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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메디신, 첫 앨범 '이리버서블'의 기적

  • 박세회
  • 입력 2015.08.17 06:31
  • 수정 2015.08.17 07:03
ⓒ석기시대레코드

가끔씩 한국의 헤비니스 음악을 들으며 비인기 종목을 떠올리곤 한다. 여자 핸드볼이나 남자 하키 같은 종목들이다.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건 같지만, 큰 국제대회가 열릴 때 잠깐이나마 열광의 대상이 되는 비인기 종목에 비해 헤비니스 음악은 늘 관심 밖에 있다는 게 다르다. ‘척박하다’는 형용사는 식상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변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좋은 헤비니스 음악이 계속 나온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Posted by STONEAGE RECORDING STUDIO (석기시대) on 2015년 7월 11일 토요일

여기, 또 한 장의 기적과 같은 앨범이 나왔다. 블랙 메디신의 첫 앨범 <이리버서블>(Irreversible)이다. 모두에게 낯설 이름의 이 밴드는 결성한 지 10년이 된 팀이다. ‘10’년과 ‘1’집이라는 숫자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현실적 어려움일 수도 있고 음악적 고민일 수도 있다. 그렇게 10년 동안 쌓여온 시간의 힘이 앨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서 ‘기적과 같은’이란 표현은 괜한 수사가 아니다. 난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앨범을 ‘올해의 앨범’으로 꼽을 것이고, 연말 음악 매체들이 선정하는 명단에서도 이 앨범은 상위권에 자리할 것이다. 그만큼 확신에 차게 만드는 음악이다.

블랙 메디신의 중심을 잡고 있는 기타리스트 이명희는 한국 최초의 데스메탈 밴드로 불리던 스컨드렐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또 다른 데스메탈 밴드 사두에서 활동하며 <더 트렌드 오브 퍼블릭 오피니언...>(The Trend Of Public Opinion...)이라는 인상적인 앨범을 남겼다. 밴드의 보컬리스트 김창유 역시 데스메탈 밴드 시드와 둠메탈 밴드 투견에서 가공할 목소리를 들려줘온 베테랑이다. 팀을 이끄는 둘에게는 데스메탈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데스메탈의 성지’라 불리던 1990년대 초반의 미국 플로리다가 아니라, 1970년대의 영국 버밍엄이었다. 헤비메탈의 시조라 할 만한 블랙 사바스가 탄생한 곳이다.

블랙 사바스의 영향력을 이 짧은 지면에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우리가 헤비메탈을 비롯한 헤비니스 음악을 연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어두움이라거나 무거움, 암울함, 음산함 같은 것들은 모두 이 ‘검은 안식일’이란 이름을 가진 팀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블랙 사바스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지속돼 블랙메탈이나 둠메탈 같은 극단적 형태의 메탈에서부터 슬러지메탈 같은 비교적 최신 경향의 음악에까지 고르게 미치고 있다. 각종 하위 장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검정’ ‘죽음’ ‘불행한 운명’ ‘진흙’이란 낱말들에서 연상되는 ‘느릿함, 블루지함, 암울함, 사악함’의 근원인 셈이다.

블랙 메디신은 근원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블랙 사바스의 직접적인 세례를 받고 앞서 말한 ‘느릿함, 블루지함, 암울함, 사악함’의 극대화를 앨범에 담았다. 둠·스토너·슬러지 메탈로 분류된 이들의 음악은 장르적 특성을 제대로 살려냈다. 낮고 느리고 어두우며, 사이키델릭한 부분을 강조한 사운드 프로덕션은 비슷한 부류의 음악들 사이에서 블랙 메디신을 좀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앨범은 하나의 큰 덩어리이기도 하면서 각 곡의 매력은 살아 있다. 흔히 잘 만든 음악을 ‘세계 수준에 근접한’이라 표현하곤 하는데 블랙 메디신의 음악에는 ‘근접’이란 말을 빼도 된다. 이건 그냥 세계 수준의 음악이다. 이 방면의 대표적 밴드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일렉트릭 위저드나 미국의 토치 등과 한국의 블랙 메디신을 함께 놓아도 된다.

반복해 말하지만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 기적을 아는 이들의 수가 늘어날 리는 만무하다. 장르적 불리함은 결정적이다.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가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런 기적과 같은 음악들 덕분에 기운을 차리기도 한다. 이런 기적이 끊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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