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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자살로 잃는다는 것

  • Bryan Behar
  • 입력 2015.08.17 12:40
  • 수정 2016.08.16 14:12

내 아버지는 정말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 내 마음속 아버지는 언제나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하고 미소를 지으며 테니스를 치고 필라를 입고 계셨다. 필라는 교외에 살며 미소를 짓고 좋은 인생을 사는 유대인 아버지들의 공식 유니폼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중국에 두 번 다녀오셨던 해도 있었다. 아기를 입양하거나 마르코 폴로가 아니라면, 중국에 두 번이나 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리차드 닉슨은 중국에 한 번만 다녀왔지만 중국에 다녀온 걸로 유명해졌다.

내 인생의 첫 42년 동안, 나는 내 아버지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행복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강하고 차분하며, 자기 문제를 제쳐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해주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43살 때 아버지는 자살로 돌아가셨다.

자살로 누군가를 잃어 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것을, 믿어왔던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할 것을 즉각적으로 요구 받는다. '잠깐, 내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하는 일반적인 충격은 이와는 별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주 동안, 나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겪었고 그와 똑같이 견딜 수 없는 부조리를 겪었다. 내 가족과 친척들은 엄청난 품위, 친절함, 연민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평소엔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을 텔레토비처럼 보이게 만들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비극을 살아남는 데에는 각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각본이 있었다면, 아마 레이커스 경기 티켓이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연기하려 하는 가족은 아마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플레이오프이긴 했다.

당연한 이야기부터 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특히 안 좋은 방법은 엄마가 전화를 해서 "아빠가 자살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매트가 자살했어." "아빠." "매트?" 이런 말들을 계속 듣게 된다. 이건 내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오래간다.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게다가 나는 애벗과 코스텔로 듀오의 코미디 같은 전화 통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충격을 받아 부모님 댁으로 차를 몰고 가며, 나는 이게 큰 오해일 거라고 간절하게 믿고 싶었다. 가보니 우리 가족의 집은 범죄 현장이 되어 있었다. 긴급 의료원들, 시체 운반용 자루가 있었다. 그때 나는 믿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아버지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이틀 전 우리 집에 와서 내 딸에게 8살 생일 선물을 주셨다. 자살하기 직전에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 것 아닌가?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할 때 나를 안아주셨다. 아버지는 그게 나를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나는 전혀 몰랐다.

가족들이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와 함께 있어줬던 게 기억난다. 경찰에게 말하며 너무나 불안해서 계속해서 '파울 플레이'라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속으로는 슬퍼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이틀 뒤에 딸의 수영 파티에 같이 갔던 게 기억난다. IHOP에서 일주일 동안 초콜릿 칩 팬케이크와 소시지를 사 먹었는데도 체중이 2.2kg 줄었던 게 기억난다.

유서는 없었다. 명백한 이유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아버님 본인만 알고 계셨던 불치병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네요.

며칠이 지나며 좀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빚이었다. 집 때문에 진 빚이 집 가격보다 더 많았다. 이런 상황을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계속 부유하고 잘 지내는 척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이 든든한 사람,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인 것으로 행세하기 위해 아주 무리를 했다.

그 주에는 장례식을 앞두고 랍비의 사무실에서 욕설을 퍼부어 가며 전설이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가족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 랍비가 골란 고원의 폭격을 겪고 살아남았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유대인 아담스 패밀리와 30분을 보내고 나니 그는 바디 랭귀지로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성가대 인턴을 대신 들여보내!"라고 외쳤다.

아이러닉하게도, 날 거의 쓰러뜨릴 뻔 한 것은 초콜릿 한 상자였다.

자살 충동 생존 안내서를 읽거나 화장 준비를 하는 것 같은 즐거운 일들에서 난 잠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쿵푸 판다'를 보러갔다. 영화 중간에 어머니가 전화를 거셨다. "브라이언, 당장 와줘. 긴급 상황이야." 나: "안돼! 무슨 일이죠?" 어머니: "네 동생." 물론 나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다. 어머니: "네 동생이 방금 씨즈 캔디 한 상자를 열었어." 나: "맙소사, 당장 갈게요...... 잠깐, 방금 씨즈 캔디라고 하셨나요?" 초콜릿 하나하나를 스트리크닌에 적신 게 아니라면 그게 왜 긴급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브라이언, 내가 음식 양 조절을 못하는 거 알잖니. 네 형이 내 앞에서 초콜릿 한 개를 먹으면, 난 한 상자를 다 먹을 거야."

대기 중 전화로 다른 전화가 왔다. 동생이었다. 동생과 어머니의 거리는 지금 당신과 이 글이 뜬 화면의 거리 정도였다. 그는 내가 자기 편을 들어주길 원했다. "32살 먹은 사람은 초콜릿 먹어도 되는 거잖아." 그 말을 반박하기란 힘들었다.

'그레이 가든'의 LA 버전을 보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들이 슬퍼하는 가족 역을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실제 비극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실제 사람들이다. 세상이 뒤집어졌을 때는 애도하는 올바른 방법이란 없다. 비록 내 생각에는 반드시 씨즈 캔디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추도 연설을 할 때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삶이 끝난 방식으로만 정의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토론 캠프에서 잘 못하고 있을 때 한밤중에 나를 도와준 사람, 손주들이 봉제 인형들을 내던질 때 계단 밑에 서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손주들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걸 사랑하셨다.

자살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더 많이 알았어야 하나? 아버지는 점점 조용해지셨지만, 나는 그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우여곡절을 겪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 스스로의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다면 아버지가 더 많이 털어놓으셨을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나는 아버지는 결국 수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하는 사람이길 원했지만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는 수치심 말이다. 수치심이 너무 압도적이라 아버지는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시점을 넘어버렸다.

가족을 자살로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꿈이 흔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꿈을 많이 꾼다. 꿈에서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어머니와 같은 집에 계신다. 꿈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나중에 알게 된 모든 것을 다 안다. 아버지의 고통. 아버지의 약함.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안전하게 지키고, 극복하실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아버지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살아계시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래서 나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안다.

허핑턴포스트US의 Losing a Parent to Suicid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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