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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부머 할머니의 패션 구상

누구에게나 한때 젊은 날이 있다. 그 젊음의 시대가 끝났을 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나이 60 이후의 삶, 또는 퇴직 이후의 삶이라는 살짝 두려운 신세계가 우리 앞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쪽 문이 열릴 때,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갈지 말지를. 그러고 보니 나이 60 이후라는 런웨이를 걷는 베이비부머 할머니, 그 명랑함이 내 패션전략이다.

  • 정경아
  • 입력 2015.08.07 11:23
  • 수정 2016.08.07 14:12
ⓒgettyimagesbank

어쩌다 보니 나이 60이다.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첫 해에 태어난 건데 내세울 업적이라곤 '대과 없이' 60년을 살았다는 정도? 회갑 잔치를 치를 명분으로는 약하다. 그래서 다들 파티보다 여행으로 슬그머니 회갑을 자축하는 건가.

동갑내기 남편과 함께 가족형제들을 불러 합동 회갑 모임을 갖기로 했다. 장소는 해물 뷔페식당. 근데 뭘 입고 가지? 옷장을 휘 둘러본다. 한때 작업복이었던 낡은 정장이나 철 지난 바지, 니트류뿐이다. 그렇다고 새 옷을 사러갈 의욕은 전무. 60년을 살아와 낡은 몸에 새 옷을 걸친다는 게 왠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다. 평소대로 흰 티셔츠에 블루 톤의 롱 베스트, 그리고 7부 바지나 치마를 입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참에 나이 60 이후 패션을 구상해 볼까. 옷차림은 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드러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토탈 패션 기획이 필요한 이유다. 우선 내 몸의 현실을 직시해야겠지. 그 다음에 기존의 패션 컨셉을 수정하는 거다. 긴 거울 속의 내 몸을 똑바로 바라본다. 속옷 차림으로, 아니 내친 김에 알몸으로 천천히 전후좌우를 비쳐본다. 60년의 세월이 가져온 근골격계의 변화가 뚜렷하다. 두 번의 출산은 골반 주위의 뼈대를 변화시켰고 엉덩이 주변 근육은 쳐져있다. 뱃살은 쭈글거리고 옆구리 살은 물렁하다.

햇빛 밝은 창가로 손거울을 들고 나가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본다. 썬크림으로 얼굴을 도배해도 막아내기에 불가항력인 검버섯과 기미, 주근깨. 게다가 윤기 없는 은발. 갑자기 의기소침해진다. 역시 현실을 직시하면 아프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아름다움을 젊음이 독점할 수 없다고 평소 떠들어대던 나다. 각 나잇대 별 매력이 다르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일 생각 같은 건 내게 없다. 물론 욕심은 있었다. 나이만큼 나이 들어 보이고 나이만큼 실력 있어 보이고 싶다는 욕심 말이다. 나이만큼 쌓아온 삶의 기술이랄까 내공을 은은히 뿜어내는 인간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나이 먹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콘텐츠 없이 늙어가는 게 무서웠던 거겠지.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없어졌다. 속이 없는 건지 자유로워진 건지.

옷장을 정리해야 할 시점. 3년 이상 손 한 번 대지 않은 옷은 과감히 버리라던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몸에 딱 붙는 옷은 이제 불편해서 못 입겠다. 낡았지만 브랜드 옷이라 차마 버리지 못했던 정장들은 중고의류 가게로 보내야 하나. 그 중 조금 쓸만한 것들은 몇몇 후배들을 불러 밥 먹이며 골라보라고 할까보다.

앞으로는 좀 헐렁하다 싶은 티셔츠나 바지를 주로 입을 작정이다. 작년부터 화학섬유 셔츠나 스카프를 두르면 목 주위에 오돌도톨한 뾰루지가 돋는다. 어쩔 수 없이 자연섬유로 된 셔츠나 목도리를 할 수밖에. 정장 재킷 세 개는 남겨두기로 한다. 스커트도 두 개 남겨둔다. 아주 가끔이지만 필요할 경우를 위해서다. 사실 정장이란 일종의 갑옷이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무장을 했던 시절의 흔적이랄까. 내겐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브라를 입는 것도 점점 거추장스러워지고 있다. 가슴을 조이는 게 싫어 연장후크를 사다가 브라 고리에 끼우기까지 한다. 요즘 호감 아이템은 조끼. 짧은 조끼든 롱 베스트든 안에 티셔츠나 블라우스를 받쳐 입는 레이어드 룩 취향으로 발전 중이다. 니트 카디건도 계절 별로 두어 개씩 생겼다. 걸쳐 입기 편해서다. 아우터든 이너든 조임이 없는 옷이 맘에 든다.

느슨한 옷을 입을 때 걸음걸이조차 느슨해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우리들 중 패셔니스타인 혜영씨가 경고한 바 있다. 바른 걸음걸이와 바른 자세는 패션의 ABC라나. 맞는 말이다. 나도 댄스 클래스에 나가면서 자세 교정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무의식중에 배를 내밀고 걷지 않는지, 팔자걸음을 걷지 않는지 수시로 점검하게 된다. 직립보행이 운명인 인간이지만 모든 사람이 바른 자세로 걷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메이크업도 조금 바꿔야 할까? 잘 모르겠다. 썬크림이야 계속 바르겠지만 파운데이션이나 팩트는 좀 더 엷게 해야 할 것 같다. 나이 들수록 가벼운 화장이 깨끗해 보인다. 기미와 주근깨를 굳이 감추고 싶지 않다. 눈썹 숱이 줄어들고 있어서 눈썹을 조금 그려줘야 한다. 머리 염색을 할 계획은 없다. 퍼머는 석 달에 한번 꼴로 계속해 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려 한다. 진짜 문제는 머리칼. 숱이 줄어든 것도 모자라 윤기 없이 바스락거린다. 아무리 옷매무새가 좋아도 머리칼의 윤기가 없으면 요즘 말로 '너무 없어 보인다.' 헤어 에센스 제품을 조금 더 사용해야 하지 싶다. 휴!

화장과 헤어스타일 점검까지 하면 나이 60 이후 패션 구상은 마무리된 건가?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 표정이다. 그 어떤 완벽한 패션도 밝은 얼굴빛이 없으면 그만 빛을 잃는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야말로 패션의 화룡점점. 표정 관리 기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꾸며내지 않은 행복감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얼굴을 갖는 것, 이건 내 야심찬 나이 60 이후 기획의 핵심이다. 그러려면 괜찮은 수준의 건강, 그리고 나의 총체적 현실에 대한 만족감이 먼저다.

누구에게나 한때 젊은 날이 있다. 그 젊음의 시대가 끝났을 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나이 60 이후의 삶, 또는 퇴직 이후의 삶이라는 살짝 두려운 신세계가 우리 앞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쪽 문이 열릴 때, 웃는 얼굴로 걸어 들어갈지 말지를. 그러고 보니 나이 60 이후라는 런웨이를 걷는 베이비부머 할머니, 그 명랑함이 내 패션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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