것이다. 취재를 하는 데는 1년 가까이 걸렸지만, 머릿속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으로 400쪽 분량의 장편소설을 단 40일 만에 써내려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이끌리듯 써내려간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게 분명한데 왜 글머리에 “사건은 실화가 아니다.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강조를 했어요? 겁났어요?

“아니요. 오히려 너무 리얼해서요. 디테일에서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걸 다큐멘터리처럼 모두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잖아요. 용산참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쓴 말이에요.”

-국민참여재판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선 배심원 평결이 나와도 판사가 그와 다른 판결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예, 용산참사는 국민참여재판으로 가지 못했지만, 만약 참여재판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상하고 썼지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공판검사가 따로 있어요?

“제가 방청한 여러 개 재판에 모두 한 명의 여자 검사가 나와서 했는데요, 그 검사의 말투를 그대로 따와서 대사화한 부분도 있습니다. 배심원들한테 ‘여러분, 식사하셨습니까?’ 인사말로 시작하는 부분.”

-아, 그거요?

“그 뒤를 이어서 늘 이렇게 말해요. ‘저는 긴장이 돼서 식사를 못했네요. 왜 매번 하는 재판인데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간 저도 익숙해질 날이 오겠죠?’라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칼을 휘두르는 격이군요. 근데 그 여자 검사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 아닌가요? 세련된 외모와 매너, 부드러운 표정, 또박또박하고 나긋나긋한 말투… 모든 게 법조인 출신의 어떤 여성 정치인을 연상시키던데. 극중에도 ○○학원 둘째딸이라고 나오고.

“감독님은 그런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배우를 캐스팅하셨을 수 있어요. 제가 쓸 때부터 특정인을 생각한 건 아니었고요. 그런 생각은 있었죠. 학교 다닐 때 보면, 너무 좋은 집안에, 예쁘장하고, 공부 잘하고, 호감 가는 사람인데 세계관 자체가 너무 순진한, 그래서 미래가 참 걱정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종류의 사람이 검찰에서 중책을 맡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고 썼어요.”

-<소수의견>을 통해서 작가로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뭐예요?

“가장 큰 것은 ‘법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이죠. 법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법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영화 <변호인>도 그랬듯이 ‘법정신으로 돌아가자. 최소한 법이라도 지켜라!’ 하면서 법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좀 다른 시각이군요.

“법은 기껏해야 50~60년짜리 안목이에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기준으로 봐도 법은 60~70년밖에 안 되었죠.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상식은 최소 수백년에서 수천년짜리 규범인데, 종종 그 두 가지 규범이 충돌할 때 고작 60년짜리 규범이 절대적인 기준처럼 얘기되는 경우가 많아요. 법은 인간이 만든 거고 얼마든지 개정 가능한 건데, 마치 신이 던져준 것처럼 이해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법이 불법을 정당화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죠.”

-법이 불법을 정당화한다고요?

“통합진보당 해산 사태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결했지만, ‘반국가단체를 해산할 수 있다’는 조항과 ‘국가는 정당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이 둘 다 법에 있어요. 그런데 헌재가 이 법률을 한쪽으로 해석하는 순간 이의제기를 할 여지가 없어지죠.”

손아람은 힙합그룹의 래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안양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와 듀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라는 그룹을 만들고 언더그라운드에서 꽤 알아주는 뮤지션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대형 음반사와 잘못 계약을 맺었다가 길고 지루한 법정공방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돈 한 푼 안 주고 음반을 내준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붙잡아두는 대형 기획사의 노예계약에 대해서 그는 할 말이 많다. 5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승소했지만 그사이 그룹은 해체되고 그는 작가가 되었다. 그때의 소송 경험이 <소수의견>을 쓰는 데 자산이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뮤지션 활동을 했으면서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고요. 이런 얘기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요? 존경스러워하기보다는 좀 짜증을 낼 것 같은데.(웃음) 아이큐 테스트도 만점을 받았다면서요? 그런 게 가능하단 걸 손아람씨 통해서 처음 알았어요.

“(겸연쩍은 표정) 출판사에 그런 것 좀 홍보 포인트로 삼지 말라고 계속 얘기하는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점 맞으면 아이큐가 몇이에요?

“156까지를 보통 테스트하거든요. 평균이 100인데 156이면 1.5배 똑똑하다 이런 뜻이 아니고요, 이게 정규분포 지수라서… 여튼 좀 사기성 포장이 있어요. 인간의 지적 능력의 차이는 너무나 미세한 건데. 작가가 그런 걸로 얘기되는 건 좀 부끄럽죠.”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 들잖아요. ‘쟤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구나’ 하는….(웃음)

“저는 재능이 여러 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겐 하나예요. 글을 쓰는 일. 음악을 할 때도 랩 가사로 언어적인 걸 음성화했을 뿐, 영화든 칼럼이든 소설이든 다 같은 일이죠. 호기심 때문에 관심이 가면 일단 뛰어들어서 해보는 편이에요.”

-‘했다가 망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안 해요?

“망해도 해봐야죠. 안 하고 지나가면 나중에 ‘했더라면 엄청나게 성공했을 텐데’ 하는 환상을 평생 지니게 되거든요.”

-하하하, 그런 경우 있죠.

“전 소문난 맛집은 꼭 찾아가서 확인을 해요. 맛이 없다는 걸. 안 그러면 내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은데 못 먹어봤다는 아쉬움을 갖게 되니까요.”

힙합 래퍼 출신의 소설가 손아람은 작가로서 꼭 쓰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랙티브하게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의 게임을 기획해보고 싶다고 했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

‘디 마이너스’는 ‘소수의견’의 전사 격

-연애도 그런 식으로 해요? 일단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대시부터 해요? 이상형을 놓쳤다는 착각에 빠질까봐?

“그건 아니고요.(웃음) 전 첫인상에 끌리기보다는,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 경험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매혹되는 경향이 있어요. 삶의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이 있죠. 내가 못 살아본 삶.”

-어떻게 살았는데요?

“부모님은 늘 화목했고 부모님 용돈을 받으면서 음악도 했고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본 적이 없죠. 늘 너무 안전하게.”

손아람은 스스로 누린 게 많은 사람이라 여긴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성장했고 크게 실패해본 적이 없다. 다행인 것은, 그가 밋밋하고 안전한 삶을 당연시하거나 거기 안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좋은 학벌의 작가가 됐어요. 예술가들은 흔히 선민의식을 가지기 쉬운데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히기 쉬운 조건을 다 갖추셨군요.

“자기 자신을 애써서 위대한 지위로 제도화하려는 건 스스로 약하기 때문이죠. 예술가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영향력을 저평가할 때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나르시시스트’로 자기를 포장해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죠.”

-<디 마이너스>는 <소수의견>보다 5년 뒤에 나왔지만 작품의 연대기로 보면 소수의견 인물들의 전사(前史)로 해석되는 대목들이 있어요. <소수의견>에 나온 홍재덕 검사는 <디 마이너스>에서 공안검사였고, <소수의견>에서 퇴락한 경찰로 나오는 문희성은 <디 마이너스>에서 9대공분실 문 경사였고, <소수의견>에서 유해진이 연기한 장대석 변호사는 <디 마이너스>에선 법대 운동권이었다가 좌절한 대석이 형이죠. 원래 이런 연작 구성을 염두에 두고 쓴 건가요?

“처음부터 계산한 건 아닌데 쓰다 보니 인물의 성장사가 밀착된 느낌이 있어서 동일 인물로 설정했지요. 다음엔 홍재덕 검사가 국정원 요원이 된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쓰고 싶어요.”

<디 마이너스>는 서울대를 배경으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통령과 학교 이름은 물론 당시 운동권 정파의 계보나 노동쟁의, 같은 시기 서울대를 다녔던 김정훈, 김태희 같은 연예인 얘기까지 실명으로 등장한다.

-손 작가 자신은 00학번인데, 왜 1997년부터 2007년까지를 소설 배경으로 했죠?

“그게 민주당이 집권한 10년이잖아요. 그 시기 정권을 상대로 싸운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건 박근혜 정권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죠.”

-언젠가부터 90년대는 향수 어린 회고의 대상이 됐어요. 드라마에 가요에, 90년대 복고 열풍이 휩쓸잖아요.

“그게 제 소설의 동기기도 해요. 현재에 대한 절대적 불만족이 과거를 미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과거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워왔는지 좀 다른 방식의 회고를 해보고 싶었어요.”

소설가 손아람

손아람을 만든 시간들

-내게는 이 소설이 90년대와 2000년대 대학생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됐어요. 80년대에 비교해 뭔가 패잔병의 비애 같은 게 느껴져요.

“그 정서가 굉장히 컸어요. 패잔병 정서. 당장 이룰 수 있는 큰 목표는 사라지고, 경제 투쟁 쪽으로 옮겨왔는데,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싸우는 그 세계로, 언젠가는 전부 편입될 운명이라는 느낌. 80년대 싸움은 기억해도 2000년대 싸움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심지어 존재했는지조차 잊혀졌죠. 젊음이 통째로 삭제된 느낌이랄까. 그런 걸 쓰고 싶었어요.”

-소설에 나왔던 운동권 학생들은 30대 중반이 된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요?

“과거를 돌아보는 걸 힘들어하죠. 어찌 보면 그때가 자신들에게 가장 영광된 시기이기도 한데, 현재의 자신은 그때로부터 너무 다른 방향으로 멀리 와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친구 하나는 이 책을 몇 쪽 보다가 ‘미안한데 더는 못 읽겠어’ 하기도 했어요.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 왜 이렇게 살고 있어?’ 비난받는 듯한 느낌을 갖는 거죠.”

-그걸 지적하고 싶었나요?

“아니요. 비난하려고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는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저는 운동권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음악을 핑계로 원할 때 시위 나가고 원하지 않을 때는 빠지고, 왔다갔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했거든요. 계속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친구들, 조직 논리 안에서 젊음을 다 바친, 그래서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친구들한테는 부채감이 있어요. <디 마이너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의 상처에 헌정하는 이야기죠.”

나는 곧바로 다음 질문을 잇지 못했다. 그와 나 사이에 한 세대의 간극이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 먹먹함은 80년대 세대와 다르지 않다. 손아람도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다행히 찻집은 적당히 소란했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사이, 녹취록을 작성하는 타자 소리만 또각또각 선연했다. 마치 그 침묵 속에서 둘의 머릿속에 점멸하는 많은 기억들의 소용돌이처럼.

-돌아보면 20대가 가지는 망상이자 특권이라고 할 텐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낙관하는 경향이 있죠. 작중 인물인 미쥬가 진우한테 ‘게임하지 마!’ 하면 딱 게임 끊고, 농촌 총각 정배씨의 어설픈 희롱에 ‘사과하세요!’ 하면 그게 받아들여지듯이… ‘인간이란 이렇게 하면 더 선해지고 성실해질 거야’라고 섣불리 낙관하는 나이브함이 있잖아요. 살면서 ‘그게 아니구나’ 깨닫지만.

“맞는데요, 한 사람이 평생 나이브할 수는 없지만, 모든 시대에 누군가는 그렇게 나이브하지요. 그런 젊은이들의 지분이 한 시대마다 있다는 게 그 사회의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에요. 그게 세상을 바꾸는 힘이죠.”

-<디 마이너스> 서두에 친구들의 이니셜을 일일이 적어두고 “너희가 꿈꾸던 세상에서 살게 되기를”이라고 적으셨어요. 난 이걸 순간적으로 오독했는데 “너희가 꿈꾸던 세상에서 편히 쉬기를”이라고…(웃음) 우리 세대 친구들이 많이 죽기도 했고, 왠지 살아생전에는 이런 꿈들이 안 이루어질 것 같아서. 90년대 세대의 글에 대한 80년대식 오독이죠. 그들이 꿈꿨던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꿈꾸던 모든 게 다 이뤄지진 않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믿음은 있어요. 100년 단위로 끊어보면 세계가 퇴보한 적은 없거든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제가 원했던 것 중의 상당부분이 실현될 거라고 믿고요….”

-작가답지 않게 굉장히 ‘건전한 사고의 소유자’시군요.(웃음)

“낙관주의죠. 저는….”

-100억원의 문학상도 받으셨는데(웃음) 앞으로 작가로서 꼭 써보고 싶은 게 있다면?

“게임이요.”

-(놀라서) 게임? 게임 스토리요?

“한국 게임에서는 스토리가 아주 얄팍한 포장지에 지나지 않아요. 근데 재작년에 게임상을 몰아서 받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라는 게임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미국 작가가 만든 건데, 게임 시스템 자체가 어떤 문학적 체험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달까. 그러니까 게임을 위한 문학적 설정이 아니라 문학적 설정을 위한 게임 시스템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가진 이야기를 인터랙티브하게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의 게임을 써보고 싶어요.”

“신문관들이 원하는 건 자백 아닌 자폐”

네 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고 그와 헤어질 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게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아이큐 만점의 래퍼 출신 소설가. 그의 모든 것이 문학을 하는 이들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흔들 만큼 신선했지만, 가장 신선했던 것은 그의 세대와 내 세대의 청춘에 대한 기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발견이었다. 집에 돌아와 접어 두었던 손아람의 책 한 페이지를 펼쳤다.

“우리 시대는 자백을 받기 위해 피신문자를 고통으로 미쳐버리게 만들 필요가 없다. … 새로운 고문은 피신문자에게 그저 세계의 어둡고 흉측한 그늘을 보여준다. … 우리 시대 신문관들이 피신문자에게 원하고 또 얻어낸 것은 자백이 아니었다. 자폐였다.”(<디 마이너스> 196쪽)

며칠 뒤, 나는 손아람에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 있다며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 우리 사회 통치 논리도 그런 거겠지요. 절망과 회의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이런 좌절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몇 시간 뒤 그가 답변을 보내왔다.

“전 정치나 사회, 이 세계의 구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1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언어보다는 수학을 믿었고 인간의 희망보다는 과학의 예언에서 필연성을 보았죠. … 제 태도를 바꿔놓은 건 그 어떤 책이나 이론이 아니라 제가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 그들의 감정, 감동과 부채의식 등. 사람은 아는 만큼이 아니라 느끼는 만큼만 바뀝니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인간에 관한 모든 정치적 의제는 사악한 적이 아닌 무관심과의 싸움입니다. 무관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압도적인 옳음으로? 냉철한 논리로? 우아한 지성으로? 저는 차라리 유머, 눈물, 분노, 연민, 매력 같은 원시적인 감각의 힘을 믿습니다.”

아름다운 글이었다. 출력해서 <디 마이너스> 196쪽 책갈피에 꽂아두었다.

손아람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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