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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만든 지옥 형제복지원 | 《한종선 그림전》 후기

《한종선 그림전》의 주인공인 한종선 님은 9살이었던 1984년에 영문도 모른 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뿐만 아니라 한종선 님의 누나와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종선 님은 이 그림들을 그릴 때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뇌느라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종선 님은 자신이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일들을 대체로 담담하게 그려나갔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매우 과감한 색과 필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 홍태림
  • 입력 2015.08.04 10:28
  • 수정 2016.08.04 14:12

▲ 《한종선 그림전》이 열린 공간해방, 사진: 홍태림

제17회 서울변방연극제 공식초청작 중 하나인 《한종선 그림전》이 용산동에 위치한 공간해방에서 지난 7월 23일에 개막했다. 나는 SNS를 통해서 한종선 님의 전시 소식을 접하고 《한종선 그림전》이 개막하는 날에 공간해방을 방문했다. 내가 공간해방을 방문한 날은 며칠에 걸친 호우 때문에 공기 중에 눅눅한 습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비교적 많은 분이 한종선 님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 공간해방에 와있었다. 《한종선 그림전》의 주인공인 한종선 님은 9살이었던 1984년에 영문도 모른 채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뿐만 아니라 한종선 님의 누나와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종선 님은 이 그림들을 그릴 때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뇌느라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종선 님은 자신이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일들을 대체로 담담하게 그려나갔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매우 과감한 색과 필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던 분도 한종선 님의 담담하면서도 과감하게 표현된 그림들을 찬찬히 감상한다면 한종선 님이 형제복지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큰 어려움 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종선 그림전》 소식을 접한 분 중에 형제복지원 사건을 모르시는 분은 이 사건이 그리 오래된 사건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지는 28년이 지났다.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은 아직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종선 님은 여전히 몸과 마음에 박힌 고통을 대부분 덜어내지 못한 채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하여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도대체 형제복지원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기에 한종선 님을 비롯한 많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이 아직도 형제복지원과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일까.

《한종선 그림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형제복지원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형제복지원 사건자료집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서 운영된 형제복지원은 헌법을 위배한 '내무부훈령 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와 전두환이 국무총리에게 내린 특별지시를 근거로 떠돌이, 앵벌이, 거지, 행려병자, 빈 지게꾼, 옷이 지저분했던 아이들,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감금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강제 노역과 (성)폭행, 살인을 자행했다. 게다가 형제복지원 내부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폭행은 같은 입소자인 조장을 통해서 이뤄지도록 종용되었다. 이러한 감금과 폭행 때문에 형제복지원 안에서 500명이 넘는 원생이 사망했으며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가거나 암매장되기도 했다는 진술도 있다.

▲ 박인근이 제5공화국로부터 상을 받은 뒤 식사하는 모습 ⓒ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 원장이었던 박인근은 매년 원생 수용규모에 비례한 막대한 국고 지원을 꾸준히 착복했다. 정부와 형제복지원의 이러한 만행은 1987년 3월 22일 원생들이 형제복지원을 집단 탈출하고 나서 세간에 크게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검찰과 청와대, 부산시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계속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덕분에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1987년에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 원을 선고받았으나 1989년 3차 항소심에서 불법구금, 폭행, 횡령죄 중 횡령죄만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 6월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박인근 일가는 여전히 온천사업, 레저사업, 학원사업 등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며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다. 결국,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한 진상조사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고 누구도 이 사건을 책임지지 않은 가운데 철저하게 삶이 붕괴한 피해자들만이 한국사회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경과는 어느 정도 이야기했으니 이제 《한종선 그림전》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실 나는 한종선 님의 그림들을 작년에 제44기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가 건국대학교 법학관 모의법정에서 진행한 <형제복지원 국민법정>에서 접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살아남은 아이』 책에 실린 한종선 님의 그림들을 보고 이 그림들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종선 님의 그림들에 크게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한종선 님의 그림들이 『살아남은 아이』 책에 실린 한종선 님의 수기와 전규찬, 박래군의 글에서 독립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책에 실린 내용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보조역할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한종선 님의 그림들을 실견하면서 책으로 한종선 님의 그림을 보았을 때와 다른 종류의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한종선 님의 그림들에서 이전과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그림들이 책에서 벗어나 전시공간 안에서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책에서 벗어나 전시장에서 어우러진 한종선 님의 그림들은 말과 글을 통한 증언과 또 다른 차원의 증언을 우리에게 발신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새로운 차원의 증언은 한종선 님의 말과 글의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틈새에서 흘러나온 감정들의 뒤섞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한종선 님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말과 글 사이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틈새를 확인하고 어루만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나에게 한종선 님의 그림들이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한종선 님이 이번 전시에서 그림들을 전시공간에 일률적으로 배치하기보다는 전시 공간과 자신의 그림들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나는 전시공간에 그림들이 이처럼 배치된 것을 보고 한종선 님이 공간해방에서 자신이 감금되었던 형제복지원을 떠올렸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한종선 님은 전시공간을 '유리방', '타작방', '시간의 통로', '추억 속의 현실', '돌아가는 길'로 구분하고 몇 개의 그림은 그림의 내용과 공간의 특성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배치 덕분에 한종선 님의 그림들은 서로 엉키지 않고 각자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펼쳐낼 수 있었다.

▲ '시간의 통로' 입구에 배치된 한종선 님의 그림들, 사진출처

이처럼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한종선 님의 그림에서 이전과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꼈고. 이 감정 덕분에 나는 한종선 님의 그림과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한종선 님의 그림들을 실견하고 나서 느낀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시에 관한 전반적인 인상에 대해서도 말한 것 같다. 다음으로 내가 《한종선 그림전》에서 인상 깊게 봤던 그림 몇 점에 관한 나의 감상을 적어 내려가 보겠다.

먼저 '유리방'에서 봤던 한종선 님의 그림들부터 되뇌어보자. 사각 유리관이 씌워진 상태로 바닥 한가운데에 배치된 이 그림은 좁은 독방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소년의 표정은 마치 긴 기다림 끝에 독방에서 탈출하게 되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하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의 위에는 투명한 사각 유리관이 씌워져 있다. 그런데 한종선 님은 왜 그림 위에 사각 유리관을 씌워놓았을까. 혹시 이 사각 유리관은 형제복지원뿐만 아니라 형제복지원 사건의 배후이자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에 관한 목소리를 계속 외면해온 국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각 유리관이 그림 속 소년의 자유를 잔혹하게 억압했던 국가와 형제복지원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각 유리관이 은유하는 바를 잔혹한 억압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한종선 님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사각 유리관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 요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유리방' 바닥에 배치된 한종선 님의 그림, 사진: 홍태림

예를 들어, '유리방'에 배치된 걸개그림 중앙에는 발에 족쇄가 채워진 인물이 검은색으로 단단하게 칠해진 검은 벽과 마주 보고 서 있다. 걸개그림 가운데 서 있는 인물 주변에는 거대한 새장에 갇힌 사람, 거미줄에 몸이 엉긴 사람, 땅속에서 상체만 겨우 내놓고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외부로부터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 배치된 쇠꼬챙이, 가시철조망, 검은 하늘은 걸개그림 속 인물들이 외부로부터 덧씌워진 잔혹한 억압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 '유리방'에 배치된 한종선 님의 걸개그림, 사진: 홍태림

'유리방'에 있는 걸개그림 외에도 '시간의 통로'와 '추억속의 현실'에 걸쳐서 배치된 두 점의 그림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겪었던 잔혹한 억압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통로 구역'을 조금 지나가면 하늘이 절반 정도만 보이는 천장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발목에 밧줄이 묶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은 인물의 뒷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 속 인물은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고 폭행으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는 멍 자국이 전신에 가득하다. 우리는 이 그림 속 인물의 뒷모습을 통해서 이 인물이 겪었을 고통스러운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이 인물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 인물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범벅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종선 님은 이 그림을 그릴 때 감상자가 인물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앞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왜일까? 아마도 한종선 님이 이 그림을 앞모습으로 그리지 않은 이유는 그림 속 인물의 고통을 뒷모습을 통해 괄호처리 함으로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감상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발목이 밧줄에 묶여 매달린 인물이 그려진 그림 바로 옆에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인물이 그려진 그림이 천장이 트인 벽에 붙어있다. 몸을 쪼그린 인물의 손과 발목에 남겨진 멍 자국과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이 인물도 장기간 일방적인 폭행에 노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푸른색 옷 위로 묘사된 옷 주름들이 옷 주름이 아니라 멍 자국이 옷 위로 스며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시간의 통로'와 '추억 속의 현실'에 걸쳐서 배치된 한종선 님의 그림들, 사진: 홍태림

'시간의 통로'와 '추억 속의 현실'에 걸쳐서 배치된 두 그림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그려진 대상뿐만이 아니다. 한종선 님의 앞선 두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비닐처리가 되어있다. 한종선 님의 다른 그림들은 실내에 있었지만, 이 두 그림은 실외와 실내의 사이쯤 되는 공간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보통 전시장에서 그림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보호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이 두 그림은 의도적으로 외부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그림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림 속 두 인물이 잔혹한 억압과 고통에 울부짖었을 때마다 어디서도 구조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번 절망에 빠졌을 상황을 떠올렸다.

이처럼 한종선 님은 국가와 형제복지원이 국민에게 자행한 잔혹한 억압을 그림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종선 님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낸 증언들은 한종선 님의 말과 글 사이에서 미처 발견되지 못했던 것들이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종선 님의 그림은 한종선 님의 말과 글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다. 왜냐하면, 한종선 님은 말과 글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도 수동적인 피해자로 함몰되지 않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더욱 굳건하게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종선 님이 앞으로도 한국사회 안에서 능동적인 주체로서 굳건하게 버텨나간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결코 형제복지원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형제복지원 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1인 시위 중인 한종선 님의 모습,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들이 2015년 4월 28일 오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촉구 삭발식을 하는 모습, ⓒ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지 28년이 지났지만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과 형제복지원의 만행을 지원하고 묵인한 국가에 관한 진상규명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하루라도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만큼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의 명예회복과 공식적인 보상 및 생활지원, 의료지원도 지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올해 4월에 형제복지원 피해자, 생존자, 실종자, 유가족은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삭발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어디까지 진전되어 있을까. 뉴스를 확인해보니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이 작년에 대표발의 한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은 현재 안행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아직 제정되지 못했다. 과연 다가올 9월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다뤄질 수 있을까. 사회적 합의가 높은 수준으로 이뤄졌던 세월호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까지 갖은 진통을 겼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반드시 제정되어야만 한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이 헌법의 바깥에서 겪었던 억압과 고통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에게서 그치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무한히 옮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국사회 위에 서 있는 우리와 미래 세대에게도 매우 중대한 문제다. 그러니 우리 모두 국회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해서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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