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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셈블리' 진상필, 정재영의 맞춤 배역

  • 박수진
  • 입력 2015.08.05 07:41
  • 수정 2015.08.05 07:4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저요, 국회의원 잘해야 해요. 국민은 둘째 치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 있는데, 그 형 때문에라도 저 잘해야 해요.” 어쩌면 저렇게 요령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싫다는 사람 붙잡고 제 사정만 늘어놓으면서 무작정 자신의 보좌관이 되어달라는 막무가내의 남자. 물론 이 남자 사정이 좀 기구하긴 하다.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뒤 복직투쟁을 해온 게 벌써 삼년 석달째, 야권연대의 후보가 되어 재보궐선거에 출마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남자는 영 확신이 안 선다. 동네가 여당 공천만 받으면 나무막대기를 내보내도 당선이 될 법한 보수 여당 강세 지역이다 보니 그저 사람들에게 투쟁을 알리는 것 외엔 별 소득이 없어 뵈는 거다. 당장 제안을 받은 다음날부터 회사가 전기를 끊고 천막을 부숴버리겠노라 달려드는데, 선거를 완주하고 패배하면 또 무슨 일을 당할까? 그때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여당에서 공천을 준단다. 출마를 마음먹으면 회사와 합의를 중재해주겠다니, 이렇게 하면 어쨌든 이 길고 힘든 싸움을 마무리할 수는 있겠지. 그 생각 하나로 제안을 받아들인 이 남자는, 야당과 동료들에게 천하에 둘도 없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니 옛 동료들 보기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의정활동을 정말 잘해야 한다. 국민은 둘째 치고서라도.

아무리 좋게 봐줘도 별로 현명한 사람은 아니고, 꼬아 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꼬아서 볼 수 있는 남자. 한국방송 수목드라마 <어셈블리>의 주인공 진상필 의원의 사연은 일단 ‘배신자’라는 낙인을 얹고 시작한다. 잘못 연기했다간 설득력을 얻기는커녕 노동계에서 보수정당에 투신한 일부 의원들에 대한 알리바이처럼 보이기 쉬운 주인공이다. 작품 초반 지지기반이 일천한 초선 의원들이 보수 정당의 거수기나 총알받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상세히 묘사하다 보니, 작품이 방어적이라는 평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이 주인공이 배우 정재영의 육신에 깃드는 순간, 진상필은 미우나 고우나 기왕 의원이 된 거 잘되었으면 좋을 짠한 남자가 된다.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마냥 밉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설득의 능력. 지난 20년간 정재영이 스크린에서 보여준 능력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박봉곤 가출사건>(1996)의 단역으로 시작해 올해로 데뷔 20년차. 만약 정재영이 분한 인물들을 쭉 한 줄로 세워놓으면, 아마 좀처럼 요령을 피울 줄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만 걸어나가는 남자들로만 득시글거릴 것이다. 4명의 킬러 중 가장 성실하고 우직한 직업인에 가까운 <킬러들의 수다>(2001)의 ‘재영’에서부터, 쓸 줄 아는 의사소통 수단이라곤 주먹밖에 없는 <피도 눈물도 없이>(2002)의 ‘독불’과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가’는 <실미도>(2003)의 상필을 거쳐, 간신히 1군에 복귀해서 잡은 공을 죽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 소원이나 들어주자는 이유 하나로 관중석으로 냅다 던져버린 <아는 여자>(2004)의 야구선수 ‘치성’,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바람에 지나치게 범인 역할에 몰두해 모의훈련을 실제상황으로 만들어버린 <바르게 살자>(2007)의 ‘도만’, 과거로 돌아가 아내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여행 연구에 사활을 건 <열한시>(2013)의 ‘우석’에 이르기까지. 정재영이 연기한 남자들은 장르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매번 절박하고 우직한 모습으로 스크린 너머를 사로잡곤 했다.

정재영이 같은 연기를 게으르게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이렇게 절박한 남자들로 가득 찬 건, 아마 코미디 연기조차도 진지함과 진실성에서 나온다고 믿는 그 특유의 연기관을 알아본 감독들의 러브콜 탓이었으리라. 일찍이 장진 감독은 정재영의 코미디 연기를 두고 “절실함과 품위에서 출발하는 코미디”라 했고, 본인 또한 “진지하지 않은 연기를 했을 때, 웃기면 다행이지만 안 웃겼을 때는 허무하다. 반면, 진지한 연기라면 안 웃기더라도 리얼리티는 살아있으니까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기에 코미디의 70~80%는 진실함에서 나온다”고 자신의 코미디를 설명한 바 있다.(문석, 2005년 10월19일 <씨네21> ‘정재영의 연기가 빚는 공감의 동심원 들여다보기’) 물론 자기가 맡은 배역에 대강 접근한다고 말하는 배우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정재영은 배역에 접근하는 절실함의 수준이 조금 다르다. <귀여워>(2004)의 건달 ‘뭐시기’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 건달들과 합숙생활을 하고 수시로 만나 목욕탕을 함께 다녔다는 일화나, 자신이 분석하고 연구한 인물상과 감독의 디렉션이 충돌하면 타협하기보단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토론한다는 현장에서의 작업 태도까지. 배우 자체가 지닌 기질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인물이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감독들이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진심의 기반 위에 가지고 배운 사람보단 못 가지고 많이 배우지 못한 인물들에게 꾸준한 애정을 밝혀왔던 정재영의 취향을 더하면,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정재영식 인물상이 나온다.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걸 효과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할 만한 언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남자, 그래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도리를 찾지 못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사람.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은 죽음의 순간이 되어서야 “넌 내가 그렇게 싫으냐”고 이야기하는 게 애정 표현일 정도로 표현이 서툰 남자였고, <방황하는 칼날>(2014) 속 ‘상현’은 제 딸을 욕보인 이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다른 방도가 없어 제 손으로 사적 구제에 나선 남자였다. 심지어는 마을의 정점에 오른 <이끼>(2010)의 ‘천용덕’조차 내심 자신도 유목형(허준호)처럼 진심으로 경외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콤플렉스를 가슴 깊은 곳에 끈적하게 묻어둔 인물이었고, 정재영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일 <열한시>의 우석조차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평범한 사람의 언어에 솔직히 털어놓을 방법을 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과학의 언어로 멀리 도망가버린 바보 같은 남자였다.

그러니까 <어셈블리>의 진상필은 정재영에게 맞춤 옷과 같은 배역인 셈이다. 아무도 제대로 귀담아들어 주지 않는 투쟁을 너무 오래 하고 있는 이들.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알릴 만한 수단을 가지지 못한 탓에, 의원실을 점거하고 곡기를 끊고 저 높은 크레인 위로 올라가야 간신히 세상의 주목을 잠시라도 살 수 있는 이들. 진상필이야말로 그들 중 하나로 출발하지 않았나. 정재영이 연기하는 진상필은 오랜 투쟁과 외면이 안겨준 좌절과 모멸, 고립감과 무력함을 감당하지 못해 자주 울고 때로 폭음을 하며 종종 허물어진다. 드라마 1회 초반부, 회사의 손을 들어주며 파기환송을 선고한 대법원 판사에게 그렁그렁 눈물이 괸 두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우고는 투박한 어조로 사과하라고 울부짖는 정재영의 연기는 방영 직후 온 인터넷을 도배했다. 심지어는 <어셈블리>를 안 보는 이들조차 그 장면만큼은 어떤 경로로든 봤다고 할 정도니, 적어도 진상필이란 인물이 발 딛고 선 곳의 정서를 시청자들에게 설득하는 일만큼은 차고 넘치게 해낸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정재영과 진상필의 만남은 더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어셈블리>는 발언권을 빼앗긴 채 고립됐던 해고 노동자를 말들이 칼날처럼 부딪히는 정치의 장 한가운데로 보내 마이크를 쥐여준다. 막무가내로 굴어 동료들에게조차 ‘진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 남자는, 이제 진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제 뜻을 정치의 언어로 풀어 설명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도통 밖으로 토해내지 못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쌓여 있던 말들이 탈출구를 찾아 족쇄를 풀고 터져 나오는 순간을, 정재영은 과연 어떻게 그려낼까. <거룩한 계보>(2006) 개봉 당시 장진 감독은 <씨네21>이 마련한 감독-주연배우 인터뷰에서 “그가 이런 역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영화… (중략) 정재영도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쇼크로 순간순간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배우의 ‘진경’을 보는 순간을 꿈꿨다. 어쩌면 바로 지금이, 배우 정재영의 진경을 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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