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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치는 패션의 완성, 가끔은

염색을 해보라는 권유는 꿋꿋이 거부하고 있는데 이게 다 리처드 기어와 사카모토 류이치, 폴 뉴먼 때문이다. 은발의 매력을 내게 일찌감치 세뇌시킨 이들이다. 물론 그 정도 미남들이라면 백발이 아니라 삭발을 하고도 근사했겠지만, 아무튼 요점은 이렇다. 세월의 흔적이 꼭 고치고 감춰야 하는 핸디캡만은 아니라는 것.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으나 위에 언급한 셋은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뒤에 오히려 미모의 정점을 찍었다고 본다.

  • 정준화
  • 입력 2015.07.26 06:28
  • 수정 2016.07.26 14:12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한테서 매번 듣는 이야기가 있다. "흰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늘었어요?" 그때마다 새삼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보곤 한다. 한두 가닥 뽑아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은 확실히 넘어선 지 오래다. 게다가 점점 가속이 붙는 기세라 이대로라면 몇 년 뒤에는 머리통의 절반 이상이 새치로 뒤덮일 듯하다. 하지만 염색을 해보라는 권유는 꿋꿋이 거부하고 있는데 이게 다 리처드 기어와 사카모토 류이치, 폴 뉴먼 때문이다. 은발의 매력을 내게 일찌감치 세뇌시킨 이들이다. 물론 그 정도 미남들이라면 백발이 아니라 삭발을 하고도 근사했겠지만, 아무튼 요점은 이렇다. 세월의 흔적이 꼭 고치고 감춰야 하는 핸디캡만은 아니라는 것.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으나 위에 언급한 셋은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뒤에 오히려 미모의 정점을 찍었다고 본다.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는 다소 가벼웠던 <아메리칸 지골로>나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시절과는 달리 믿음직스럽게 섹시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20대 때부터 머리가 세지 않은 게 애석할 정도로 은발이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한 사람과 페이스오프를 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폴 뉴먼을 고르겠다. 그가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건 각각 1950년대와 1980년대의 일이었지만, 내게는 은발이 확연히 도드라지기 시작한 1960년대의 출연작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폴 뉴먼의 '은발화'는 1965년 이후부터 급격히 빨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에 개봉한 <찢어진 커튼>에서는 구레나룻만 바랜 듯이 밝았으나, 1967년 작인 <폭력탈옥>(원제: 쿨 핸드 루크)을 보면 이미 새치가 골고루 그리고 넓게 섞인 상태다. 1925년생이니 마흔을 막 넘겼을 무렵이다. 그런데 30대 시절보다 오히려 섹시함이 월등해져서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스카우터(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한 전투력 측정기)가 폭발할 지경이다. 두 작품에서 그는 꽤나 상반된 모습을 선보인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물인 앨프리드 히치콕의 <찢어진 커튼>에서는 군사기밀을 캐내기 위해 동독에 잠입하는 물리학자 역을 맡았다. 차분한 회색 슈트와 흰 셔츠, 혹은 글렌체크 코트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워낙 은색으로 세련되게 빛나서 상대역을 맡은 줄리 앤드루스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한편 <폭력탈옥>에서는 경범죄로 과한 형량을 부여받은 뒤 반복해서 탈옥을 감행하는 사내였다. 꾀죄죄한 몰골에 죄수복을 걸친 채로도 걸어다니는 화보 같아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쯤에서 이 검증된 명제를 슬쩍 응용하고 싶어진다. 가끔은 패션의 완성이 은발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폭력탈옥>의 폴 뉴먼이 말끔한 갈색 머리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강렬함이 한참 덜했을 거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도 클래식 패션 아이콘으로 꾸준히 호명될 만큼 감각이 남달랐던 스타다. 스웨트셔츠나 스웨터 쇼핑을 앞두고 고민하는 남성들에게는 이 배우의 예전 사진을 한번 뒤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폴 뉴먼이 택한 최고의 패션 아이템은 옷이나 구두보다 자연스럽게 센 은발이었다고 생각한다. 젊음에 집착하지 않고 편안하게 나이가 드는 모습은 늘 근사하게 느껴진다. 모두가 그를 흉내내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다만 흰머리가 솟을 때마다 죄다 허겁지겁 미용실로 달려갈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아무튼 나는 지인들의 참견에 맞서 싸우며 할 수 있는 한 염색을 거부해볼 계획이다. 어디선가 "손님, 이건 폴 뉴먼이에요"라는 미용실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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