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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노동계·진보·야당은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 허완
  • 입력 2015.08.17 14:39
  • 수정 2015.08.17 15:20
ⓒGettyimagesbank

배경설명 :

1.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노동시장 개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 중 하나는 ‘임금피크제’다.

2. 임금피크제는 노동자가 정년 연장을 보장 받는 대신(내년부터 ‘정년 60세법’이 시행됨), 은퇴 이전 ‘피크연령’을 기준으로 서서히 임금을 조정(=삭감)하는 제도다.

3. 박근혜 정부와 여당, 재계는 임금피크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 및 야당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새정치 혁신위원, 임금피크제 수용을 주장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이동학 혁신위원이 17일 임금피크제를 수용해야 한다며 문재인 대표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정의당처럼 더 왼쪽에 있는 정당은 물론,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임금피크제 도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쳐왔다.

이 위원은 “우리당이 노동문제부터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노동계’는 모든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한다

10%의 조직노동은 우리사회의 상위10%가 되었고, 90%의 노동자, 또는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한 자들은 거대한 사각지대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10% 상위층이 전체 수익의 45%를 가져가고, 90%가 나머지를 나눠 갖는 지금의 양극화 구조가 점차 깊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상위 10%의 조직노동을 양보와 타협의 길로 이끌겠습니까.

바로 우리당이 해야 할 일입니다.

2. 양보하는 대신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내자

노동계는 정년연장의 대상인 분들에게, 아프지만 내려놓자고 말해야 합니다. 혹자는 정년연장 대상자들의 임금을 깎는다고 실업상태의 청년들이 구제되는 것이냐 묻습니다. 일리 있는 질문이지만, 이것은 청년고용 효과와 별개로 노동계가 양보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기업에 다른 양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장시간 저효율로 우리의 저녁을 빼앗아가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일 말입니다.

국민들은 삶의 여유를 반납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병을 얻고, 병을 치료하는 데 그간 모은 돈을 다 써버리는 쳇바퀴를 굴려대고 있습니다. 본인도, 가족도 허무한 일입니다.

경향신문, “무조건 거부가 능사는 아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와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4일 국회 정론관에서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추진에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흔히 진보성향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도 지난 13일 이와 비슷한 주장을 내놨다. ‘현대차 노조, 임금피크제 무조건 거부가 능사는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다. 임금피크제를 수용하는 대신, 다른 걸 얻어내야 한다는 것.

모두가 아는 것처럼, 현대차노조는 국내에서 ‘힘이 센 노조’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재계나 보수언론으로부터 ‘귀족노조’라는 공격을 받기도 하고, ‘철밥통노조’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규모로 따져도 4만7000여명에 달하는 조합원이 소속돼 있어 국내 최대 노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경향신문은 이 사설에서 노조가 임금피크제를 수용하는 대신, 삭감된 임금으로 마련된 돈이 (기업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실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나 처우개선, 청년 채용 등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왜 ‘무조건 거부’는 안 된다는 걸까?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임금피크제 효과가 대단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노동계 주장은 옳다. 정년 60세를 채울 수 있는 공공부문과 일부 대기업 생산직은 전체 노동자의 8%도 안된다. 임금피크제를 한다고 재계가 청년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문제는 실질효과와 상관없이 임금피크제를 안 하면 청년고용대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상당수 국민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데 있다. (경향신문 사설 8월13일)

‘엘리트 노동자’? ‘상위 10%’? 그들은 누구인가?

이동학 위원이 거론한 “상위 10%의 조직노동”이나 경향신문이 언급한 “전체 노동자의 8%”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거칠게 요약하면, 대개 이런 사람들이다.

대기업(또는 정부·공공기관)에 다니고

정규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노조를 통해 회사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노동자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노동시장 개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런 영역을 ‘내부 노동시장’이라고 표현한다. 해고나 희망퇴직 같은 고용불안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안에 들어와 있는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있고, 회사로부터 무시와 탄압을 받을지언정 노조도 있다.

반면 이 바깥은 ‘정글’이다. 상시적 고용불안과 저임금, 차별, 해고위협이 도사린다. 비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각종 인턴, 일용직 등은 물론, 노동조건이나 처우가 열악한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구직자나 무직자도 마찬가지다. 보장된 정년도 없고, 목소리를 내줄 노조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 양대노총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안에서도 정규직 노조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 현실이다. 흔히 ‘노동계’로 뭉뚱그려 표현되지만, 그 바깥에는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얻지 못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있다는 뜻도 된다.

정부는 틈새를 노린다?

이렇게 노동시장의 ‘안’과 ‘바깥’에 속한 사람들의 처지는 엇갈린다. 임금피크제에 대한 온도차도 자연스레 생겨난다. 누구에겐 이게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임금피크제의 속성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임금피크제가 성립하려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정년이라는 게 보장되어야 하고, 연차에 따라 자동적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형태(연공급, 예를 들어 호봉제)여야 한다.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노동자처럼 ‘바깥’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정부와 경영계는 바로 이런 ‘안’과 ‘바깥’의 틈새를 노린다.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명분으로 꺼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여론전을 하겠다는 얘기다. “정년 연장의 과실(果實)만 챙기고 임금피크제 도입에 결사반대하는 것은 자기 아들·딸, 조카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행위”(조선일보)라는 주장은 그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노동계·진보·야당 일각의 주장은 이런 상황을 근거로 삼는다. “수세적 대응으로 일관할 경우 대기업의 책임이 가리고 노조가 청년실업의 주범처럼 비치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경향신문)는 것.

정부는 내부 노동시장과 외부(불안정 노동과 구직자)의 격차를 여론전의 지렛대로 쓴다. 노동계는 내부 노동시장 종사자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낫다는 현실을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태도가 정부와 기업이 파고들기 좋은 ‘약한 고리’가 된다. 진보 성향의 노동사회학자인 정이환 교수(서울과학기술대)는 “정년이 늘어나면서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일부 양보해 신규 고용 창출에 쓰자는 건 노조가 먼저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게 어떻게 청년 고용 창출로 이어지는지 보장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래야 노동운동이 산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제441호, 8월4일)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은 ‘경영계와 노동계의 대립’이라는 구도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세대 간 갈등 요소도 있고, 이처럼 노동자 사이의 의견차도 존재한다. 임금피크제를 수용하는 게 꼭 해법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지금보다 더 깊고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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