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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넘은 고양이, 그 뒤 10년

귀밑머리 파뿌리 되도록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일상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또리네 집>을 통해, 이들이 만들어 가는 삶을 통해 뒤늦게 배운다.

  • 김선주
  • 입력 2015.08.19 07:36
  • 수정 2016.08.19 14:12
ⓒ또리네 집

10년 전에 쓴 칼럼이다.

... 사춘기인 장애아 딸을 키우며 먹고살기 위해 이리저리 뛰면서 가끔씩 심한 우울증을 겪는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일로 만난 남자에게 많이 끌렸던 여자는 한밤에 방금 헤어진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양이야... 여기 생선 있다 ... 담 넘어와라 ...' 귀가하던 남자는 문자를 보고 차를 돌려 새벽에 여자에게 도착했고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

해피엔딩이 아니면 어떻겠느냐는 마음으로 글을 썼었다.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어 자신을 온통 던져 보낸 문자였다. 새벽에 남자가 도착한 거, 그것 자체가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이었다.

만화가 장차현실과 다큐 영화감독 서동일, 둘의 이름이다. 그들은 결혼했다. 다운증후군 딸 은혜는 20대 중반이 되었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또리는 어느새 열살이 되었다. 칼럼을 쓸 당시에는 둘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싶어 실명을 거론하기가 주저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거침없이 그들의 삶을 내보였다.

네명의 가족이 보낸 10년 세월을 아내인 장차현실이 만화로 펴냈다. <또리네 집>. 전쟁 같은 사생활이 가감없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솔직해도 좋을까 싶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한밤에 이혼을 결심했다가 아침에 남편이 밥 차려놓고 먹으라는 말에 헤헤거리는 아내의 모습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집안에 장애아가 태어나면 가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아이를 두고 여자가 나가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시집에서 여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치부해 경원하게 된다고 한다. 자녀를 키우며 여러 가지 힘든 과정과 난관에 부딪치게 되어 아이 아빠들이 가정에서 멀어지고 혼자서 장애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은 것이다. 근처의 장애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관계자들로부터도 70%가량이 자녀들로 인해 가정적 결손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덟살 아래의 총각이었던 서동일은 장애아가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 열심히 산다는 소식은 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서 감독은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여러편 내놓았다. 장애인의 성을 다룬 영화 <핑크 팰리스>, 개발에 맞서 농촌을 지키는 양평 두물머리 농부의 삶을 그린 <두물머리>, 획일적인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에 반발하였던 <명령불복종 교사> 등. 그의 작품은 각종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돼 수상하기도 했다.

아내는 실질적인 가장이다. 낮에는 동네에 차린 만화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밭농사도 짓고 고추장 된장도 담그며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밤에는 만화를 그린다. 다큐감독이 고정적인 수입이 있을 리 없다. 부엌일을 모르던 남편은 처음에는 가사를 도와주며 큰 생색을 냈지만 지금은 가사노동을 당연히 같이 나누는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잘생긴 영화감독 남편이 젊은 여자 만나 시시덕거리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깨어 옆에 자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밤,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아빠 바람피우지 말라고 충고하는 딸, 밤새 일하는 아내를 위해 아침을 챙겨주는 남자, 힘이 넘쳐 사방팔방을 뛰노는 아들, 이 식구들을 이고 지고 가는 엄마의 이야기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담겨 있다.

장차현실은 아들을 낳고 보니 이렇게 애 키우기가 쉬운지 몰랐다고 했다. 딸을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한번도 고민을 호소한 적이 없었던 그의 아픔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여행가를 꿈꾸는 아들이 어떻게 자랄지, 연애하고 싶어 하는 딸이 어디쯤 가고 있을지 10년 뒤에 탄생할 또 하나의 만화가 보고 싶어졌다.

귀밑머리 파뿌리 되도록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며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일상이 인생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또리네 집>을 통해, 이들이 만들어 가는 삶을 통해 뒤늦게 배운다.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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