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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법원에는 존재하지 않는가 |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부쳐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은 항소심에서의 고민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할 만한 다른 사정들은 애써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일각이 드러난 이후 국정원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범죄 관련 흔적을 지웠던 점이나 검찰의 수사가 곳곳에서 벽에 부딪혔던 점들에 대한 고려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번 판결은 매우 부실해 보이고, 정치적으로까지 보인다. 또다시 국민들로 하여금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해 의심하게 한 판결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 박주민
  • 입력 2015.07.23 07:06
  • 수정 2016.07.23 14:12
ⓒ연합뉴스

지난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사건의 항소심을 파기하여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유죄 또는 무죄의 판단은 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문제 삼은 것은 항소심에서 증거능력을 인정한 '시큐리티'와 '425지논'이란 제목의 텍스트(txt) 파일의 증거능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두 파일은 국정원 직원이 쓴 메일에 첨부되어 있던 것으로, 검찰의 압수에 의하여 확보되었다. '425지논'에는 주로 인터넷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유포할 "이슈와 논지"의 내용 및 이와 관련하여 활용할 기사 등이 담겨 있고, '시큐리티'에는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트위터 계정들이 담겨 있다. 항소심에서는 1심과 달리 이 두 파일이 형사소송법 제315조 제2호의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와 같은 조 제3호의 '기타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에 해당한다고 보아 증거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파일들을 기초로 검찰이 주장한 트위터 계정 1257개 중 716개를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관리했다고 인정했고, 이 716개의 트위터 계정이 트윗·리트윗한 글 27만 4800개를 국정원의 사이버활동으로 파악했다.

대법원 판결의 심각한 문제점

반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위 두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설시하였다. 다소 길지만 읽어볼 필요가 있기에 그대로 인용한다.

425지논 파일의 상당 부분은 출처를 명확히 알기 어려운, 매우 단편적이고 조악한 형태의 언론기사 일부분과 트윗글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시큐리티 파일의 내용 중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트위터 계정은 그 정보의 근원이나 기재 경위와 정황이 불분명하고 그 내용의 정확성, 진실성을 확인할 마땅한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 두 파일에 포함되어 있는 이슈와 논지 및 트위터 계정에 관한 기재가 그 정보 취득 당시 또는 그 직후에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작성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위 두 파일이 그 작성자의 업무수행 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라고 하더라도 위 두 파일에 포함되어 있는 업무 관련 내용이 실제로 업무수행 과정에서 어떻게 활용된 것인지 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른 심리전단 직원들의 이메일 계정에서는 위 두 파일과 같은 형태의 문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정은 위 두 파일이 심리전단의 업무 활동을 위하여 관행적 또는 통상적으로 작성되는 문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대법원의 판단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형사사건에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엄격하게 판단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지만 그런 선언과 더불어 항소심에서 인정한 위 두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하기 위한 검증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425지논'의 경우 항소심에서는 파일에 등장하는 연속된 날짜들을 확인했고, 주말과 공휴일 등 업무일이 아닌 날짜에는 작성되지 않았거나 그 전날에 휴일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이슈와 논지가 함께 기재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또 파일에 등장하는 내용들이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 트위터 계정에서 반복적으로 트윗, 리트윗되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러한 항소심의 사실확정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구체적인 지적을 하지 않은 채 막연히 그 증거능력을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시큐리티'의 경우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인정된 다수의 트위터 계정이 사용자, 대표계정 등으로 구분되어 정리되어 있었는데, 업무에 사용할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국정원 직원들의 트위터 계정을 이렇게 정확하고 자세히 기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 대법원은 다른 심리전단 소속 국정원 직원들의 메일에서는 위 두 파일과 유사한 파일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두 파일 모두의 증거능력 부정의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심리전단 산하 사이버3팀 소속의 국정원 직원인 김하영의 노트북에서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오늘의 유머' 사이트의 게시물 관리방식, 게시물의 순위를 조정하는 방식, 활동 시 주의사항, 자신 혹은 다른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하였을 닉네임 등이 기재되어 있는 '메모장' 파일이 발견된 사실이 있다. 트위터를 통해 활동하는 사이버5팀 소속 직원의 메일에서 발견된 '시큐리티'와 '425지논'은 김하영의 이 '메모장' 파일과 같이 자신들의 활동공간에서의 업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이러한 사정도 무시하였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국정원, 단죄가 필요하다

이렇게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은 항소심에서의 고민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할 만한 다른 사정들은 애써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일각이 드러난 이후 국정원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범죄 관련 흔적을 지웠던 점이나 검찰의 수사가 곳곳에서 벽에 부딪혔던 점들에 대한 고려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번 판결은 매우 부실해 보이고, 정치적으로까지 보인다. 또다시 국민들로 하여금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해 의심하게 한 판결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최근 국정원이 전 국민을 감시대상으로 놓을 수 있는 'RCS'라는 해킹프로그램을 불법적으로 구매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엄청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위 프로그램의 구입시기가 총선, 대선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국정원 정치개입, 선거개입에 대한 의혹이 다시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국민들은 국정원을 둘러싸고 이러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이 의혹에도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받고 있다. 이 사건의 향배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을 다시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단죄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검찰과 법원의 제대로 된 모습을 촉구한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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