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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 모호하기에 위험한 아이콘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집중선에 불쾌감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딱히 다른 맥락이 없는데 작가나 작품 그 자체가 일제와 제국주의를 찬양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벼랑 위의 포뇨>의 어선 깃발을 가지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우익이라고 시비 잡는 것보다 <바람이 분다>에서 확연히 드러난 위험할 정도로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역사인식과 반전주의의 한계를 문제 삼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욱일 도안이나 욱일기를 무작정 극우적 상징물이라며 기피하지 말고, 정말로 그런 용도로 쓰였는지 스스로 읽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한국의 문화적 스펙트럼이 그 정도로는 성숙하고 강해졌다고 믿는다.

2014년 7월, 인기 만화 『원피스』 가 한국 뉴스에 등장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원피스』 특별전'이 전시일 사흘 전에 전쟁기념관 측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취소되었다. 욱일기가 연상되는 문양이 나오는 일본 만화를 전쟁기념관에서 전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항의 때문이었다. 결국 전시회 주최자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전시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서야 2주 만에 전시회가 다시 개최될 수 있었다.

욱일기(국내 언론에서 종종 잘못 표기되지만 욱일"승천"기가 아니라 욱일기가 맞다. 심지어 제국주의 찬양 목적으로 사용하는 일본 극우단체조차 그냥 욱일기라고 부른다), 혹은 욱일 도안은 한국을 비롯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시달렸던 국가들에게는 여전히 민감한 사항이다. 때로 욱일기에 대한 반감이 지나쳐 티베트 국기가 찍힌 티셔츠를 입은 연예인을 향해 욱일기 티셔츠를 입었다고 비난하거나,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 아이콘의 대게를 욱일기로 착각해 비난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위의 『원피스』 사례처럼 일본 매체에 욱일기 비슷한 문양이 나온다고 반드시 욱일기인 것도, 딱히 일제를 찬양하는 목적인 것도 아닌 경우다.

그렇다면 일본 매체, 특히 자주 접하는 만화에 나오는 욱일기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원피스』 가처분신청에서 법원이 내린 이성적인 판단이 힌트가 될 수 있다. "18년간 연재된 장편만화의 극소수 장면에 욱일기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해당 만화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만화라고 볼 수 없고, 설령 욱일기를 표현한 것이라도 만화 주인공과 대적하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사용돼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 만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부 장면만 가지고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근거가 없다." 즉 맥락과 작품에 사용된 방법 및 용도에 따라서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번거롭긴 하지만 향유자로서는 물론, 한일 간의 역사 문제 해결을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다면 비판할 대상을 적절히 선정하고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욱일기가 아니다. 대어기다.

욱일 도안의 문제 중 하나는 이것이 매우 오래되었으며 단순한 형태라는 점이다. "욱일(旭日)"이라는 말 그대로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도안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과 원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햇살을 상징하는 여러 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형태 자체는 히아시(日足)라는 이름의 도안으로 중세에는 주로 큐슈 지방의 무사집안들이 가문(家紋)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홍색과 백색의 조합은 길한 의미도 있어서 욱일 도안에 홍백색을 더해 풍속화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하기도 하고, 풍어를 기원하며 어선에 다는 대어기(大漁旗)에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 1870년, 욱일과 홍백이 조합되어 16줄기의 햇살로 그린 욱일기라는 깃발이 일본군의 군기로 제정된다. 욱일기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행위와 태평양전쟁 동안 널리 사용되어 피해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물로 각인되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군이 해체되며 욱일기의 사용도 중단되었으나, 1952년 해상자위대가 창설되면서 다시 군기로 도입되었고, 일본의 극우단체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욱일 도안은 풍어를 기원하는 축제나 운동회처럼 각종 운동 행사 등에 군국주의 이전부터 하나의 전통처럼 사용되고 있다.

즉 단순한 욱일 형태가 아니라 "욱일기"를 파악하는 법은 방사형, 흰색 바탕의 붉은 태양과 햇살, 작중 맥락에서 일본 국가를 상징하는 최소한의 3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설사 3가지 조건을 다 갖춘 경우라도, 작중에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피해국가 입장에서는 유감스럽지만 일본에서 욱일기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건 사실이고 만화 속 욱일기 표현에 대해 해결하고 싶다면 그 불쾌감과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전략이 유리할 것이다.

만화 속에서 "욱일기"가 자주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일본 군국주의와 우익세력을 위하려는 의도는 없다.

일본 만화에서 욱일 도안이 자주 보이고 그만큼 빈번히 문제시되는 경우 중 첫 번째는 집중선 효과로 사용될 경우다. 선을 덜 그어도 되면서 강렬하고 화려한 효과를 줄 수 있어서 인물을 부각시키고 싶을 때 배경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이 욱일 도안은 단순한 형태고 대상을 집중시키는 효과로 사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스포츠 행사와 엮이다 보니 인물이 어떤 결심을 하며 의지를 다질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욱일 도안이 작중 소품으로 등장할 경우다. 가령 <벼랑 위의 포뇨>의 어선 깃발 중에 욱일기 형태가 문제시된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깃발은 풍어를 기원하며 바다와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대어기다. 근대적 군국주의 이전에 오래된 유래가 존재하는 경우다.

또 다른 소품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크게 휘두르며』 등의 스포츠만화에서 스포츠 대회의 장식물로 등장하는 욱일기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일본의 운동회나 스포츠 대회에서 욱일기가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종의 마초이즘을 상징하는 점과 눈에 확 띄는 도안으로 인해 폭주족 문화에서 종종 아이콘으로 사용되어 폭주족이 등장하는 만화의 복장이나 연출에도 욱일기가 자주 나타난다. 따라서 만화에서 운동대회나 폭주족 묘사에 욱일기가 사용되는 것은 어떤 정치적 의도 이전에 특정 배경이나 서브컬처를 묘사하려는 의도가 우선적이다.

대체로 아니지만,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마니즘 선언』에서는 오히려 좌파 미디어를 비난하는 용도로 썼으며 『일본인의 혹성』에서는 과격한 내용 모두가 사실은 노골적인 블랙코메디.

그 밖에 실존 로고나 상품을 가리킬 때 욱일 도안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흥미롭게도 일본 우익이 좌익을 비판하면서 욱일 도안을 좌파의 상징으로 그리기도 한다. 가령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현재 일본 넷우익의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관과 음모론을 주장한 만화 『고마니즘 선언』에서 일본의 "반일 미디어"를 욱일 도안으로 묘사하면서 규탄한 경우가 그렇다. 일본의 대표적인 중도좌파 언론사 아사히(朝日) 신문의 깃발은 흰색 바탕에 "朝"라는 한자가 쓰인 붉은 방사형 태양이 깃발의 우측 하단에서 떠오르는 형태로, 신문의 이름인 "아침 해"를 형상화한 욱일 도안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방사형의 홍백 도안이 일본군 내지는 일본 국가를 상징하는 경우, 즉 일제와 군국주의의 상징물로써 욱일 도안 및 욱일기가 사용되는 경우다. 이것도 작중 맥락에서 단순히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배경/소품의 일부인지, 자위대를 상징하기 위한 소품인지, 일본 국가나 자위대를 상징한다면 일본 국가, 자위대, 욱일기가 작중에 어떤 맥락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지니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가령 일본의 장래 모델로 미국을 대체할 국제적 경찰국가를 제시하는 『침묵의 함대』의 욱일기와, 일본 정부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들의 삶 속에 물든 군국주의 역시 격렬하게 비판하는 『맨발의 겐』에서 묘사된 욱일기는 작가들의 국가관과 전쟁관 만큼이나 판이하다. 더 모호한 용도의 사례로 마루오 스에히로의 『일본인의 혹성』이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승리해 욱일기를 펄럭이며 미국을 정복하고 맥아더를 처형한다는 내용으로, 그야말로 일본 극우의 판타지를 그린 단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원숭이의 혹성』을 패러디한 제목, 포르노적으로 과장된 미국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 맥아더를 처형한 군인이 사정을 하는 묘사 등 작가 특유의 키치한 감성과 블랙 유머를 통해 극우적 "정신승리"임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측면도 공존하고 있다.

이상의 정리가 한국인 독자 및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가 일본 만화 속 욱일기에 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령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집중선에 불쾌감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딱히 다른 맥락이 없는데 작가나 작품 그 자체가 일제와 제국주의를 찬양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벼랑 위의 포뇨>의 어선 깃발을 가지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우익이라고 시비 잡는 것보다 <바람이 분다>에서 확연히 드러난 위험할 정도로 나이브하고 무책임한 역사인식과 반전주의의 한계를 문제 삼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작중 체육대회의 욱일기가 불편하다면 현실 체육대회를 반영한 것이라고 타협하고 넘어가거나, 수입사에게 항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욱일 도안이나 욱일기를 무작정 극우적 상징물이라며 기피하지 말고, 정말로 그런 용도로 쓰였는지 스스로 읽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한국의 문화적 스펙트럼이 그 정도로는 성숙하고 강해졌다고 믿는다.

글_시바우치/만화연구가이자 번역가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 참조

http://www.fnnews.com/news/201407181843354999?t=y

http://www.harimaya.com/o_kamon1/yurai/a_yurai/pack2/hias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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