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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도에서 ↓↓ 13도까지, 독기 푼 소주 90년사

돼지껍데기가 불판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만다. 제때 뒤집지 않으면 돌돌 말려 앞뒷면을 골고루 익히기 어렵다. 적당한 타이밍에 두어번 뒤집다 가위로 재빨리 썰어낸다. 많이 익히면 딱딱해지니 먹기 좋게 자른 뒤 취향대로 더 익히는 게 좋다. 이제 돼지껍데기가 후끈 달아 탁탁 튀어오르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빈 잔에 소주를 채우는 일이다.

격식 없이 어울리고, 마음을 나누는 데 소주만한 술이 없다. 근심을 잊게 빨리 취할 수 있고, 가격도 싸다. 한국주류산업협회가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을 분석한 자료(2012년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 한명이 한해 동안 마시는 소주는 63병이다. 맥주는 약 100병으로 소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시지만 최근엔 소주의 약진이 돋보인다.

롯데마트는 올해 6월 소주 매출이 5월에 견줘 10%나 늘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에 맥주 매출은 0.1% 줄었다. 이에 따라 가장 대중적인 주류인 소주와 맥주를 합한 매출에서 소주의 비중은 지난해 6월엔 23.4%였지만 올해 6월엔 26.2%로 2.8%포인트 늘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여파로 7월 주류 매출이 전반적으로 감소세를 보였지만, 소주는 지난해 7월에 견줘 14.1%나 크게 성장했다. 여름이 성수기인 맥주는 오히려 지난해보다 6%나 하락했다.

여기엔 저도주 과일소주가 최근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전체 소주 판매 증가를 이끈 영향이 있다는 게 주류업계의 분석이다. 롯데주류가 지난 3월 선보인 유자맛 ‘순하리 처음처럼’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무학이 유자·석류·블루베리 맛 ‘좋은데이’를 출시했고, 소주시장 1위 하이트진로도 ‘자몽에이슬’을 선보였다. 현재는 순하리가 복숭아맛, 좋은데이가 자몽과 복숭아맛을 추가로 내놓으며 여전히 저도주 소주 시장을 달구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소주가 아니라 리큐어에 속하는 이들 과일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13도로, 독한 맛으로 마시던 소주를 순해서 찾도록 하는 역설을 만들고 있다.

현재 한국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평균 17도 안팎이다. 서울·경기권을 장악하고 있는 하이트진로 ‘참이슬’이 17.8도, 롯데주류 ‘처음처럼’은 17.5도다. 부산과 경남에서 인기있는 무학 ‘좋은데이’는 16.9도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은 서울과 도수가 비슷하다.

1924년에 처음 등장한 진천양조상회 ‘진로’의 도수는 무려 35도였다. 35도 소주가 지금의 13도까지 내려온 90여년의 세월 속에는 술이 순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 진로는 1954년 6월 전국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하면서 상표 그림을 원숭이에서 두꺼비로 바꾼다. 알코올 도수가 30도로 낮아진 것은 41년이 지난 1965년이다.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하면서 증류식에서 희석식(알코올을 물에 희석)으로 제조방식이 바뀌었다. 소주 상품 개발 등에도 참여했던 하이트진로 홍보팀 서명석 부장은 “1960년대 이전에는 알코올 도수를 일정하게 맞추는 것 자체가 품질력일 만큼 도수를 높이고 낮추는 기술력이 없었다”며 “알코올 도수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자 30도 소주가 출시됐다”고 말했다.

소주 도수를 5도 더 낮춰 25도가 된 건 8년 뒤인 1973년이다. 이때부터 ‘국민 술’ 소주라면 25도라는 생각이 정착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탁주(약주 포함)의 비중이 78.9%에 달했지만, 1980년대 들어 탁주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소주 소비량이 치고 올라왔다. 소주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됐다.

소주가 대중화되면서 소주업체 간 경쟁은 더욱 심해진다. 1976년 정부는 일부 업체의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업체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도주 보호 규정을 신설했다. ‘자도주 의무 구매’로, 시·도별로 1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50%를 해당 지역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 200여개에 이르던 희석식 소주 업체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살아남은 업체들이 수도권에선 진로, 부산은 대선, 경남은 무학, 전남은 보해였다.

이 자도주 보호 규정은 1989년에 40%로 완화됐다가 1992년 완전히 폐지됐다. 그러나 1995년에 다시 부활했고, 1996년에 시장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이 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지역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닦던 지역 소주업체들이 먹고 먹히는 무한경쟁 시대에 다시 던져진 셈이다.

‘소주=25도’라는 등식이 깨진 건 19년이 지난 1992년이다. 전남을 기반으로 한 보해양조가 젊은층과 여성층을 겨냥해 알코올 도수 15도짜리 소주인 ‘보해라이트’를 내놓았다. 그러나 출시 초기에만 반짝 인기를 얻었을 뿐 ‘물 탄 맛이다’라는 반응에 시장 안착엔 실패했다.

1990년대 후반에 자도주 보호 규정이 완전히 없어지면서 지역 소주들의 치열한 전쟁은 본격화했다. 의외로 승부는 쉽게 갈렸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진로는 전국 확장에 성공했고 지방 업체들은 수도권 공략에 실패했다. 강원도를 기반으로 둔 경월이 1993년에 두산에 인수되면서 그해 출시한 ‘그린’ 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 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이후 지방 소주업체들이 15~23도 소주를 앞다퉈 개발하면서 주류업계에 저도주 바람이 불었다. 경기가 호황인 덕에 보해양조의 ‘김삿갓’, 진로의 ‘참나무통 맑은 소주’ 등 프리미엄 소주도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이 마시고 취하는 독한 술에서, 즐길 수 있는 순한 술을 찾기 시작하면서 좋은 술 경쟁이 불붙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소주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저도주와 일반소주, 프리미엄 소주까지 상품군을 넓히며 타깃별 마케팅을 펼쳤던 주류업체들이 다시 주력 제품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1998년 진로는 23도 소주 참이슬을 내놓으면서 국내 소주시장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다. 판매에 가속도가 붙은 참이슬은 그 뒤로 소주 판매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주류업계에 순한 술도 잘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때부터 소주의 저도주화가 또 이어졌다. 경쟁 업체들이 주거니받거니 1도씩 낮추더니 2004년에 참이슬이 21도까지 알코올 도수를 내렸다.

참이슬의 독주를 막아선 건 절치부심하던 두산주류였다. 2006년에 20도 ‘처음처럼’으로 여심을 파고들었다. 처음처럼의 개발은 철저한 시장분석을 통해 이뤄졌다. 당시 개발팀은 제품 개발을 위해 국내 소득과 지출의 변화 통계를 분석했다. 식자재 구입 지출은 줄어드는 반면 외식비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소비의 동기도 경제적인 요인보다 즐거움이나 건강, 휴식 등을 중시하는 정서적인 요인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른바 ‘웰빙’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3도 더 낮춘 20도 처음처럼이 만들어졌다. 두산주류(현재의 롯데주류)의 ‘즐겁고 편안한 소주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전략은 적중했다. 맛이 순해진 처음처럼은 출시 다섯달 만에 판매량 1억병을 돌파하면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이에 질세라 2005년 진로를 인수한 하이트진로는 2007년 업계의 ‘마지노선’이라는 20도를 깨고 19.5도 ‘참이슬 후레쉬’와 18.5도 ‘진로제이’를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19도에서 17도로 더 순한 소주가 등장했다. 최근 인기인 과일맛 소주는 13도 안팎이다. 90여년 사이 35도에서 13도까지 22도가 내려왔다.

술이 알코올 도수를 낮춰 순해지는 시기가 40년, 20년, 8년, 1년 단위로 빨라지는 이유에 대해 롯데주류 홍보실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면서 음주인구가 젊은 여성층까지 다양해져 이들이 부드럽고 순한 술을 계속 찾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술이 순해지면서 마시는 양도 늘었다. 도수를 내릴수록 소주 출하량이 증가했다. 지난해 한국 소주 출하량은 전년에 견주어 8.2% 증가한 13억4000만ℓ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증가폭이다. 롯데주류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강조하고, 술만 마시던 회식문화가 변화하면서 독한 술이 사라지는 원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소주의 맛을 지키는 마지노선을 17도라고 본다. 17도보다 내려가면 소주 본연의 맛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찾은 방안이 지금의 과일맛 소주인 리큐어다. 이에 대해 주류업계 쪽은 “일반소주를 즐기는 층이 여전히 남아 있고, 저도주를 선호하는 틈새층을 겨냥해 내놓은 제품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문화적인 요소 외에도 도수를 낮추면 주정(알코올)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에 주류업계가 저도주 바람을 이끈다는 시선도 있다. 소주 원료의 80%는 물이고 나머지는 주정과 약간의 감미료가 들어간다. 주정은 소주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소주업체들은 해마다 매출의 20% 정도를 주정 구입에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주류업체들은 “오해”라고 해명한다. 주류업체들은 “정확한 원가 구조와 첨가물 등은 기밀”이라며 “원가를 아끼기 위해 도수를 줄이는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일반소주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과일맛 소주인 리큐어 제품이 잘나가는 것에 대해 업체들은 모두 반색이다. 지난 3월 출시된 순하리는 소주에 유자과즙 0.1%를 첨가한 제품이다. 출시 두달 만에 2200만병이 팔리며 경쟁사가 엇비슷한 제품을 쏟아내는 ‘미투제품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좋은데이 컬러시리즈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200만병, 자몽에이슬도 출시 첫날에 100만병이 팔려 나갔다. 업체들은 생산 공장을 늘리며 공급량을 맞추기 바쁘다.

저도주 선호 현상은 소주뿐만 아니라 위스키 시장에서도 뚜렷하다. 알코올 도수 35도로 저도 위스키의 대명사로 불리는 ‘골든블루’는 1분기 성장률이 65%에 이른다. 40도 위스키들이 10~15%가량 마이너스 성장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조니워커’로 유명한 디아지오는 저도주 ‘윈저 더블유 아이스’를 출시하고 판매 지역을 확장하고 있다.

저도주 열풍으로 인해 음료 시장도 덩달아 호재를 맞았다. 소주와 위스키, 보드카 등에 탄산수나 마시는 식초 등을 섞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대표적인 ‘믹서’로 불리는 ‘토닉워터’의 올해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25% 가까이 증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도주 열풍을 이끌고 있는 과일맛 소주의 인기는 벌써 조금 시들해지는 듯 보인다. 지난 3일 잡코리아가 직장인 79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과일맛 소주에 대해 여성들은 또 먹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남성들은 절반 이상이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답했다. 마셔본 사람 가운데 ‘또 마시고 싶다’는 사람이 52.2%(350명), ‘맛은 있었지만 금방 질려서 다음에 또 먹을 것 같지 않다’는 사람이 37.3%(243명), ‘맛이 없었다’는 사람이 8.8%(57명)였다.

업계는 저도주 열풍을 몰고 온 과일맛 소주의 인기는 시들어도 저도주를 찾는 문화는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획일적으로 술을 마시는 회식문화가 사라지고 있고, 앞으로 음주문화의 중심이 될 20~30대는 독주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반영한 술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롯데주류는 “소주·맥주의 소비 움직임은 주류 시장의 큰 파도인데 소주 근처에 작은 물결이 일어난 것”이라며 “순하리가 저도주 시장에 불씨를 지피고 너도나도 장작을 보태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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