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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고 방황한다면, 인생은 이호준처럼

두 다리가 욱신거렸다. 187㎝의 큰 키로 긴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가 버거웠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큰 목소리로 거듭 외치면서도 눈은 계속 현관문을 주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문이 열렸다. 2군 감독은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 돈으로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에 ○요일에 돌아와라.”

그의 나이 갓 열아홉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라는 살벌한 세계, 그것도 위계질서가 가장 엄격하다는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에서 그는 끝 모를 방황을 이어갔다. 숙소에서 도망친 것만 수차례. 하지만 현역 경찰이던 아버지의 감시망을 뚫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잠적해도 귀신같이 찾아냈다.” 한달 동안 친구 집에서 칩거하다가 밖으로 나온 첫날 붙잡힌 적도 있었다. 그때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도망을 다니면서 관두고 싶던 프로야구를 20년 넘게 하면서 300개 이상의 홈런(역대 8번째)을 쏘아 올리게 될지. 2015 프로야구 유일의 22년차 베테랑 이호준(40) 얘기다. 올 시즌 프로야구 등록 선수들 중 1994년 데뷔한 이는 이호준뿐. 프로야구 선수 등록 최다 연차 기록은 2013년 말 프로 23년차 때 은퇴한 박경완이 보유중이다. 내년이면 그도 23년차가 된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었던 해태 마운드

‘야구는 이종범처럼, 인생은 이호준처럼.’ 최근 야구팬들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다. 오죽하면 마산 시내에서 그와 마주치는 꼬마 야구팬들까지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며 큰 소리로 외칠까.

사실 ‘인생은 이호준처럼’은 다소 조롱 섞인 말이었다. 에스케이 와이번스 시절 가장 필요로 할 때 좋은 성적을 내 대박 계약을 하고는 정작 계약 이후에는 부진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2007시즌에 데뷔 최고 타율(0.313)을 기록하며 4년 34억원의 대박 계약을 이끌어냈던 그는 계약 첫해 단 8경기(25타수 5안타 0홈런 2타점)에만 출전하는 등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시즌 성적이 타율 0.272, 38홈런(시즌 평균 9.5개) 165타점(시즌 평균 41.25점)에 머물렀다. ‘34억원’이라는 몸값에 턱없이 부족한 성적이었으나 소속팀인 에스케이가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승승장구하며 그의 부진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두번째 에프에이 계약을 앞둔 2012년에 그는 극적으로 반등했다. 3할(0.300) 고지를 다시 밟으며 총액 3년 20억원에 신생팀 엔씨(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성적에 부침이 있었음에도 에프에이 직전 해의 성적을 바탕으로 이뤄낸 두번의 대박 계약으로 그가 손에 쥔 돈은 54억원. 게다가 비행기 승무원 출신 미모의 아내까지 옆에 있으니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엔씨에서 이호준은 팀 맏형으로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신생팀의 어린 선수들을 다독이면서 팀 분위기를 잡아가는 든든한 가장 역할을 해냈다. 팀 중심타자의 역할도 훌륭히 수행해내며 지난해 엔씨가 팀 창단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밑돌을 놨다. 엔씨 팬들이 그를 ‘호부지’(이호준+아부지)라고 부르고 팀 동료 에릭 테임즈가 “대단한 클러치 능력과 열정을 가진 훌륭한 리더”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이유다. ‘인생은 이호준처럼’은 이제 다분히 운이 좋았던 삶이 아니라 성공적인 삶의 다른 말이 됐다. 엔씨 구단은 작년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로 마케팅을 벌이기도 했다. 이호준은 “가끔 40대 마산 아재들이 내 손을 부여잡고 ‘당신 때문에 활력을 되찾는다’고 말한다.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말을 듣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좋다”고 했다. 사실 그의 인생을 현미경으로 오롯이 들여다보면 단지 ‘운’만으로 치부될 수는 없는 삶이 있다. 그 또한 젊은 시절 누구 못지않게 심한 방황을 했고 전성기 즈음 터진 병역 문제로 최대 위기도 겪었다. 무릎 수술도 두차례나 했다. 야구만큼이나 그의 인생도 참 치열했다.

8경기 12⅓이닝 16피안타(7피홈런) 8볼넷 14실점. 이호준의 데뷔 첫해 성적이다. 정신없이 얻어맞았고 보크도 한번 기록했다.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투수로 데뷔한 그는 주로 패전 마무리로 기용되고는 했다.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이대진 등의 선발진에 마무리 투수 선동열이 버틴 당시 해태 마운드는 막강했다. 열아홉살 고졸 투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래도 김응룡 당시 해태 감독은 시속 140㎞대의 빠른 공을 보유한 그에게 1군 등판 기회를 여러차례 줬다. 당시 해태 2군 사령탑이던 김성근 감독(현 한화 이글스 감독) 또한 “투수 자질이 보였던” 이호준에게 애정을 쏟았다. 이호준은 “김성근 감독님은 그때 도망갔다가 잡혀온 나에게 용돈도 주시고 숙소 방에 따로 불러 일본 야구 비디오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어깨가 아프다고 하니 봉침도 맞게 해주셨다”고 밝혔다.

두 감독의 관심과는 달리 이호준은 엇나갔다. 어떤 날은 경기 도중 더그아웃에서 짐을 싸서 야구장 뒷문으로 도망간 적도 있었다. “경기 초반 7~8점 차이로 뒤지면서 코칭스태프가 몸 풀 준비를 하라고 지시할 것 같아서”였다. 패전 전문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게 진짜 싫었다. 야구장 앞까지 왔다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어린’ 이호준에 대한 김성근 감독의 첫 기억도 “그때는 도망만 다녔다”니까 당시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이호준은 그때 왜 그랬을까. “성격이나 체질상 투수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타격 연습은 아무리 해도 안 힘들었는데 투구 연습은 아니었다. 체질상 달리기를 싫어하는데 투수 파트는 달리기도 많이 시켰다. 이대진 선배가 옆에서 ‘이런 것 저런 것 다 거치면서 이겨내야 한다’고 충고도 해주고 그랬는데 그때는 전혀 귀에 안 들어왔다. 무엇보다 패전으로 기용되는 게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고졸 신인으로 1군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참 모자랐던 것 같다.”

타자로 전환한 뒤에는 도망 안 가

이호준과 함께 같은 팀에서 현역 선수로 뛰었던 이순철 <에스비에스> 야구해설위원은 “고교 졸업 뒤 투수로 왔는데 기존 투수들이 워낙 쟁쟁해서 더 기를 못 펴고 있었다. 팀내 위계질서도 심했고 아버지 또한 굉장히 엄하신 분이라 본인도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데뷔 1년 만에 타자로 전향했으니 어린 마음에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나 같은 해태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이종범 <엠비시스포츠플러스> 야구해설위원은 “투수로 들어왔는데 투수력이 너무 세니까 이호준이 처음에는 운동에 집중을 못하고 배회를 조금 했다. 그래도 타자로 전향하면서부터는 운동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당시만 보면 운동을 이렇게 오래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호준은 “스무살 전후에 내 야구 인생 최고의 방황기를 겪었다. 당시 아버지나 코칭스태프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며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치는 후배들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당사자가 얼마나 야구에 질려 있는지 경험상 잘 알기 때문에 대화도 잘 통한다”며 웃었다.

극심한 성장통을 겪고 타자로 변신한 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본인 스스로도 “타자 전환 뒤에는 도망을 안 갔다”고 했다. 타자로 치른 첫 실전 경기에서 홈런 두 방을 친 것도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이호준은 98년 처음 규정타석을 채운 뒤 2000년 6월 신생팀인 에스케이로 트레이드되면서 붙박이 주전을 꿰찼다. 2003년에는 36홈런(부문 4위)을 때려냈고 2004년에는 생애 첫 타점왕(112개)도 차지했다. 이종범 해설위원은 “에스케이로 이적하면서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고향 팀이 아니니까 운동을 잘해야만 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이순철 해설위원은 “아마 타이거즈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성장 과정이 굉장히 더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생팀에서 마음껏 자신의 야구를 해나간 것 같다”고 분석했다.

2004년 말 프로야구를 휩쓴 병역비리에 연루되며 절정의 상승세가 꺾인 이호준은 2007년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으나 2012년 초 또다시 위기를 겪었다. 경기 출장 시간이 줄어들면서 은퇴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그를 붙잡아준 이는 그의 아내, 홍연실씨였다. “경기 끝나고 아내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왜 당신이 핑계를 대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지금까지 그런 야구를 제일 싫어했으면서 당신이 지금 그런 야구를 하고 있지 않으냐’고 하더라. 처음에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남 핑계만 대면서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는데 정작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 뒤부터 마음을 비우고 한 경기, 한 타석에만 집중하다 보니 시즌 막판에 타율 3할이 돼 있었다.”

불혹의 나이를 맞은 올해, 이호준은 젊은 선수들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23일 현재 타율 0.309, 16홈런 79타점으로 3년 연속 20홈런은 물론이고 타점왕에 오른 2004년 이후 11년 만에 세자릿수 타점도 가시권에 뒀다. 이호준은 “몸쪽 공에 약해서 몸쪽 공에 대처하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올 시즌 이호준의 ‘한 방’에 번번이 당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은 “(이호준이) 갈수록 야구가 는다. 야구 자체의 스케일이 커졌고 노림수나 콘택트 부분이 많이 좋아졌다”며 “팀내 자기 위치를 잘 인지하면서 꼭 필요할 때 쳐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호준의 올해 한화전 성적은 32타수 15안타(0.469) 4홈런 12타점에 이른다. 김 감독은 “해태에서 처음 봤을 때도 이대진과 함께 타격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래도 참 많이 성장했고 그 나이에 그만큼 하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팀 리더로서의 면모에 대해서도 “에스케이 시절에도 리더 역할은 했었는데 지금은 행동으로 더 보여주는 듯하다. 여러모로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평했다.

“오로지 오늘 내일의 경기만 생각한다”

이종범 해설위원은 “의외로 나이가 들어서 스윙 메커니즘이 좋아졌다. 변화구 찬스 때 어떤 공이 들어올 것이라고 대기 타석에서 미리 생각하고 나오는 것 같다”며 “경험에서 축적된 것도 있고 에스케이 때 대부분의 투수들 버릇을 간파한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베테랑이 되면서 책임감이 는 점도 있다”고 했다. 3년째 이호준과 함께하고 있는 김경문 엔씨 감독은 “전반기 동안 (이)호준이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줘서 팀 성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위에 있다. 무릎 쪽이 안 좋은데도 수술도 안 하고 경기에 나서고 있는데 매해 최선을 다해줘서 그저 고맙다”고 말했다.

주변 칭찬이 자자하지만 정작 이호준은 가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든단다. “사실 내 타점 중 최소 20타점은 박민우, 김종호 등 발 빠른 후배들이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1루에 있다가도 안타 하나에 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애들 공이 다 나에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위에서 리더십 말도 많이 하는데 엔씨 후배들이 워낙 착하다. 경기가 끝나면 최소 7~8명이 자발적으로 야구장에 남아 훈련을 하고 원정 숙소에서도 밤늦게까지 스윙 연습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내 옛 생각도 나면서 ‘나이 먹었다고 내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게 된다. 진짜 야구는 계속 배워가는 것 같다. 동생들한테 너무 고맙고 100% 나를 믿어주시는 (김경문) 감독님께도 감사할 따름이다.”

메이저리그 최고령 등판 기록(59살)을 보유한 새철 페이지는 “나는 평생 직업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야구’만 했을 뿐”이라며 “야구 선수는 늙어서 은퇴하는 게 아니라 ‘야구’를 안 하기 때문에 은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준도 페이지처럼 지금, 이 순간, 그의 야구를 하고 있다. “내년 시즌은 내 머릿속에 없다. 오늘이라도 크게 다치면 나는 곧바로 은퇴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로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경기만 생각한다. 그게 지금의 나이고, 그게 나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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