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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그리스 비극 읽기

문제는 부채탕감 없이 긴축만을 강제하는 현재의 구제금융으로는 그리스의 부채문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은 그리스의 국가부채비율이 2022년에도 GDP의 170퍼센트에 달할 것이며, 문제 해결을 위해 상당한 부채탕감이나 30년의 상환연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대로라면 몇 년 후 그리스가 부채를 갚지 못해 다시 그렉시트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고, 현재의 불균형이 지속된다면 다른 남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지경에 처해 유로존의 유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부채탕감이나 긴축의 완화 없이는 그리스의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다음 막의 비극의 주인공은 유럽이 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초한 이 현대의 비극에서 카타르시스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강국
  • 입력 2015.07.23 11:28
  • 수정 2016.07.23 14:12
ⓒASSOCIATED PRESS

고대 그리스 비극은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지금은 그리스인 모두가 거대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재정위기와 긴축 이후 5년간 그리스는 국민소득이 25% 줄어들고 실업률이 26%에 달하여 미국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최악의 경제 붕괴로 고통 받고 있다. 노인들은 음식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절반 이상의 청년이 일자리가 없으며, 자살률도 36% 더 높아졌다.

이 현대판 그리스 비극을 보며 보수언론들은 과도한 복지지출이 그리스의 파산을 낳았다는 신화를 쓰기 바 쁘다. 그러나 그리스의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사회복지지출의 비중은 유럽연합 15개국 평균보다 낮으며 소득불평등과 노인빈곤은 최악의 수준이다. 그 많다던 공무원이나 연금지출도 전체 고용과 경제규모와 비교하여 유럽 평균보다 조금 높거나 평균 정도 수준이다. 물론 위기 이전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다른 나라보다 높았고 2000년대 이후 연금지출은 가파른 상승세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후한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여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실업보험 등 사회복지 혜택은 낮은 수준이었다.

정작 그리스의 문제는 전반적인 과잉복지가 아니라 공무원 등 일부 특권층이 과도한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특히 정부지출에 비해 조세수입이 크게 부족했는데 이는 지하경제와 부패 그리고 탈세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올리가르히라 불리는 재벌과 여러 기득권집단들이 정치를 장악하여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은행대출 데이터를 이용한 최근의 한 실증연구는 그리스 변호사들이 매달 주택대출을 갚는 금액보다도 소득을 더 적게 신고했다고 보고한다.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들의 탈세액이 2009년 재정적자의 약 3분의 1에 달했을 정도다. 이와 함께 2004년 이후 법인세 등의 감세로 세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2008년 이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재정적자가 급속히 악화되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임 재무장관 차칼로토스의 '저항의 도가니'라는 저서는 이러한 위기의 여러 맥락들을 잘 보여준다.

비극적 운명을 가져다 준 그리스의 잘못된 선택은 이런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일이었다. 유로를 사용하게 된 덕분에 그리스는 이전보다 훨씬 값싸게 외국으로부터 자본을 빌릴 수 있었고 위기 이전까지 연평균 4%나 성장하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저금리의 빚에 기초한 호황은 매우 취약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재정통합이나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없이 통화통합만으로 이루어진 유로존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로의 사용과 함께 독일은 인플레와 임금을 억누르며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 를 기록한 반면,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환율이 고평가되어 적자가 누적되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물가와 임금이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경쟁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게다가 주로 관광업과 해운업이 경제의 기반이었던 그리스는 수출경쟁력을 지닌 변변한 제조업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2007년 독일의 무역수지 흑자는 무려 GDP의 8%에 달했는데 그 중 63%가 유럽지역에서 나왔고, 상품수지 흑자 중 약 28%가 남유럽 4개국과 아일랜드 덕분이었다. 즉 적자국들이 독일에게 시장을 제공하여 독일은 엄청난 흑자를 벌었고 그 흑자는 다시 남유럽에 투자되어 대외부채와 버블을 심화시켰다. 그리스의 경우도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국채를 외국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게 되어 위험이 훨씬 더 높아졌다. 결국 이렇게 유로존 내의 구조적 불균형이 심화되어 왔지만, 그 부담과 리스크는 통화주권이 없고 평가절하가 불가능한 적자국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적한 유로존의 원죄였으며, 그리스가 이제 그 죄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위기 이후 전개된 그리스 비극 제 2막의 악역은 누가 뭐래도 긴축이었다. 채권단이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요구한 긴축정책은 이미 불황인 그리스 경제를 더욱 망가뜨렸다.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는 연금과 최저임금 감축 그리고 세금인상과 민영화 등 채권단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역사상 유례없는 엄청난 허리띠 졸라매기로 재정적자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9년 GDP의 15.3%에서 2014년 3.6%로 줄어들었다. 물론 경기불황 자체가 세수를 더욱 줄였는데, 경기변동의 효과를 제거한 구조적 재정수지를 살펴보면 2009년 GDP의 약 17% 적자에서 2014년에는 GDP의 1.3% 흑자가 되었다. 여기서 국채에 대한 이자지급을 제외하면 이미 2012년부터 흑자였고 2014년에는 재정흑자가 GDP의 4.5%에 달했다. 결국 그리스는 이 기간 동안 무려 GDP의 18%에 달하는 엄청난 긴축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GDP에 대비한 국가부채의 비율은 2009년 135%에서 2014년 181%로 오히려 높아졌다. 정부지출이 줄어들자 수요가 줄어 그 자체로 국민소득이 줄어들고 소득이 줄자 소비수요가 줄고 다시 소득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제를 억누르는 긴축은 마치 신화 속 시지프스의 바위와도 같았다. 국제통화기금조차 정부지출 변화에 따라 GDP가 변화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소위 '승수효과'가 원래 예상보다 커서 긴축정책이 그리스 경제에 파괴적이었다고 인정했다. 2014년 그리스 경제는 0.8%의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그나마 그것도 과도한 긴축을 멈춘 덕분이었다.

경제 붕괴를 가져올 정도의 긴축으로 인한 고통을 과도한 부채로 위기를 맞은 나라가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케인스 이래 거시경제학은 불황에 대처하여 정부가 지출을 늘리거나 돈을 풀어서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가르쳤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정확하게 그런 길을 따랐다. 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재정수지도 개선되고 부채비율도 하락하는 법이지만, 위기 이후 그리스에게 강요된 긴축은 슬프게도 그와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크루그먼 등의 거시경제학자들이 그리스에 대한 채권단의 긴축 요구는 너무 가혹하며 경제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출하라고까지 주장하는 이유다. 결국, 그리스 재정위기는 유로존의 문제와 결합된 그리스 스스로의 잘못이 컸지만, 위기 이후 그리스 경제의 붕괴는 긴축의 책임이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연금이 약 절반이나 삭감되자 그리스 국민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5년 동안 열심히 긴축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절망뿐이었고, 마침내 분노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시리자가 2015년 1월 정권을 잡으며 무대에 등장했다. 그 이후는 숨가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채권단과의 긴 협상과 결렬, 국가부도와 No를 외친 국민투표. 그러나 긴축은 반대하지만 유로존 탈퇴는 하지 않겠다는 그리스의 협상전략은 유로존 탈퇴까지 밀어붙이는 독일의 초강경 전략을 이길 수 없었다. 채권단과의 협상을 맡은 전임 재무장관 바루파키스는 그렉시트까지 고려했다고 말하지만, 많은 그리스 국민들은 그렉시트를 반대했고 정부 차원의 준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치프라스 총리도 그렉시트의 충격을 우려하여 이전보다 더 가혹한 3차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독일은 긴축 반대를 외치는 포데모스가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는 스페인 등을 의식하여 좌파정권의 긴축 반대를 용납하지 않고 그리스를 몰아붙였다. 물론 그리스에 양보하지 말라는 자국 여론도 의식했을 것이다. 합리적 경제논리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정치와 힘이 지배한 협상, 그러나 그로 인해 통합유럽의 이상과 유럽 전체의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말았다. 독일은 1차 대전 패망 이후 엄청난 배상금 부담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일으켰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부채탕감으로 다시 일어선 스스로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독일의 GDP에 대비한 국가부채비율은 1937년 무려 675퍼센트에 달했지만 2차 대전 이후 1950년대 초에는 12퍼센트까지 줄어들었다.

문제는 부채탕감 없이 긴축만을 강제하는 현재의 구제금융으로는 그리스의 부채문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은 그리스의 국가부채비율이 2022년에도 GDP의 170퍼센트에 달할 것이며, 문제 해결을 위해 상당한 부채탕감이나 30년의 상환연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대로라면 몇 년 후 그리스가 부채를 갚지 못해 다시 그렉시트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고, 현재의 불균형이 지속된다면 다른 남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지경에 처해 유로존의 유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부채탕감이나 긴축의 완화 없이는 그리스의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다음 막의 비극의 주인공은 유럽이 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자초한 이 현대의 비극에서 카타르시스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의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깨우침엔 반드시 고통이 따르는 법이며 우리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혜는 신들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노래했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인들의 고통으로부터 어떤 지혜를 배웠을까. 현대판 그리스 비극을 이겨내고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일 것이다. 부패와 기득권을 혁파하는 그리스인들의 개혁 노력과 함께 유럽인들의 지혜와 관용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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