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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주주들은 왜 삼성의 손을 들어줬을까

삼성의 성공한 프레임 전략은 따로 있다. 합병 반대가 무조건 합병 부결처럼 보이게 만들었단 점이다. 엘리엇과 소액주주들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무조건 반대한 게 아니었다. 합병은 찬성하지만 합병 비율이 문제였다. 1대 0.35라는 합병 비율은 누가봐도 불합리했다. 실제로 7월 17일 주총장에서 몇몇 소액 주주가 투표 전 발언을 통해 합병 비율을 재조정해서 합병안을 재상정하자고 요구했다. 삼성 입장에선 아니될 말이었다.

  • 신기주
  • 입력 2015.07.23 12:49
  • 수정 2016.07.23 14:12
ⓒ연합뉴스

제헌절이었던 7월 17일 이병철 창업주의 손자이자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의 삼성공화국 시대가 삼성물산 주주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시작됐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이 찬성 69.53%로 가결됐다. 현장 표결이나 위임장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주식수는 전체의 83.57%였다. 7월 17일 오후 12시 47분 주총 의장인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는 말했다. "1억3235만5800주가 투표에 참여해서 이 중 9202만3660주가 찬성했다"고 선언했다.

뜻밖의 낙승이었다. 주총 직전까지만 해도 투표 결과는 혼전 양상을 띌 걸로 예상됐다. 같은 시각에 열린 제일모직 주주총회에선 합병안이 만장일치 박수로 의결됐다. 주총장에선 간간히 웃음소리까지 터져나왔다. 반면에 삼성물산 주총장에선 고성과 항의가 이어졌다. 합병안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액주주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많은 걸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어느 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합병을 추진해온 삼성그룹은 소액주주와 외국인들로부터도 16% 가까운 지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주총 전까지 삼성은, 삼성가 소유 지분과 삼성그룹 계열사 지분 13.92%에, 삼성물산의 자사주를 인수해서 의결권을 부활시켜준 백기사에 KCC의 지분 5.96%에, 결국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 ISS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한 국민연금의 지분 11.21%에, 삼성생명이라는 힘을 바탕으로 끌어들인 국내 기관 투자자 지분 11.05%를 확보한 상태였다. 모두 합쳐서 42% 안팎이었다. 여기까진 삼성이 가진 힘으로 확보한 지분이었다.

삼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싸움터'

이걸론 모자랐다. 10% 이상의 지지표가 더 필요했다. 합병안이 통과되려면 주총 참석 지분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를 해야만 한다. 전체 지분의 3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 이건 쉽지 않아보였다. 주식이 소액주주들과 외국인들한테 산산히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백기사나 국민연금이나 기관 투자가들의 경우처럼 삼성이 힘만으로 얻을 수 있는 표가 아니었다.

게다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분명 삼성물산의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결정이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 0.35다. 제일모직의 시총이 삼성물산보다 3배 커서 나온 결과다. 반면에 순자산은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6배 가까이 된다. 삼성물산의 순자산은 30조원인데 제일모직의 순자산은 고작 5조원 수준이다. 법대로만 보면 문제될 건 없다. 한국의 상법은 상장법인의 경우 합병 비율은 시가총액으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경우는 법이 현실을 못 따라간 경우였다. 두 회사 주총장의 분위기가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당연히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은 합병에 반대해야 합리적이었다. 자신이 가진 주식의 가치가 억울하게 3분 1토막이 나는데 순순히 찬성하는게 이상했다. 이건 삼성이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비집고 들어온 약점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3세 승계를 위해 절대 다수인 삼성물산 주주들한테 손실을 끼치는 행위라는 사실을 꼬집었다. 처음엔 먹히는 듯 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주총 결과 전체 주식의 58.91%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동의한 걸로 나타났다. 삼성이 힘으로 얻은 42%를 제외하면 17% 가량의 주주가 합병에 동의했단 의미다. 확실히 합병에 반대한 주주표는 엘리엇 7.12%, 메이슨캐피탈 2.18%, 외국인과 소액주주 일부까지 더해서 25.82%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삼성물산 주주들의 다수가 자신들의 금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합병에 찬성했단 말이다.

싸움의 본질을 바꾼 삼성의 프레임전략

추론할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삼성의 프레이밍 전략이다. 태극기를 수놓은 언론 광고를 통한 애국심 마케팅이 통했단 얘기가 아니다. 그건 세련된 삼성답지 못한 촌스런 짓이었다. 마치 삼성이 외국인 침략자 엘리엇에 맞서 싸우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역효과만 낳았다. 이번 합병이 이재용 3세 승계를 관련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애국심 마케팅은 삼성을 벌처 펀드 엘리엇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엘리엇이 자신들의 탐욕을 주주가치 보호라는 대의명분으로 포장했듯이 삼성도 3세 승계를 애국심으로 치장했다.

삼성의 성공한 프레임 전략은 따로 있다. 합병 반대가 무조건 합병 부결처럼 보이게 만들었단 점이다. 엘리엇과 소액주주들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무조건 반대한 게 아니었다. 합병은 찬성하지만 합병 비율이 문제였다. 1대 0.35라는 합병 비율은 누가봐도 불합리했다. 실제로 7월 17일 주총장에서 몇몇 소액 주주가 투표 전 발언을 통해 합병 비율을 재조정해서 합병안을 재상정하자고 요구했다.

삼성 입장에선 아니될 말이었다. 합병 비율을 바꾸면 자칫 이재용 부회장의 합병법인 삼성물산의 지분율이 희석될 위험이 있었다. 주총장에선 합병 비율 논의는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주총 전에도 합병 비율에 대한 논의는 이미 끝난 얘기라도 못을 박았다. 대부분의 언론도 합병 비율 재산정 논의는 꺼내지도 않았다.

결국 합병에 반대하면 무조건 합병이 부결된다는 프레임이 짜였다. 합병 부결은 사실 삼성물산 주주들한테도 손해였다. 지난 5월 26일 합병이 발표되고 6월 4일 엘리엇 사태가 시작되면서 삼성물산 주가는 상당히 부양된 상태였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다 합병법인 삼성물산의 성장 기대감이 뒤섞인 주가였다. 합병이 부결되면 이런 재료들이 사라지면서 주가가 떨어질 게 뻔했다. 소액 주주들도 합병을 부결시키긴 어려웠다. 합병 비율은 억울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이 삼성물산의 기업 가치를 높여서 합병 비율 탓에 입은 손실을 만회해주길 기대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총수 자본주의의 완성과 한계

여기에 이재용 부회장의 3세 승계라는 대의명분까지 가세했다. 한국은 총수자본주의 국가다. 모든 기업이 국유화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자본주의 국가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총수 자본주의 시대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산업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총수가 이끄는 거대 기업들을 탄생시킨다. 미국에서도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총수들이 있었다. 한국엔 재벌이 있다.

총수 자본주의 다음엔 주주 자본주의가 도래한다. 이때 기업은 일개 개인이나 가문이 이끌기엔 조직 규모나 자산 규모가 커진 상태다. 이미 창업주 가문보다 일반 주주들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다. 더 이상 소수 지분을 가진 개인이 창업주의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게 된다. 자연히 오너든 경영진이든 주주 친화적인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람직한 주주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주주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003년 SK 소버린 사태나 칼 아이칸의 KT&G 공격으로 주주 자본주의는 곧 탐욕스런 헤지펀드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그런 인식을 재벌들과 언론들이 확대 재생산한 측면이 있다. 총수 자본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서였다. 급기야 주주들 자신들도 무비판적으로 이걸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급기야 총수 자본주의가 국가 경제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봉건적 사고 방식까지 확대됐다. 이게 한국 자본주의의 현주소다. 이래선 주주 자본주의의 진화형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까진 꿈도 못 꾼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으로서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1990년대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상 삼성은 이재용 체제를 20년 넘게 준비했다. 7월 17일 주총은 그 대미였다. 한국에선 총수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고 믿는 소액 주주들은 결국 익숙한 이재용 3세 체제의 손을 들어주는 선택을 했다. 자신들의 금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삼성은 지난 한 달 동안 지난 20년 동안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주주 친화적인 정책을 발표했다. 거버넌스 위원회를 두고 영업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환경 친화적인 경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엘리엇은 벌처 펀드지만 그들의 상상력 넘치는 주주 행동주의는 요지부동이었던 총수 자본주의를 단숨에 흔들어놓았다. 정부의 부총리가 읍소를 해도 늘리지 않던 배당을 삼성이 30%까지 확대한 건 많은 걸 시사한다. 이미 70% 가까운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삼성이 지난 한 달 동안과 같은 저자세를 또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합병 발표 이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가는 하락 일로다. 사실상 합병안을 발표했던 5월 26일 즈음 수준으로 돌아갔다. 외국인과 기관들이 계속 순매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경영권 분쟁 같은 이벤트 재료가 소멸되면 일시적인 주가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 어쨌든 합병에 찬성했던 주주들도 주가 하락으로 일단 투자 손실을 보고 있는 건 사실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주주들은 삼성이 약속한 합병 삼성물산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들을 믿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주주 수동주의다.

제헌절 삼성물산 주주총회는 한국 경제사에 기록될 날이다. 이로써 지난 20년 동안 이건희 회장이 이끌었던 한국 경제를 앞으로 20년 동안 이재용 부회장이 이끌게 됐기 때문이다. 2015년 7월 17일 제헌절은 삼성공화국의 3대 세습이 이뤄진 날이다.

21일 오전 경북 구미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앞 오른쪽)이 박수를 치고 있다.

* 이 글은 중소기업뉴스 <신기주의 기업 인사이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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