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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패션 하우스가 축조한 아름다움의 여정 '디올 정신'

'미의 화신'으로 불리던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실제 입었던 한 드레스는 허리 굴곡에 꼭 맞는 멋진 라인을 자랑했는데 그 허리춤은 완전한 리본 모양으로 묶었더랬다. 게다가 리본 위에는 한 송이 꽃을 예쁘게 붙여놨는데 이 장면을 보자마자 뇌리를 스친 단어는 기묘하게도 '선물'이었다. 옷을 입은 마네킹이 마치 남성을 위한 근사한 선물처럼 다가올 때의 그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머리가 쭈뼛했기에 동행자의 비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 전종현
  • 입력 2015.07.31 13:17
  • 수정 2016.07.31 14:12

"평소 '미스 디올(Miss Dior)' 홍보 영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전시를 보고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어요."

럭셔리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Christian Dior)의 기획으로 지난 6월 29일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에스프리 디올-디올 정신(이하 디올 정신)> 전시에 동행한 사람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개인적으로 디올 꾸뛰르의 매혹에 빠져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그 대비는 더욱 컸다.

"전시 이름이 왜 '디올 정신'인지도 이제 알겠네요. 이건 고칠 수 없는 브랜드의 숙명 같은 거에요. 남자가 원하는 여성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요."

그렇다. 사실 스스로도 전시 구석 구석마다 발견한 점이다. 특히 '미의 화신'으로 불리던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실제 입었던 한 드레스는 허리 굴곡에 꼭 맞는 멋진 라인을 자랑했는데 그 허리춤은 완전한 리본 모양으로 묶었더랬다. 게다가 리본 위에는 한 송이 꽃을 예쁘게 붙여놨는데 이 장면을 보자마자 뇌리를 스친 단어는 기묘하게도 '선물'이었다. 옷을 입은 마네킹이 마치 남성을 위한 근사한 선물처럼 다가올 때의 그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머리가 쭈뼛했기에 동행자의 비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디올 정신'의 근간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옳고 그름을 도마 위에 올리는 건 지양하고 싶다. 이번 전시가 준 가장 명징한 인상은 한 브랜드가 근 70년간 존속하며 추구했던 미에 대한 열정을 유지, 발전, 진화한 '꾸준함'과 그 흐름을 내보이는 '당당함'이였기 때문이다.

사상 처음으로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디자이너, 뉴 룩(New Look)의 창시자. 디자이너로 활동한 시간은 10년에 불과하지만 이후 20세기 패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존재가 된 이가 바로 크리스챤 디올이다. 그가 추구한 패션은 여성을 위한 가장 작은 건축이었고, 여성을 아름답고 당당하게 만드는 마법의 언어이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촉매와도 같았다.

<디올 정신>은 "나의 꿈은 여성들을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라는 디올의 고백을 지침 삼아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구축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여정을 떠나는 한 편의 황홀한 블록버스터 영화다. 크게 '파리', '디올과 예술가 친구들', '디올 가든', '디올 얼루어', '디올 아뜰리에', '미스 디올', '핑크에서 레드로', '베르사유: 트리아농', '디올의 스타들', '쟈도르' 등 10개의 섹션으로 꾸민 전시는 매 공간마다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각 테마에 맞춘 드레스, 향수, 액세서리, 사진과 각종 기록물은 꾸뛰르 하우스의 독자적인 초상을 구성했다. 형태와 색채가 제 자리를 찾아 하나의 오브제로 굳건히 존재감을 발산하는 수많은 컬렉션들, 럭셔리 브랜드가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세련된 디스플레이 방식, 더불어 서도호, 이불, 박기원 등 한국 아티스트 6명이 디올을 위해 맞춤 제작한 설치 작업이 서로 혼융하며 만들어내는 임팩트는 사뭇 대단했다. 무료 전시라는 사실이 약간 미안할 정도였다.

<디올 정신>은 루이 비통, 샤넬, 에르메스 등 가방으로 익숙한 다른 럭셔리 브랜드에 비해 대중과의 접점이 약했던 크리스챤 디올이 보유한 미적 자산과 그 묘미를 흠뻑 경험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얼마 전 크리스챤 디올은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 '하우스 오브 디올'을 새로 오픈했다. 프리츠커 상을 받은 건축가 크리스챤 드 포르잠파르크(Christian de Portzamparc)가 설계를 맡은 건물은 꽃봉오리를 겹친 듯 독특한 외관과 더불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디올 매장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더불어 대규모 기획전까지 여는 행보를 보면 한국을 대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태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걸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요즈음 샤넬, 루이 비통 등 타 브랜드의 기획 전시가 연이어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전시를 통해 그들이 쌓아온 헤리티지와 그 방법론을 손쉽게 흡수하는 기회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마치 투명인간처럼 소외된 한 디자이너의 존재다. 지난 1997년부터 2011년까지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아 천재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뽐내다 유대인 비하 발언으로 퇴출당한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말이다. 창립자 크리스챤 디올과 현 수석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Raf Simons)의 연결 고리를 계속 강조하는 전시 영상과 소개 글이 무색하게도 <디올 정신>을 빛낸 작업의 상당수에는 그의 땀이 깊게 배어있었다. 갈리아노가 크리스챤 디올에서 성취한 독특한 생명력에 듬뿍 취했다가도 이제 더는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일종의 상실감이 고조되곤 했다.

<디올 정신>은 패션에 관심이 없더라도 디자이너라면 한 번 찾아가 보길 권한다. 오랜 기간 여성의 아름다움을 축조한 브랜드에 대한 예우로는 무척 간단한 일이테니 말이다. 이번 전시는 8월 25일까지 DDP에서 계속된다.

thedesigncrack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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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RIT DIOR-디올 정신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이 1947년부터 쌓아온 유산을 10가지 테마로 풀었다. '파리', '디올과 예술가 친구들', '디올 가든', '디올 얼루어', '디올 아뜰리에', '미스 디올', '핑크에서 레드로', '베르사유: 트리아농', '디올의 스타들', '쟈도르' 등 각 테마에 맞춰 드레스, 향수, 액세서리. 사진과 각종 기록물은 꾸뛰르 하우스의 독자적인 초상을 구성한다. 서도호, 이불, 김혜련, 김동유, 박기원, 박선기까지 총 6명의 한국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 작업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기간: 2015년 6월 20일-2015년 8월 2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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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08월호 'Culture'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www.ca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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