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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라의 편협함을 다시 확인하다

ⓒ한겨레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방송인을 꼽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유재석이다. 질문을 바꿔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시대적인 방송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김구라 아닐까. 그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의 면면을 보자. 1인 인터넷 방송 형식을 가져온 문화방송 <마이리틀텔레비젼>, 방송마다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 쿡방계의 다크호스 티브이엔 <집밥 백선생>, 8년 동안 뚜렷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방송 <황금어장 라디오스타>, 사회·정치·문화의 이슈를 정리하는 토크쇼 제이티비시 <썰전>, 유재석과 함께 하는 가족 공감 프로그램 에스비에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등 방송계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캐릭터를 들여다보자. 김구라는 래퍼 '엠시(MC) 그리'로 힙합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채무 등 가정사를 비롯해 공황장애 등 질병까지도 방송을 통해 실시간 업데이트한다. 두께는 확인할 수 없지만 넓은 건 확실한 지식과 상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직설과 독설은 캐릭터의 핵심이다. 더 솔직하게, 더 세게, 더 확실하게, 더 자신있게 얘기하는 그의 태도와 화법은 티브이를 넘어 사회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그의 캐릭터는 단점까지도 동시대적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툭툭 끊고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 인맥을 과시하듯 늘어놓는 그의 캐릭터는 올해 화제가 되고 있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을 떠올리게 한다. 맨스플레인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한 신조어로,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을 가리킨다. 김구라는 여성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무엇이든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라스플레인'이라는 말을 만들어도 될 만큼 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이다. 초기에는 '꺼리'만 나오면 잽싸게 물고 지식 자랑을 시작하는 김구라를 다들 불편해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구라스플레인이 시작되면 다들 대놓고 짜증을 내거나 그의 설명 중에 틀린 부분을 찾아내 면박을 준다. 김구라는 꿋꿋이 설명을 이어가거나 틀린 점에 대해서는 민망해하고 바로 사과하며 웃음을 만들어낸다. 김구라는 그의 구라스플레인적 면모를 스스로 인지하고 이를 영리하게 활용해 웃음을 이끌어낸다. 팝송 제목이나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이름, 정치인이나 역사 속 인물 등 지식과 상식의 영역에서 구라스플레인을 할 때는, 그가 지난 5월 <라디오스타>에서 무식한 걸로 웃기는 건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처럼 '모른다'는 이유로 비하하는 식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웃을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구라스플레인을 발휘할 때다.

에스비에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는 10대 자녀와 부모가 갖고 있는 고민을 풀어내는 프로그램이다. 잘생긴 아들의 연애를 반대하는 엄마,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딸을 결사반대하는 아빠,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딸이 고민인 엄마, 성형수술을 하고 싶은 딸 등의 사연이 나온다. 부모와 자녀의 입장은 늘 엇갈리고 패널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필수 요소가 있다. 김구라의 무자식 타박이다. 서장훈과 김풍 등 자녀가 없는 패널들이 자녀의 입장에서 얘기할라치면 김구라는 "자식도 없는데 뭘 아느냐", "자식이 없어서 부모 마음을 모른다"고 타박하고 설명을 시작한다. 김구라가 이 말을 꺼내면 다들 할 말을 잃는다. 김구라의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난감해서 할 말이 없어진다. "경험이 없는 네가 뭘 아느냐"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비슷한 논리없음과 억지의 화법이다. 그런 화법에는 답이 없다.

<동상이몽>의 지난 7월18일치 방송이 논란이 됐다. 과도한 스킨십을 하는 아빠와 이를 거부하는 딸의 사연이었다. 스킨십의 정도가 가족 간 애정표현의 수위를 넘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두둔하거나 옹호한 진행자와 패널, 적절하지 않은 소재와 선정적인 연출을 한 제작진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이어졌다. 자극적인 화면을 위해 제작진이 실제 사연을 왜곡하고 조작했다는 가족의 주장도 나왔다.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가족 간의 애정 표현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헛발질을 일삼은 제작진에 있다. 이번 논란을 통해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이 기획과 제작을 거쳐 전파를 타는 방송사의 필터링 부재를 확인했고, 동시에 다시 한번 구라스플레인의 위력을 실감했다. 김구라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자식 없는 서장훈을 타박하며 방송을 시작했다. "자식이 있는 분들과 없는 분들하고 갈리네"라며 자식 유무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딸바보'의 사연인데 안타깝게도 아들만 있고 딸이 없는 김구라는 딸이 둘 있다는 이유만으로 출연한 연기자 신정근에게 '구라스플레인'의 기회를 넘기는 매너도 보여줬다. 신정근이 돈을 줄 테니 뽀뽀를 하라는 아빠의 제안을 거부한 딸을 두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하거나 "아빠가 딸을 만지는 게 절대 울 일이 아니다. 정말 큰일 날 일은 아빠가 옆집 딸을 만졌을 때"라고 말하는 등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인 발언을 이어갔고, 김구라는 이 발언들에 대해 "정말 잘 나오셨다", "포청천이다"라며 맞장구쳤다. 제작진은 이 모습을 대단히 재미있는 장면인 것처럼 강조했고, 심지어 예고편에도 등장했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은 이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있을 테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을 가진 이들만이 부모와 자녀 등 가족관계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결혼을 했거나 자식이 있는 사람만 가족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가족이 있다. 모두가 가족이 있는 건 아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도 인간관계에 대한 의견이 있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부모의 마음은 만능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고, 가족의 평화를 약속할 수도 없다. 김구라는 결혼을 했고 자녀를 낳은 그의 경험과 부모, 특히 아빠라는 그의 위치가 다른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 설명할 자격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가르치려 든다. 그의 가르침은 직접 얘기를 나누는 출연자를 포함해 출연자들과 똑같이 자식이 없는 모든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따져보면 김구라에게 타박을 듣는 패널들의 의견이 '자식 없음'에 기반한 거라는 근거도 없다. 그 역시 김구라 자신의 판단일 뿐이다. 상대가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면 그것은 나는 자녀가 있지만 상대는 없기 때문이라는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판단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동상이몽>에서는 무자녀 타박이 김구라의 필수 요소라면, <라디오스타>에서는 김국진 타박이 필수 요소다. 김구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된 수년 동안 김국진의 이혼을 토크의 소재로 써왔다. 매번 이혼한 김국진의 사생활을 언급하며 그의 외로움에 대해 걱정하면서 프로그램에 나온 여성 출연자들과 김국진을 찍어붙이는 식으로 엮는다. 김국진에 대한 농담 같은 훈수와 공격에 가까운 훈계 안에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매우 불안하고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그의 편협함이 들어 있다.

티브이칼럼니스트 이승한은 지난 5월 <한겨레>에 쓴 칼럼 '마흔여섯 김구라, 이유 있는 진화'에서 앞서 언급한 <라디오스타>에서의 다짐을 얘기하며 김구라의 변화를 짚었다. 무식한 걸로 웃기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 고작 발언 하나일 뿐이지만 그가 자신의 편협함을 스스로 교정해낸 거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충분히 진화라고 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동상이몽> 논란을 통해 김구라의 편협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그가 여전히 진화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다. 아니, 진화해야 한다. 김구라는 지금 가장 많은 화제를 만들어내는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다. 그의 영향력은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도전과 시도에 기반한다. 그가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형식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용까지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진화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무식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경험하지 못한 것을 타박거리로 삼지 않고 자신의 '아빠 중심적' 경험을 앞세우지 않겠다고 얘기하며 다시 한번 자신을 '버전 업' 할 수 있다면, 그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 동시대적인 방송인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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