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담화'는 실망스러웠다. 평론가의 관점을 취한 '아베담화'에는 가해의 주체를 찾기 어려웠고, 고노담화 등 과거의 반성에 기대고 있었으며, 구차한 변명이 등장했고, 적반하장의 기미도 보였다. 아베의 담화 내용 중 주요한 대목을 분류해보자.
"러일전쟁이 식민지배 아래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줬다"(곡학아세식 역사관)
"일본은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해왔다. 그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 동남아시아, 한국, 중국 등 주변에 있는 아시아 국민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전후 일관되게 그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기울여왔다"(과거 반성에 의존)
"식민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해 모든 민족의 자결과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가해주체 모호)
"전장의 그늘에서 깊이 명예와 존엄에 상처받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가해주체 모호)
"일본이 세계공황에 휩쓸리면서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고, 힘의 행사에 의해 해결하려 시도했다. 그로 인해 만주사변 등을 일으켰다"(구차한 변명)
"일본에서는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인구의 8할이 넘는다. 우리들의 아이와 손자,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선 안 된다"(적반하장)
무릇 '반성'은 사실관계를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정확히 표현하며, 확정된 사실관계에 기초해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사죄의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반성을 받는 대상에게 최대한의 위자(慰藉)를 하며, 장래를 향해 책임 있는 약속을 할 때 유의미하다. 그렇지 못한 '반성'은 '반성'이 아니며 오히려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이거나 조롱이기 쉽다.
'반성'의 기준을 이렇게 설정할 때 아베담화는 '반성'이 아니다. 아베담화에는 일제가 대외팽창전략을 취해 조선 등을 강제로 병탄해 식민지로 만든 사실, 만주사변 및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를 혈겁에 몰아넣은 사실, 식민지 조선의 꽃다운 처녀들을 포함해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욕해소의 도구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 일제가 관여했던 사실 등이 명시되지 않았다.
아베담화에도 식민지배와 위안부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일제'라는 가해주체가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주어'가 없다. 만주사변의 배경으로 세계공황을 든 것, 전후 세대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으름장(?)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요컨대 아베담화는 반성의 내용과 형식 모두 낙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베 신조에게 화를 낼 기력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베 신조에게 분노하기가 힘들다. 대한민국이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나라인데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우울한 광복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