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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받을지어다, 평화를 바라는 약한 자들이여

ⓒCorel

[매거진 esc] 김연수의 ‘소년이로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의 이름은 평화동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피스타운’인 셈이다. 전주와 익산 등에 같은 이름의 동네가 있다고 들었는데, 김천의 경우에는 대화정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평화동으로 개칭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광복 뒤에 바꿨다니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나는 평화라는 말을 수없이 하며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평화라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살던 옛 동네를 떠올린다.

평화동을 더욱 평화동으로 만든 건 성당이다. 김천역에서 3번 국도를 건너면 남산동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시작되는데, 그 길의 오른쪽 언덕에 평화동 성당이 있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내게 감각적으로만 남아 있다. 예컨대 밤이 돼 옛집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면 머리 위에는 꼬마전구처럼 반짝이던 북두칠성과 우유를 엎지른 듯한 은하수가 있어 내가 우주의 한 귀퉁이에 살고 있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감각적 기억 중 하나가 바로 평화동 성당의 종소리였다.

계절마다 시차는 있었지만, 대개 골목길로 어스름이 깔릴 즈음이면 성당의 종소리가 둥글게 울려 퍼졌다. 공감각적 표현이라는 말은 학생이 된 뒤에야 배웠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매일 둥근 종소리를 들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평화에 대해서 논하라는 논술 문제가 나온다면, 아마도 나는 답안지에 이렇게 쓸 것 같다. 그건 온종일 실컷 놀다가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듣는, 멀고도 둥근 종소리라고.

평화동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버드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길 아래쪽에는 초등학생들이 야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터와 시멘트로 만든 관중석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성당 주변은 평화동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였다. 한번은 그 공터 주변에서 전쟁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준 목총을 쥐고 나는 관중석 한쪽에 누워서 적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매복을 잘한 탓인지 나를 발견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계속 숨어 있다가, 숨죽이고 있다가, 그만 나는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보니 이미 어스름이 깔린 저녁. 일어나서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만 남겨놓고 다들 가버렸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나는 이른 저녁의 성당 높은 탑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들과 하나둘 불을 밝히는 평화동의 집들을 내려다봤다. 그날의 일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시절, 저녁이 내릴 즈음이면 나는 곧잘 성당 뒷산에 올라가 평화동에 저녁이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만큼의 거리가 평화를 만든다는 것을 나는 그 언덕에서 배웠다.

성당 아랫동네이니 평화동에는 평신도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우리가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부르는 친척 누나도 있었다. 성당 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운이 좋으면 젊은 신부님을 따라서 사제관까지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세례를 받은 건 고향 인근 부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할 때였다. 예비자 시절이 끝난 뒤 프란치스코라는 새 이름으로 받은 첫 영성체는 기대와 달리 혀끝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렸지만, 그 맛은 여전히 생생하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시는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나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그다지 오래 사용하지 않게 됐지만.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성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가톨릭 사제가 된 조선인 소년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일본 규슈의 아마쿠사라는 섬에 있는 사키쓰 성당이었다. 대절 택시를 타고 섬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온 만을 따라 구불구불 이동하는데 바닷가 어촌 마을의 지붕들 위로 솟은 십자가가 보였다. 성당 앞까지 가보니 인적도 드물어 들리는 건 오직 파도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침묵에 휩싸인 듯했다. 사키쓰 성당은 그처럼 고요한 곳이었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시쓰교회에 갔을 때도 주변의 마을이 너무나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해서 인상적이었다. 현재 일본은 규슈 지방의 두 가지 역사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데, 하나는 한-일 간에 논란이 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이고 다른 하나는 나가사키 인근의 초기 교회 유적이다. 나가사키를 비롯해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지역에 천주교 교회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신자들의 활동은 그만큼 활발하지 않다. 그러나 17세기 막부의 잔인한 박해를 생각하면, 규슈 지역의 성당에서 느끼는 이 평화와 고요의 기운은 어딘지 특별하게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마카오의 성당들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박해 때 대부분 파괴됐다가 19세기 개항 이후 새로 건축된 일본의 성당들과 달리 마카오의 성당들은 비교적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카오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베니션 호텔만큼이나 성 바울 성당 유적을 인상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17세기 초 예수회가 지은 이 웅장한 성당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지만, 여전히 남은 정면 파사드는 마카오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파사드 앞 계단에서 평화와 침묵을 느끼기란 꽤 힘들다.

마카오에서는 옛시가지 곳곳에 산재한 성당들을 찾아가는 게 오히려 더 낫다. 그게 언제든 마카오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며 성당들을 돌아보는 일은 한여름의 규슈에서 성당을 순례하는 것만큼이나 땀을 쏟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한눈에도 노란색 외관이 무척 아름다운 성 오거스틴 성당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무더운 날씨에 언덕을 오르느라 흘린 땀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박하고 고요한 옛 성당에 앉아 잠시나마 평화로운 순간을 맛보는 이런 기쁨은 성대한 유럽의 대성당들을 방문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유럽과 달리 동북아시아의 성당들은 한번도 권력을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눈물과 고통은 약한 자들의 것이다. 하지만 약한 자들의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천주교 박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고요 역시 약한 자들의 것이다. 권력자들은 할 말이 많을 테니 침묵을 지키기가 어려울 테니까. 그런 점에서 소설 속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는 신 역시 약자들의 신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의 평화동 성당, 그리고 규슈와 마카오의 성당들에서 느낀 고요는 그 신의 것이리라.

그러나 평화 역시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나는 동북아시아의 옛 성당들을 찾아다니다가 깨닫게 됐다. 강한 자들은 자기가 이길 것을 알기 때문에 말로는 평화를 외쳐도 실제로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약한 자들은 권력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니 오직 평화를 바랄 뿐이다. 그들 역시 원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 평화는 원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니까. 광복 직후, 동네에 평화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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