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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그 이중의 수난

돌아보면, 지역감정과 독재에의 향수가 여전히 무시 못할 정서일 때, 선거여왕이란 칭호는 전략가에게나 어울릴 수사이며 나라의 진운을 놓고 공부하고 고뇌하며 불철주야 소통해야 하는 최고권력자를 '기리는' 언어로는 애초에 모멸적이어야 마땅했다. 그나마 선거 과정의 온갖 잡음 속에서 창출된 정권 아닌가. 허다한 문제들 앞에서도 꿈쩍 않던 우리의 대통령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당선된 자당의 원내대표를 겨누어 느닷없이, 과연 선거의 여왕답게, 선거에서의 심판 운운하며 날선 몽니를 보이고는, 요동하는 정국에 아무런 반응도 피드백도 없이 다시 홀연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 고세훈
  • 입력 2015.07.24 07:05
  • 수정 2016.07.24 14:12
ⓒ연합뉴스

우리는 종종 박정희 시절을 민주화를 희생해서 산업화를 일군 것으로 회상한다. 실은 산업화의 명암이 한국처럼 극명한 나라도 찾기 힘들다. 그 역사가 우리 사회에 드리운 가장 넓고 짙은 그늘은 아마 불평등의 구조화일 것이다. 재벌이 권위주의 정치와 이익을 주고받으며 금권을 키우는 사이에 생산자계층의 권력자원은 항구적으로 위축되었다. 오늘날 사회적 대타협을 외치는 소리가 때로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계급권력의 현저한 비대칭이란 유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원래 의의는 그것이 '시장을 거스르는 정치'를 가능케 한다는 데 있다. 돈의 논리가 수의 논리를 압도해서 정치가 시장을 견제하지 못하고 시장의 힘이 정치질서를 문란케 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다. 작금의 민주주의 위기 담론이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유도 세계화 대세를 업고 날로 비대해지는 금권이 정치과정을 일상적으로 훼손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최근 스티글리츠나 피케티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이코노미스트 같은 보수언론까지 나서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맥락이 여기서 멀지 않다.

한국, 금권이 노골적인 나라

그러나 의회선진국들의 경우, 시장의 힘이 불비례적으로 정치를 넘볼지언정, 정치는 여전히 시장을 거스르는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한다. 가령 복지국가란 것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낳은 문제들을 '보이는 정치'가 나서서 예방하고 교정해 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절차 수준에서 공고화된 민주주의가 갖는 위력일 것이다. 요컨대 선진국 민주주의의 위기란 시장권력과의 관계에 닿아있는바, 복지국가를 넘어 시장을 시장 안에서 먼저 규율하자는 경제민주주의가 손상된 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한 최대의 시대적 관건으로 등장한 내막이 거기에 있다.

권위주의 시절에 세를 키워온 한국의 시장권력은 소위 민주화 이후에는 점차 노골적으로 정치를 탐해 왔다. 한 재벌의 재력만으로 당이 급조되고 그 총수가 대선에 나서며 순식간에 돌풍을 일으켰던 때가 엊그제다. 재벌 몇이 더 가세했다면 돌풍 아니라 금권정치의 토네이도가 몰아쳤으리라는 상상은 지금도 끔찍하다. 훗날 실제로 재벌회사 회장 출신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던 우리는 아직 그 여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실정이니 복지수준은 OECD 최하위를 고수하는 데다 경제민주화는 거론조차 부담스럽다 한들, 놀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새삼스럽게 위기에 처했다면 그것은 금권 이전에 이미 정치권 내부의 보다 초보적인 정치적 절차 수준에서의 위기라는데 있을 터인데, 그에 비하면 선진국적 민주주의 위기 담론들이란 우리에겐 낯간지러운 엄살 내지 호들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정당정치는 정당조직과 정당체제를 근간으로 한다. 당내의 엘리트충원과 정책형성의 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본질적, 보편적 갈등인 사회경제적 갈등을 둘러싸고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을 차별화하며 (통상 좌에서 우의 스펙트럼 양상으로) 배열돼야 한다는 상식이다. 그리하여 한국정치가 위기라면 일차로 그것은 이 두 측면에서 모두 후진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의 해방이후사가 정당들이 인물과 이권 중심으로 창당, 분당, 개명을 밥 먹듯 하고 그에 따른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으로 온통 분주했던 누더기 정치사였으니, 이제 와서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체제를 다그치는 일은 정말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당정치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 곧 당내민주주의마저 실은 얼마나 엉성한 장식이었던가.

병정놀이의 민주주의

돌아보면, 지역감정과 독재에의 향수가 여전히 무시 못할 정서일 때, 선거여왕이란 칭호는 전략가에게나 어울릴 수사이며 나라의 진운을 놓고 공부하고 고뇌하며 불철주야 소통해야 하는 최고권력자를 '기리는' 언어로는 애초에 모멸적이어야 마땅했다. 그나마 선거 과정의 온갖 잡음 속에서 창출된 정권 아닌가. 허다한 문제들 앞에서도 꿈쩍 않던 우리의 대통령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당선된 자당의 원내대표를 겨누어 느닷없이, 과연 선거의 여왕답게, 선거에서의 심판 운운하며 날선 몽니를 보이고는, 요동하는 정국에 아무런 반응도 피드백도 없이 다시 홀연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이야 너무 면구스러워 필설이 따로 필요치 않거니와, 집권당 당내민주주의의 외양은 일거에 무너지고 의회의 권위란 실은 공염불이었음이 천하에 드러났다.

권력자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중진 국회의원의 코털을 뽑는 일이야 '그때 그 시절' 탓으로 돌릴지라도, 소위 민주화 시대에도 국민의 대표라는 이들이 그 병정놀이에 전전긍긍하며 감읍해야 한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민주주의 위기란 말조차 과분할지 모른다. 하기야 그런 풍토에서 잔뼈를 불려온 사람들이니 조만간 민주주의의 성근 모래성 쌓기를 다시 시작할 터이고, 냉소와 환멸이 늘수록 그들의 얼차려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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