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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레이스키 농장의 감자맛

까레이스키 농장이 시흥 땅에 정착한 사연은 뭘까? 이 아르카지 목사는 1990년대에 처음 한국에 왔다. 그 뒤 그는 14년간 우즈벡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 장료자 목사는 14년간 홀로 아들 3형제를 키우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한국에 가서 농장을 일구자고.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뒤 불모의 땅에 푸른 농장을 일궈낸 '기적 일꾼들'의 후손이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한국에 왔다.

  • 정경아
  • 입력 2015.07.28 11:33
  • 수정 2016.07.28 14:12
ⓒShutterstock / Brent Hofacker

경기도 시흥 '까레이스키' 농장에서 택배가 왔다. 감자 5kg 한 상자와 방울토마토 5kg 한 상자. 값은 택배비 5천원을 합해 3만 5천원. 싸다. 곧장 감자를 씻어 압력솥에 넣어 삶는다. 김이 빠지기가 무섭게 뜨거운 감자를 한입 가득 베어 문다. 앗, 이 맛! 어릴 적 엄마가 쪄주던 바로 그 포실포실, 포근포근한 감자다. 요즘은 찌개용으로 쓰는 딱딱한 감자가 대세라 쪄먹기에 포근포근한 감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앉은 자리에서 세 개를 먹는다.

바로 며칠 전 그 농장을 방문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귀환한 '고려인' 3세와 4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고려인 농장.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아르카지 목사와 부인 장 료자 목사가 이끌고 있다. 방문자들은 북한이탈 여성과 중국 동포여성을 포함해 9명. 지하철 4호선 정왕역에 내려 택시를 탔지만 네비게이션에 뜨지 않는 농장 위치 때문에 택시 기사가 애를 먹었다.

도착해 보니 작업장이자 생활공간인 비닐하우스 안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샤슬릭'이란 러시아식 바비큐 꼬치구이. 4센티 정도의 정육면체로 썬 돼지고기를 향신료와 소금, 후추에 재워 30분간 둔다. 쇠꼬치에 꿰어 숯불에 구운 뒤 쇠꼬치에서 빼내 접시에 놓는다. 농장의 여성 일꾼들은 '만띠'라는 이름의 고기만두도 만들었다. 밀가루 반죽을 넓게 펴 네모난 만두피를 만든다. 만두소는 잘게 다진 돼지고기에 양파와 파를 넣고 소금 간을 한 것. 방문자들도 즐겁게 우즈벡 만두 배우기에 나섰다. 두툼하게 빚어 낸 만두를 쪄내면 끝.

곧장 상이 차려졌다. 농장에서 기른 땅딸이 우즈벡 오이와 양파 무침, 우즈벡 스타일 배추김치까지 곁들였다. 배추김치는 잘게 썰어 겉절이처럼 담는 게 특징. 고춧가루를 적게 써서 보통 김치보다 덜 빨갛다. 빵과 밥이 함께 올라왔다. 잡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는 샤슬릭, 손으로 빚은 만띠의 맛에 반해버린 손님들, 우즈벡 레시피에 열광했다.

까레이스키 농장이 시흥 땅에 정착한 사연은 뭘까? 이 아르카지 목사는 1990년대에 처음 한국에 왔다. 그 뒤 그는 14년간 우즈벡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 장료자 목사는 14년간 홀로 아들 3형제를 키우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한국에 가서 농장을 일구자고.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뒤 불모의 땅에 푸른 농장을 일궈낸 '기적 일꾼들'의 후손이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한국에 왔다.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끝에 시흥 외딴 곳, 남의 눈에 아무 쓸모없는 땅을 사용하도록 허가받았다. 물이 한번 고이면 좀체 빠지지 않는 땅, 농지로 사용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 둘 모여든 우즈벡 고려인들은 해냈다. 물을 빼내고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를 심었다. 다른 농지들과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덕분에 유기농법이 가능했다고 이 아르카지 목사는 말했다.

아직 먹을 물이나 주거 환경은 열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잘 웃는다. 얼어붙은 중앙아시아의 오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낸 카레이스키 1세와 2세들의 저력이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외경심이 샘솟는다.

이목사의 미니 강론이 시작됐다. '사랑'에 대해서다. "내가 뭔가를 남에게 줄 때 그가 내게 되갚기를 기대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되갚기는커녕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하든지 내가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아야만 사랑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사랑, 미친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 예수의 사랑이 그랬듯이."

코끝이 시큰해졌다. 평범한 말씀인데도 울림이 큰 건 왜였을까?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건강한 생명력이 그의 말과 혼연일치된 삶에서 나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국경을 벗어나 1860년대부터 러시아 접경 지대나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에 살았던 까레이스키들의 역사는 150년이다. 연해주에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스탈린의 강제 이주령이 발동된 것은 1937년. 고려인들도 다른 소수민족집단들처럼 강제 이주 열차를 탔다. 혹독한 기후 조건과 식량 부족으로 이주 과정에서 거의 1/10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살아남았다. 사막에 농장을 이뤄내는 기술력과 부지런함, 그리고 협업의 핵심인 공동체 정신 덕분이었다. 그만큼 까레이스키라 불리는 고려인들은 우수한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아왔다.

러시아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 특집이 방영됐지만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그들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 걸까? 역사적 사실로만 알던 중앙아시아 까레이스키들의 삶을 바로 코앞에 보게 된 이 순간에야, 나 역시 피땀 어린 150년 이주의 역사를 구체적 현실로 실감한다.

이 아르카지 목사 세대인 카레이스키 3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까레이스키 4세에 이르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묽어질 수밖에 없다. 까레이스키 4세대들이 '조국'에 대한 관심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건 자연스럽다. 이 아르카지 목사의 아들 3형제도 우즈베키스탄의 삶을 선택했다.

정착금과 임대주택 등의 배려를 받는 북한이탈주민에 비해 까레이스키들의 한국 정착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다고 한다. 언어 장벽도 있다. 북한이탈주민이나 동북3성 출신의 중국동포들과 달리 까레이스키들의 한국어는 유창하기 힘들다. 중앙아시아에 고립돼 살아온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지난 150년간 그랬듯이, 언제 어디서든 버려진 땅을 일구어 옥토로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르카지 목사부부의 꿈은 어느 산골짜기의 폐교와 인접한 농지를 사용할 허가권을 얻어 200명 가량의 까레이스키들이 정착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을 포함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모든 까레이스키들이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꿈. 가진 게 없어도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150년간 키워온 자신감이라는 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까레이스키들의 꿈이 이뤄지기를 불교신자인 나는 예수님과 부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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