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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래군씨

몇몇 보수언론에서는 박래군 선배가 가는 곳마다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다고 매도하고 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제도와 법이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 국가와 정부가 보호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내몰리고 있는 현장에는 항상, 주판알을 튕기는 일에 밝지 않은 그가 있었다고 말해야 옳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국가에 의해 삶의 터전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날 지경에 놓인 평택 대추리 주민들 곁에,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가 폭도로 내몰리고 결국 죽어서 내려온 용산 주민들 곁에, '종북'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혀 '내란죄'라는 마녀사냥에 내몰린 소수당의 당원들 곁에,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들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선 세월호 가족들의 비탄과 한숨 곁에 늘 그가 있었다.

  • 이태호
  • 입력 2015.07.28 08:08
  • 수정 2016.07.28 14:12
ⓒ한겨레

래군이 형과 김혜진에게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밤, 우리는 416연대 사무실에서 밤이 깊도록 함께 있었다. 그리 비장한 분위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둘의 구속이 확정될 경우 우리가 나눠져야 할 일감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간간히 싱거운 농담도 주고받았다.

"인권운동 30년? 헛살았구만! 형은 도대체 그동안 뭘 했길래 대한민국 인권이 아직 이 지경이야? 책임이 크네 커! 감옥 갈만해"

"허허 그러게. 정말 미안하다 태호야! 근데 짜샤, 넌 참여연대에 20년이나 있으면서 대체 뭘 했길래 검찰이 나같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잡아가게 하냐?"

"헤헤헤... 맞네 맞아! 근데 말은 바로 하자구. 형은 법이 없어야만 살겠어! 보니깐 형은 정권 바뀔 때마다 한 번씩은 꼭 감방에 가는구만! 정기적으로 교정행정 감시하러 가나 봐? 과연 인권운동가야!"

"진짜 정권마다 한 번씩은 가게 되네. 쩝!... 하여간 내가 가서 보고서 써 올 동안 넌 내 대신 열심히 일해라 잉? 놀지 말고!"

이틀 뒤인 제헌절, 그는 결국 구속되었다.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란다. 검찰은 세월호 추모 집회에서 발생한 물리적 충돌을 문제 삼아 그가 폭력행위를 주도했다고 단정했지만, 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법원은 결국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같은 날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판결을 유보하고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선거법 위반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했다. 속이 상했다.

제헌절 날 그에게 상은 못줄지언정 특수 공무집행 방해죄로 잡아넣다니, 도대체 그로 인해 정부의 공적업무 수행에 얼마나 특별한 방해가 가해졌다는 건가. 지난 한 세대 이상을 이 나라 검찰과 경찰이 제대로 다하지 못한 인권보호의 공적 의무를 대신해 온 인권운동가에게 너무 치사하고 악의적인 죄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에 쥐꼬리만큼이라도 헌법정신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정권의 방패막이를 자처해온 검찰이나 경찰이 아니라 박래군과 인권운동가들이 온 몸을 던져 숱한 불의에 맞서왔기 때문일 터이다.

새 천년을 맞던 2001년 벽두, 영하 10도의 눈바람이 몰아치는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박래군은 인권활동가들과 2주간의 노숙단식농성을 강행했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서였다. 그때 얼굴과 손발에 동상을 입어 형은 아직도 매년 겨울마다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그의 몸과 마음은 항상 '성문 밖'을 향했다. 그는 늘 이 나라 공권력이 결코 지켜주지 못했고 도리어 핍박해온, 빼앗기고 내몰린 이들이 고통받는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기를 원했다. 그 결과, 4번의 구속이라는 기록을 훈장처럼 달게 되었다.

몇몇 보수언론에서는 박래군 선배가 가는 곳마다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다고 매도하고 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제도와 법이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 국가와 정부가 보호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내몰리고 있는 현장에는 항상, 주판알을 튕기는 일에 밝지 않은 그가 있었다고 말해야 옳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국가에 의해 삶의 터전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날 지경에 놓인 평택 대추리 주민들 곁에,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가 폭도로 내몰리고 결국 죽어서 내려온 용산 주민들 곁에, '종북'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혀 '내란죄'라는 마녀사냥에 내몰린 소수당의 당원들 곁에,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들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리로 나선 세월호 가족들의 비탄과 한숨 곁에 늘 그가 있었다. 곡학아세하는 자들은 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비난하고 매도한다. 그 비난과 매도가 너무나 혹독해서 아무도 차마 달을 가리킬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 영악하지 못한 그는 언제나 흔연히 앞으로 나가 외친다. 저길 보라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계산에 밝지 못하기로는 래군 형수도 못지않을 듯싶다. 박래군, 김혜진,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주요 간부들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던 5월 어느 날, 형수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형수는 이렇게 물어왔다.

"저기, 박래군 씨한테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는데요, 이번에도 용산 때처럼 검거를 피해 명동성당 같은 데서 지내야 할까요?

"아니요. 조사에 응하고, 잡아가면 잡혀가야죠. 도피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용산 때는 가족들이 폭도로 매도당하던 상황에서 대책위 간부들이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 싸우기로 했던,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어요."

"다행이네요. 꼭 그랬으면 해요. 박래군 씨가 워낙 몸이 안 좋아서 도피생활은 무리거든요. 박래군 씨한테는 내가 전화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주세요."

그 날 난 형수에게 구속되지 않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었다. 그런데 형은 구속되고 난 여기 남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박래군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 버스로 향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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