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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환영인사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제 10주 정도 되었노라고. 팀장님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팀장님의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 아...예정일은 언제고? 그럼 언제 쉬러 들어가냐?" 느낄 수 있었다. 업무공백이 생긴다는 것. 관리자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끝끝내 "축하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 이혜린
  • 입력 2015.08.03 07:16
  • 수정 2016.08.03 14:12

[달려, 엄마] 두번째 이야기 | 쓰라린 환영인사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제 10주 정도 되었노라고.

팀장님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팀장님의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 아...예정일은 언제고? 그럼 언제 쉬러 들어가냐?"

느낄 수 있었다. 업무공백이 생긴다는 것. 관리자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끝끝내 "축하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누구보다도 나의 직장생활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팀장님한테 들어야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축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심성이 나쁘거나 잘못된 사람은 아니니 그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막상 출산을 하는 여직원이 생기니 당장 코앞에 닥친 일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더군다나 불경기로 인한 회사 상황이 녹록지 않았으니 더욱 난처했을 테지.

"그럼, 삼개월만 쉬고 나오지?"

그러겠노라고 했다.

1년은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그래서 육아휴직을 꼭 쓰고 싶어도 일단은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래, 오래 쉬어봐야 좋을 거 없어. 괜히 잡생각만 든다고.

회사상황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말야.

예전에는 삼개월도 못 쉬었는데 세상 좋아졌지"

암묵적 강요. 삼개월 자리를 비워주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주는 거라는

이상한 생색내기. 분명 법이 나에게 휴가를 주었는데

마치 내가 너를 보내주는 거라는 그 생색내기식의 말이 불편했다.

이윽고 나는 변명을 늘어놓듯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지장이 가지 않을 것이며

출산 전까지 모두 마무리를 하고 갈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늘어놓았다.

일에 미쳐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냈었다.

간혹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연차에 비해서 맡은 업무도 꽤나 많았었다.

내가 얼마만큼 회사에 쓸모 있는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받는 밥값 정도는 해내고 있다고 항상 믿고 있었다.

연차도 휴가도 편히 쓰지 못했다.

생리휴가조차 쓸 수 없는 분위기의 회사라 정말 아픈 날에도

점심시간에 주사만 대충 맞고 그렇게 오만눈치를 다 보며 일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여자라서 호의 바라고 그러는 거 싫으니까

남자직원처럼 아니 가끔은 그보다 더 복종하며 지내왔다.

피해주지 말자. 다른사람에게 일로 피해주지 말자.

내가 더 불편해도 그냥 내가 하자.

그렇게 4년을 큰 사고 없이 자리를 지켜내왔는데

지난 과거는 모두 사라지고

임신과 동시에 민폐녀가 된 것이다.

계약직인 친구는 임신사실을 털어놓고 퇴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재계약이 안 될거라는 걸 직감했다고 했다.

자기보다 어리고 일을 배우고 싶어하는 또 다른 계약직들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데

계약을 연장해주거나 내가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계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는 임신사실을 털어놓으며

앞으로 본인의 임신이 회사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필하게 위해

업무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기껏 키워 놓으니 애 낳으러 들어가버리고

참 여직원들 데리고 있기 힘들어 라는 이야기.

일이라는 건 말야 연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리를 비우면 감이 떨어진다는 헛소리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 않는가.

우리 대한민국의 조직사회가 그리고 우리들이 해내는 일이

잠깐이라도 뒤떨어지면 살아남기 힘들 만큼 창의적이고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과거와 관습을 답습하는 너무나도 관료적이며 누구나도 그 자리에서 몇 달이면 금방 배울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걸.

내가 그곳을 몇 년을 떠나있는다고 하더라도 회사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이

혁신하는 척만하면 그런 일들을 해내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해가 달라지지만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 그런 쳇바퀴같은 일들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면서

연속성과 감을 이야기하며 우리들을 밀어낸다.

이제, 겨우 자리 잡고 있을 뿐인데.

이제야 무언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과정인 사회초년생 여자들의 임신에

세상은 너무나도 야박하며 생각보다 그다지 축복 받지 못할 일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그랬다. 회사의 입장에서 임신녀들은 막 부리기에는 애매한 언제 회사를 그만둬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거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아이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임신했으니 호의를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있었지만 세상은 다르게 돌아갔다.

나를 여집합으로 남겨둔 채, 나는 임신을 함과 동시에 회사에서 멈춰버렸다.

미디어는 이야기한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낳으라고.

나도 그랬다. 아이를 낳는 건 애국하는 거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서 올바르게 키우는 거라고.

하지만 정작 내 미래도 장밋빛이 아닌데

누구의 미래를 위한 출산장려인가.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까지 헛헛함이 몰려오는데도

우리는 출산장려의 핑크빛 이미지만 열심히 주입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임신 초기의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화장실 변기에서 가방을 껴안고 5분간의 쪽잠을 잔 후

내 꼴이 우스워 못내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 작가의 실시간 육아일기는 www.facebook.com/nimothe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이야기 : 아이는 누가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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