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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들이 침대에서 이야기하는 것들

영화 속에서 2분밖에 되지 않는 정사신은 제법 길게 느껴진다. 그 긴 정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솜씨가 몇 점이나 되냐고 묻는 상우에게 여기자는 말한다. "침대에서 여자를 만족시킨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상우가 "글쎄"라고 하자 여기자는 "Nothing"이라고 말한다.

  • 조원희
  • 입력 2015.08.27 10:48
  • 수정 2016.08.27 14:12
ⓒ세기말

감독 송능한 | 출연 김갑수, 이재은, 차승원 | 1999

1997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작 무렵 등장해 한국 조폭 코미디 영화의 전범을 수립했고, 한석규의 의외의 면을 발견했으며, 최민식과 송강호라는 한국 영화 최고의 배우들을 제자리에 세운 영화 <넘버3>의 감독 송능한은 2년 후인 1999년 <세기말>이라는, 그 시대와 걸맞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세기말>은 저주는 확실하게 받은 영화다. <넘버3>가 극장 개봉 이후 비디오를 통해 '국민 영화'가 되면서 송능한의 차기작을 기대한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송능한이 코미디를 버리고 사회성 짙은 드라마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Y2K 등 멸망의 분위기가 감도는 시대에 그렇게도 어두운 드라마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갑수·이호재·안석환 등 노장 연기파들과 <노랑머리>를 통해 성인 연기자로 변신한 이재은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받은 연기자는 바로 예능 '삼시세끼'를 통해 '차줌마'라는 별명을 얻으며 다시 한 번 도약의 길에 들어선 차승원이다. 그는 그 시절 '모델 출신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단 신인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주연급 연기를 한 작품이 <세기말>이다.

차승원은 영화 속에서 지성적인 대학 강사 상우 역을 맡았다. 상우는 이 나라의 잘못된 현실이 우리들의 '아비들'의 탓이라는 '아비론'을 강조하는 시니컬하고 지적 허영에 찬 인물이다. 그는 직업적 이유로 한 여기자(임지선)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매력을 거부할 물리적 힘이 나에게는 없다"고 말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베드신에 돌입한다.

대낮의 여관방에서 상우와 여기자는 화끈한 정사를 벌인다. 선 채로 반라의 모습이 되어 격정적인 키스를 하며 상우는 여기자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서로의 옷을 벗긴다. 연이어 등장하는 상우와 여기자의 정사는 후배위, 여성 상위, 그리고 소녀경에서 제 9조 학교경이라고 표현했던 남녀 모두 앉은 자세로 절정을 향한다.

영화 속에서 2분밖에 되지 않는 정사신은 제법 길게 느껴진다. 그 긴 정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자신의 솜씨가 몇 점이나 되냐고 묻는 상우에게 여기자는 말한다. "침대에서 여자를 만족시킨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상우가 "글쎄"라고 하자 여기자는 "Nothing"이라고 말한다.

<세기말>의 여러 베드신 중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격정적인 장면이 바로 차승원과 임지선이 벌이는 정사였다. 이 장면은 단순히 모델 출신 배우의 훌륭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선과 허세로 가득한 지성인, 소위 '먹물'들의 이면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많지 않은 관객들 중 이 영화의 그런 내면을 바라보며 영화를 본 관객들은 더욱 많지 않았다. 그것이 이 비극적인 영화가 맞이한 가장 큰 비극이었다.

* 이 글은 필자의 전자책 '한국영화 사상 가장 에로틱한 순간 51' (페이퍼크레인, 2015)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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