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근이 지나간 후, 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

최근 들어 개인 간 거래는 널리 퍼져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노동당과 군 간부들에게까지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성(性)이 그러했듯, 북한의 자본주의에는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 '누구나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의 대기근은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가 제공하는 일상적인 식량배급은 대기근 시기 거의 사라졌고 이후에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한 각자도생이었다.

  • NK News
  • 입력 2015.08.28 13:33
  • 수정 2016.08.28 14:12

'공산주의', '집산경제'라는 말은 이윤 창출을 위해 개인이 자산을 사고파는 시장 거래에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북한 경제를 묘사하기에는 시대에 뒤쳐진 용어가 되었다.

최근 들어 개인 간 거래는 널리 퍼져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노동당과 군 간부들에게까지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성(性)이 그러했듯, 북한의 자본주의에는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 '누구나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장은 여러 형태로 언제나 북한에 존재했지만, 국가가 경제 활동에서 차지하는 공식적인 역할이 줄어든 만큼 오늘날처럼 북한에서 개인 간 거래가 활성화되고, 필수불가결해진 적은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국가가 인민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들을 제공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의 대기근은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가 제공하는 일상적인 식량배급은 대기근 시기 거의 사라졌고 이후에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한 각자도생이었다.

사유재산과 개인무역은 아직도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대기근 이후의 북한 경제에는 '규칙을 지키지 말라'는 불문율이 자리잡았다. 2010년 시행된 설문조사에서 탈북자 중 62퍼센트는 탈북 전 공식적인 직업 이외에 부업에 종사했다고 밝혔으며, 비공식 환율을 사용, 적용하는 '회색 지대'는 나날이 번창하여 현재는 사실상 물가를 결정하고 있다. 이는 엘리트 계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체제의 붕괴

1940년대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북한은 오랜 기간 식량을 자급자족해왔다. 공식 배급제도 하에서, 농민들은 수확량의 대부분을 정부에게 넘겼고 이는 전체 인구에게 재분배되었다. 김일성 정권 초중반 동안, 북한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일성 집권 초기의 안정이 가능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소련과 중국의 원조였다. 냉전 시기 동안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균열 사이를 영민하게 오고가며 이득을 챙겼다. 이 '삼각관계' 속에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 정부 양쪽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이익을 챙겼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지정학적 약점을 역으로 자산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북한의 공공 배급 제도는 예기치 못한 압력을 마주했다. 1994년에서 1997년 사이, 일일 450그램이던 기본 배급이 128그램으로 감소했다. 이 시기 동안 공식 배급은 인민 대부분의 주요 식량원에서 밀려나 전 인구의 6퍼센트만이 받을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결과는 1994년에서 1998년 사이, 약 20만에서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북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기근이었다.

정부는 실패했고,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평양에 위치한 명문대학교에서 일하는 교수들도 생존을 위해, 소규모 시장활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부인과 함께 붐비는 기차역이나 대학 교정 밖에서 밀가루와 물로 만든 싸구려 죽을 팔기 위해 나섰다. 평양의 중간 엘리트들은 임시 시장에 나가 가판을 차리고 집안의 살림살이를 싼 값에 팔았다. 기근이 북한의 시장화를 촉진하는 씨앗을 뿌린 것이다.

원 그리고 위안, 돈을 위해서라면

정부는 새로운 경제 질서와 복잡미묘한 관계에 있다. 계획 경제와 배급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북한에 자리잡은 자본주의를 박멸한다면 또 다른 기근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욱이 많은 정부 관료들은 무역을 통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 만일 완전한 시장 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정부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거대한 사회 경제적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북한에도 개혁지향적인 정부 관료들이 있지만 권력 상부는 변화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엘리트 계급의 구성원에게 완전한 경제 자유화는 특권적인 지위를 수감 생활, 죽음, 그리고 서울 택시기사의 삶처럼 단조로운 일상과 교환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화폐 견본 | 사진: Ray Cunningham

정부는 비공식 시장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감시망을 뻗쳐왔다. 시장을 단속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예컨대 2009년 모든 은행권에서 끝자리 0 두 개가 사라지게 만든 화폐개혁은 가장 급격한 조치였다. 천 원 화폐는 새로운 십 원 화폐로 교체되었다. 시민들은 일주일 안에 가치가 없어진 헌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해야 했다.

이 조치는 필연적으로 개인 무역업자들의 부를 국가로 빨아들이며, 그들의 현금을 앗아가는 기능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각 개인들은 최대 10만 원(암시장 환율로 따지면 30-40달러 정도)만 환전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가진 이들, 즉 사업가들은 자신의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화폐개혁의 장기적인 결과는 북한 사람들이 국가가 정해준 궤도에서 점점 더 벗어나도록 밀어냈다.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안이나 다른 외국 화폐를 선호한다. 그들은 원의 통화 가치를 포함해 정부의 정책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습득한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위안을 통한 거래와 저축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정부의 약탈과 무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북한에서 대부분의 시장 거래는 위안이 가장 선호되는 가운데, 상당 부분 외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공식적인 회색 시장에서 북한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정한 환율은 1달러 당 96원이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의 환율은 1달러 당 8000원 정도이다. 이는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며 최근 몇 년 간 환율이 급격히 올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시장 환율은 일반 상점이나 식당에서도 점차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평양에 있는 장난감 가게의 농구공은 한 개에 4만 6천 원이지만, 그 누구도 평범한 농구공이 400달러가 넘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북한 원의 가치가 이중으로 매겨지면서 흥미로운 거래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중교통비는 여전히 공식 환율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외환을 이용하면 실제 가치보다 훨씬 싼 값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양 시내 지하철은 5원이다. 이는 공식 환율로 계산해도 5센트에 불과하고, 실제 적용되는 비공식 환율로 따지면 거의 공짜와 다름없는 가격이 된다.

시장 안에서

두 가지 환율이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개의 경제가 존재한다. 인민들이 국가가 지정해준 곳에서 일하고 국가가 지불하는 임금을 받는 '공식' 경제와 인민들이 엄밀히 따지면 불법임에도 공공연히 용인되는 상황 속에서 돈을 버는 '회색 시장' 경제가 그것이다. 오늘날 북한에서 중요성을 차지하는 것은 후자이다.

불법적이지만 용인되는 이러한 시장을 장마당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장마당 | 사진: Eric Lafforgue

대부분의 장마당은 시골의 좁은 비포장 골목이 교차하는 주택가에 있지만 시장 활동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건물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장마당에 가판을 차리는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당 간부에게 약간의 세금을 바쳐야 한다. 이렇게 정부는 시장화에 공모하게 된다. 몇몇 규모 있는 시장에서는 누가 가판세를 냈는지 파악하기 위한 전자 등록 시스템까지 사용되고 있다.

장마당에 가판대를 차린 점주들은 대개 중하층 계급의 '아줌마'들이다. 성리학이 자리매김한 조선시대 이래 한국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현모양처로 규정하는 남성우월사회였지만, 농민계층에서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 장사에 나서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장마당에서는 무엇을 팔까? 예측 가능하듯, 가장 기본적인 물건들을 판매한다. 북한 담배는 꽤 싸게 팔리지만 더 인기 있는 중국산이나 러시아산 담배는 2천 원(0.25달러)에서 2만 원(2.5달러)까지 다양한 가격으로 유통된다. 초콜릿 바 하나는 약 3천 원(0.38달러)이고, 쌀 1kg은 약 5천 원(0.63달러)이다.

제국주의의 단물, 코카콜라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콜라 한 캔은 약 6천 원(0.75달러) 정도로 다른 나라 슈퍼마켓에서 파는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칭따오와 하얼빈같은 중국산 맥주 한 캔은 4천 원(0.5달러)에 거래되고 라면 한 묶음은 7천 원(0.88달러)이며, 중국에서 수입된 인스턴트 커피 한 통은 1만 원(1.25달러)이다. 하지만 북한 화폐 가치의 불안정성을 고려하면 이상 언급한 가격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북한의 슈퍼마켓 | 사진: Eric Lafforgue

작은 가판을 차리고 담배와 국수를 파는 중년 여성의 이미지는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들이 물건을 떼어오는 도매상의 경제에 대한 이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쌀 거래상은 북한에 들어오는 원조물자를 실은 배에 대해 사전에 알아보기 위해 -물론, 불법적으로- 외국 라디오를 청취한다. 만일 원조물자가 들어오고 있다면 쌀 공급 증가에 대한 기대로 인해 쌀 가격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그 누구보다 빨리 가지고 있는 쌀을 팔기 위한 경주가 시작된다.

비료 공급 증가 역시 쌀 생산량을 늘리는 역할을 하므로 쌀 공급 증가와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쌀은 북한 사람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요소이기에 쌀 가격은 초미의 관심사이다. 북한의 쌀 생산량은 여전히 충분치 않으므로,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서는 원조와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최근에는 암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활발히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중상층 가구들은 오히려 당국의 조사를 받을 위험에 놓여있다. 이런 가구들은 남한에 정착한 탈북 친척에게 받은 현금을 거래하는, 덜 '허용되는' 수입원을 가진 것으로 의심받는 것이다. 이는 일부 북한 사람들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수입 창출에 종사하는 척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낳는다.

심지어 국가의 통제와 정부에 대한 충성이 가장 강하다는 평양에서조차 사실상 거의 모든 가구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 이상은 이러한 경제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 그들이 상품을 파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물건을 운송하거나, 공급하거나, 혹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는 일 등을 담당한다. '아줌마'가 사업의 전면에 나서는 동시에, 그녀의 친척이나 친구는 뒤에서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이다.

공-사 제휴

북한의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은 장마당 거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평범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지만 이렇게 아래로부터 성장한 북한의 사업은 규모와 수준면에서 냉소적으로 '공-사 제휴'라 불리는 방법을 통해 성장한 업체와는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정부는 완전한 경제 실패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이에 따라 북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중앙 정부는 수많은 정부 부처와 기구, 위원회에 투자할 충분한 재정수입이나 조세 수입을 창출하지 못한다.

중앙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해 정부 기관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최근 들어 인민을 위한 정부 서비스 공급이 급격히 감소했다 하더라도, 정부는 여전히 가장 기초적인 기능을 해야 한다. 일단, 암시장 환율로 몇 달러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 공무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거나 아니면 먹고 살 방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북한 정부의 임기응변식의 해법은 공무원들에게 기관의 비호 아래 준(準) 사기업을 운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준 사기업들이 어떻게 출발했고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규격화된 시스템은 없으며 '전형적인' 사례 역시 존재하지 않지만 성공적인 준 사기업은 다음과 같이 운영될 것이다. 믿을만한 정치적 인맥과 해외여행 허가증을 가진 정부 관료는 합작회사나 수출입 기회를 찾아 중국, 혹은 더 멀리 진출할 것이다. 식량, 농작기구, 의약품, 사치품 등이 특히나 중요한 분야이다. 일단 계획이 세워지면 개인이 경영하는 기업은 여전히 불법이기에 공식적으로는 국영인 회사들이 기회를 잡기 위해 출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준 사기업의 수익 중 극히 일부만이 국가로 유입된다. 은행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북한에서 회사들은 현금을 손에 쥐고 경향이 있으며 손으로 쓴 구식 회계 장부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상당한 이윤을 내는 회사일지라도 그저 그런 수익을 내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고,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60-70 퍼센트 가량의 수입을 착복할 수 있다. 나머지는 뇌물을 요구하는 정부 고위 부서로 올라갈 것이다.

북한의 경제 시스템은 제대로 된 법치 행정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비호받는 정부 관료가 수상쩍은 회계에 연루되는 일을 막을 수도 없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런 방법으로 정부 기관은 예산을 메우기 위한 소액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으며 회사를 창업한 사람은 부유해질 것이고 일이 잘 진행된다면 (대개의 경우 같은 정부 부서에서 일하는) 관리자와 간부들은 각각 300달러에서 500달러에 이르는 돈을 매달 받게 된다.

이러한 수입은 남한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생활을 영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이 돈이라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생활이 가능하다.

이 글은 The Economist 서울 특파원으로 일하던 Daniel Tudor와 NK News 서울 특파원으로 일하던 James Pearson이 공저한 North Korea Confidential: Private Markets, Fashion Trends, Prison Camps, Dissenters and Defectors을 요약한 것입니다. 메인 이미지는 Eric Lafforgue가 찍은 것입니다. 최하영이 번역했으며,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 페이스북트위터에서 NK News 한국어판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 경제 #북한 #NK News #NK 뉴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