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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양 한인이다" | 스칸디나비아 입양 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

25년 동안 그는 자신의 외모가 부모와 친구들과는 다르지만 자신이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파란 눈에 금발이었지만 미켈은 그만의 독특한 까만 눈과 머리를 가졌다. 생모를 만나고 난 뒤 미켈은 한국인이라는 것, 덴마크에 있는 한국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는 '두 의자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덴마크에는 그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입양 한인들과 그들의 커뮤니티가 있다.

  • 박소윤
  • 입력 2015.07.30 05:40
  • 수정 2016.07.30 14:12

작년에 유럽 대학 교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문두스(Erasmus Mundus) 저널리즘 석사 과정에 합격해, 나는 급우들과 함께 덴마크로 파견되었다. 덴마크에서 나는 아시아인처럼 보이는 덴마크인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한국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대로 그는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스칸디나비아에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스웨덴 친구들을 통해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내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 덕택에 나는 스칸디나비아의 입양 한인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입양아로서의 자신의 경험, 한국에서 자신의 생모를 만나고 난 뒤의 인상과 생각을 나와 기꺼이 공유해줬다. 코펜하겐 대학 근처의 북 카페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입양 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스칸디나비아의 입양 한인들이 주목 받아야 하는 이유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입양되지 않은 한국인들, 즉, 당신과 나의 주목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기사 속에 들어 있다!

홀트 대구 종합 사회 복지관의 어두침침한 방에서 20대 남성과 50대 여성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 사이에는 홀트 아동 복지회 소속임을 알리는 이름표를 단 직원이 앉아 있다. 홀트 아동 복지회는 가장 규모가 큰 국제 입양 알선 기관 중 하나다. 남성은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모국어인 덴마크어를 섞어가며 말한다. 여성은 홀트 직원이 그의 말을 한국어로 통역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멀리서 보면 한국인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로 보일 것이다. 여성은 그에게 그를 닮은 여자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물과 그의 눈에 떠오른 혼란스러운 빛이 겹친다.

이 일화는 미켈 룬 아너선(28세)이 처음으로 그의 생모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한국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5개월 후에 덴마크 부부에게 입양되어 덴마크 실케보르에서 자랐다. 25년 동안 그는 자신의 외모가 부모와 친구들과는 다르지만 자신이 덴마크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파란 눈에 금발이었지만 미켈은 그만의 독특한 까만 눈과 머리를 가졌다. 2012년에 그는 올보르 대학에서 국제 학생 자원 봉사를 하다 한국에서 온 교환 학생들을 만나서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커졌고,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찾아가 보게 되었다. 한국에 다녀온 그는 정체성 갈등을 겪으며 자기가 진짜 누구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열린 전세계 입양 한인들의 여름 캠프에 참석한 후에 그는 입양아라는 자신의 개인적 입장과 생모의 나이를 고려해 생모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생모를 만나고 난 뒤 미켈은 한국인이라는 것, 덴마크에 있는 한국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는 '두 의자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덴마크에는 그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입양 한인들과 그들의 커뮤니티가 있다.

'고아 수출국' 한국

1955년, 미국인 부부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는 한국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한국인 고아 8명을 입양한다. 다음해에 그들은 입양은 사랑의 깃발이지 수치의 표식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성을 딴 홀트 아동 복지회를 설립한다. 그 이후 20만 명이 넘는 한국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다.

홀트 부부가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 여덟 명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진: 홀트 아동 복지원)

한국 아기들이 나라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많았다. 한국의 해외 입양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너무나 많은 고아들을 남긴 한국 전쟁 때문이었다. 1961년에 특별 입양법이 통과되었고, 한국에는 사설 입양 알선 기관이 네 개 설립되며 '한국의 효율적인 아기 입양 시스템'이 생겼다. 한국의 아기 수출이 서방 매체에 의해 비난 받기 시작한 1988년 서울 올림픽 이래 한국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은 해외 입양되는 아이들의 수를 줄이기 위한 법들을 제정하고 개정했으며, 입양 한인들을 지원하려는 노력도 보였다. 입양아의 수가 줄기는 했지만, 한국의 국제 입양 절차가 법적으로 승인된 2013년 이후 입양아의 수는 다시 늘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2014년에 해외로 입양된 한국 아기는 535명이다. 지금까지 한국 아기들이 해외로 입양되는 이유는 아기가 장애가 있어서, 생부모가 가난하거나 딸이 아닌 아들을 원해서(요즘은 덜하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남아를 선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모가 미혼(싱글 맘)이어서, 또 낙태가 한국에서는 제한적이어서였다. 입양 알선 업체에 들어오는 돈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2011년에 아기 한 명 당 38,000달러 정도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총 2,700만 달러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주요 아기 수출국 중 하나이고, 일반 한국인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무시하고 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입양 한인

해외 입양된 아기들 중 3분의 2는 미국으로 간다. 활동가이자 작가인, 유명한 입양 한인 제인 정 트렌카의 말에 의하면 남한은 아메리칸 드림을 믿으며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해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입양 한인 이슈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의 세 국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유럽으로 입양된 한국인들은 주목을 덜 받아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의 입양 한인들을 보며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볼 때, 미국 다음으로 한국 아기를 많이 입양한 곳은 스칸디나비아다. 세 나라를 합치면 25,000명 정도로, 스웨덴에 1만명, 덴마크에 9천명, 노르웨이에 6천명이 입양되었다.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토비아스 휴비네테에 의하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해외 입양아 중 한국인이 절반을, 스웨덴에서는 5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한다. 한국인 이민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입양 한인이 스칸디나비아의 한민족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에 입양 한인이 많은 이유는 다양할 수 있으며, 학문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다. 그러나 스웨덴 대사관의 프레드리카 오른브란트는 스웨덴 사회에 60년대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사회 복지가 미혼모들이 아이를 포기하고 입양 보내지 않아도 될 길을 열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스웨덴 국내 입양은 극적으로 감소했고, 입양을 원하는 가족들은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야 했다. 한국 아기의 입양은 50년대 말에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급국인 한국에서 수요국인 스웨덴으로 국제 입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도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정부들에 의한 공식 인종 비율 기록은 없으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비해 인종적 다양성이 훨씬 낮다. 문화적 맥락에서 이 국가들에서 입양된 한국인들의 삶은 어떨까, 그들이 자신과 백인 부모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까 하는 질문이 이어지게 된다. 이 글을 위해 스칸디나비아의 입양 한인 10명과 인터뷰한 결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반은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아무 의문을 갖지 않았고 절반은 의문을 품었다. 주목할 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는 입양 한인들은 자발적으로 비슷한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입양 한인 커뮤니티를 말이다. 세계 최초의 입양 한인 커뮤니티는 아이러닉하게도 이민자들도 구성된 다인종 국가 미국이 아닌 민족성과 인종에 대한 논의가 드문 스칸디나비아에서 생겨났다.

최초의 입양 한인 협회가 스칸디나비아에서 설립되다

최초의 입양 한인 협회인 AKF(Adopterade Koreaners Förening)는 1986년에 스웨덴에서 생겼다. 이를 필두로 90년대 초반에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Korea Klubben이 생겼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관련 단체들이 생겨났다. 미국 입양 한인 협회는 90년대 후반에 생겼다. 그저 입양 한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스웨덴의 마티아스 톄데르 등의 젊은 입양 한인들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AKF의 초기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생부모를 찾고 싶은 열망과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후에 결합됐다. 휴비네테에 의하면 여기에 거의 모든 인구층이 협회를 조직한다는 스칸디나비아의 오랜 전통인 시민 사회 운동과 합쳐져 최초의 입양 한인 커뮤니티인 AKF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의 탄생과 같은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AKF뿐 아니라 다른 입양 한인 커뮤니티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기에는 AKF 회원들은 편지와 전화로 소통했다고 하지만, 회원 수가 예상보다 빨리 불어나, 창립 멤버들은 개인 전화선을 설치해야 했다. 현재 AKF 회원은 1천명이 넘지만 환경은 예전보다 훨씬 수월하다. 회원들은 인터넷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오프라인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경험했던, 혹은 지금도 겪고 있는 정체성 갈등을 공유하며 그들은 함께 한국인과 스칸디나비아인 사이에 있는 입양 한인이라는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한국인도 스웨덴인도 아닌, 입양 한인

입양 한인들이 정체성 갈등을 겪기 시작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몇몇은 거울 속의 자신과 실제 자기를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찌감치 혼란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그들이 입양된 형제 자매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양부모에게 자신의 뿌리에 대해 묻는 것이 양부모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입양 한인들이 한국에 여행을 다녀온 뒤, 한국인이나 한국 문화를 접하고 나서, 부모가 되고 나서 정체성 갈등을 느꼈다고 말하는 경우는 흔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설명해 줄 해답을 찾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입양 한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자신의 '한국적인 면'을 발견한다. 그중에서는 벌써 답을 찾아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덴마크 부부에게 입양된 한인 아티스트인 에바 틴드의 아트워크에서 볼 수 있듯, 그 정체성은 한국인도 스칸디나비아인도 아닌, '스칸디나비아의 입양 한인'이다.

덴마크 부부에게 입양된 한국인인 에바 틴드의 책 'DO'에 실린 사진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소속감과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방법을 탐구한다. Source: Eva Tind homepage http://www.evatind.dk/

국제 입양 한인 협회IKAA(International Korean Adoptee Associations)의 부회장이자 AKF의 전임 회장인 다니엘 리는 입양 한인 커뮤니티가 없었다면 'KAD(Korean Adoptee)'라는 해외 입양된 한인들의 정체성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이유가 KAD는 '확실히 집단에 기반한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만약 스웨덴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당신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정체성을 발달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입양 한인들이 KAD를 알고 KAD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리에 의하면 입양 한인 커뮤니티에 관계하는데 있어 네 가지 종류의 입양 한인이 있다고 한다. '방문자' 타입의 입양 한인들은 호기심에 KAD 커뮤니티를 찾았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거주자' 타입의 입양 한인들은 그저 가끔 다른 KAD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할 뿐이다. '이상가'와 '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KAD 정체성을 지지한다. 주로 커뮤니티 내의 이슈에 집중하는 '이상가'들과는 달리, '운동가'들은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 로비스트, 정책입안자들 등 외부 인물들과 손을 잡고 자신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퍼뜨린다.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입양 한인들과 협력하며, KAD 행동가들과 커뮤니티들은 세계적으로 '입양 한인 운동'이라 불리는 것을 주도해왔다. 정기적으로 만나서 KAD들이 조직하는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이다.

입양 한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

지금까지 미켈은 일부 입양 한인들이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는 전혀 겪어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일부 입양 한인들은 생모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입양 서류에 나온 정보가 부정확해서 몇 번이나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켈은 별 문제 없이 생모를 만날 수 있었다. 재외 동포 관련 법에 입양 한인들도 포함해 달라는 세계 해외 입양아 링크(Global Overseas Adoptees' Link. 줄여서 'G.O.A.'L'이라고 함)의 로비 덕택에, 그는 입양 한인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F-4 비자로 한국에 몇 번 다녀갔다. 그가 원한다면 올해부터는 한국 이중 국적도 신청할 수 있다. 덴마크 정부가 2014년 말에 이중 국적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켈은 과연 이번에도 지금까지 그랬듯 운이 좋을까 하고 의문을 품는다.

작년부터 그는 자신의 한국적인 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은 망설이고 있기도 하다. 그 주된 원인은 한국 사회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는 미혼모와 싱글 맘, 고아, 입양 한인 등 사회적 소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 KAD가 쉬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에 법은 바뀌고 있지만, 입양 이슈에 대한 한국인들의 변함없는 냉담함과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낙인 때문에 KAD들은 실망하고 있다. "입양에 관한 모든 이슈가 입양을 하는 나라가 아닌 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간과되고 있다. 우리가 진정 논의해야 할 것은 베이비 박스, 한국의 싱글 맘들이 겪는 열악한 조건,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이다. 거기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필요하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라고 리가 말했다. KAD들은 벌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한국인들이 움직일 차례다.

당신이 스칸디나비아에 가본 적 있는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 3개국에서 입양 한인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스칸디나비아 사회에 동화된 것으로 보이는 아시아인을 발견한다면 그는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일 것이다.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을 이웃으로 둔 스칸디나비아인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입양 한인들끼리 결혼해서 낳은 아들 딸들, 입양 한인 2세도 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는 100% 한국인이지만 전혀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양되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과거의 나 자신을 포함해 입양되지 않은 한국인들(쉽게 말해서 그냥 '한국인들') 중 해외 입양과 그 결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입양된 한국 아기들은 이제 성장해 한국 사회와 세계에 자신들의 삶, 해외 입양 그리고 싱글 맘과 가난한 부모를 지원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게 의무라고 느꼈다. 이들의 이야기는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다.

* 이 글은 필자가 영어로 쓴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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