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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진" 남부연합기 이야기

박수는 치겠다마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부연합기라면 150년 전인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에서 북부 즉 지금의 미국 연방정부에게 패해서 망했었던 남부연합의 상징인데 도대체 그런 폭망한 정치세력의 깃발이 왜 때문에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휘날릴 수 있었던 것일까? 어처구니 없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남부는 다 망한 것 아니었나?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의 발발에서 종식 그리고 그 전후처리 과정을 살펴 보아야 한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07.24 09:30
  • 수정 2016.07.24 14:12
ⓒASSOCIATED PRESS

지난 달 미국 남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주로 다니는 이마뉴엘 감리교회에서, 코카서스계 미국인 인종차별주의자 딜런 루프가 성경공부 중이던 9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있었다. 범인이 범행 전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기(정확하게는 남부연합 전투기라고 하며 원래 남부연합의 깃발 중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끌던 북버지니아군의 깃발이라고 한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어처구니 없는 과거를 상징하는 이 남부연합기를 공공장소에서 끌어 내리자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드디어 사건이 발생한 미국 남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는 주정부 청사에 걸려있던 남부연합기를 내리자는 법안마저 주 의회를 통과하여 시행되었다.

이런 당연한 결정에 대해 얼마 전 미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금지한 (또!) 남부 일부 주 등의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의 주요한 정치적 승리이며 천조국(쿨럭;) 시민들의 높은 정치적 식견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인듯 싶고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나도 그런 의견에 찬동하는 바이다.

그런데, 박수는 치겠다마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부연합기라면 150년 전인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에서 북부 즉 지금의 미국 연방정부에게 패해서 망했었던 남부연합의 상징인데 도대체 그런 폭망한 정치세력의 깃발이 왜 때문에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휘날릴 수 있었던 것일까? 어처구니 없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남부는 다 망한 것 아니었나?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의 발발에서 종식 그리고 그 전후처리 과정을 살펴 보아야 한다. 나중에 미국이 되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영국 식민지 이주민들이 옮겨온 효시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지금의 매사추세츠주에 도착한 청교도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은 그들보다 훨씬 먼저 사슬에 묶인 흑인 노예들이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강제 노동-_-;을 당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붙잡혀 왔었다. 이렇게 미국 흑백 갈등의 씨앗은 미국의 독립선언보다도 150여년 전에 구대륙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첫번째 이주의 물결이 시작될 때부터 뿌려졌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천부인권을 주장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도 각각 마운트 버넌과 몬티첼로라는 거대한 장원을 가진 노예 소유주들이었다(심지어 토머스 제퍼슨은 흑인 여자 사람 노예 셀마 해밍스한테 애까지 배게 하여-쿨럭;- 그 후손들이 DNA검사로 제퍼슨의 후손임을 확인 받기까지 함).

모든 사람은 평등하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뭐래니?)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19세기 중반으로 가면서 더욱 깊어지고, 그 배경에는 공업 중심의 경제발전 경로를 보인 북부와 노예노동에 크게 의존한 면화 농장 중심의 남부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노예들보다는 근대적 개념의 노동자들이 더 필요했고, 남부의 목화 농장들은 흑인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이런 산업구조의 차이는 19세기 초반 여러 차례의 정치적 타협으로 봉합되었으나, 결국에는 1861년의 남북전쟁으로 폭발하고 만다. 뭐 여기까지야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수준의 널리 알려진 스토리.

이렇게 경제적 요인이 미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아주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흑인 노예제도를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 북부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었던 거센 종교적, 도덕적 움직임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이들 노예제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은 정치적 세력화에 이르렀고 드디어 1850년대에는 공화당(응?)이라는 정당을 결성하게 된다. 반면에 당시 미국 민주당에는 남부의 백인 노예소유 농장주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노예문제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든 또렷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뜨듯미지근한 입장을 취했던 미국 휘그당(누규?)이라는 당시 주요 정당은 결국 유권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래서 1850년대 이후 노예문제에 있어서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민주당(응?)과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이 모여 있던 미국 공화당(뭐래니?)이 격렬히 대립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쪽수(쿨럭;)에서 밀리는지라(남북전쟁 개전 당시 남부 인구는 900만명, 반면 북부 인구는 2,200만명;) 이들은 미국 전체 국민의 의사를 묻는 방식의 해결보다는 일찍부터 미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추구하였으니, 여기서 경제적 요인과 노예제 폐지에 이은 남북전쟁의 세 번째 원인인 연방의 유지 문제가 나온다. 남부의 주장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식민지 13개주가 처음에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면 그 주들(물론 85년 후인 남북전쟁 무렵에는 더 많은 주들이 미합중국에 가입하여 모두 36개 정도의 주가 있었음) 중에서 다시 연방정부와 뜻이 맞지 않는 주들이 연방협약(가장 현실적으로는 미 합중국 헌법)을 깨고 탈퇴하는 것 또한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사실 그 동기에는 노예제를 유지한다는 지극히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었지만, 당초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독립을 하였던 주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모여서 만든 연방정부와 등깔이 났을 때 이번에는 그 연방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독립하겠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뭐래니?) 논리.

물론 북부에서는 그러한 논리에 반대했고, 연방유지론을 펼친 대표적인 정치인이 바로 아브라함 링컨.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에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에 맞서 출마하면서 "나뉘어진 집"이라는 유명한 연설(House Divided Speech)을 통해 남북으로 분리된 미국은 결코 제대로 된 나라일 수 없다며 남부의 분리 독립세력들을 공격했다. 링컨은 비록 이 연방상원의원 선거에서 노련한 정치인 더글라스에게 패했지만, 연방 유지를 강력히 호소한 그의 이 연설은 당시 미국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어 그는 일약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한다(그로부터 145년 뒤, 링컨의 정치적 고향인 바로 그 일리노이주에서 역시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한 어느 정치인이 Red State도 Blue State도 아닌 United States of America가 있을 뿐이라 호소하며 역시 일약 전국적 정치인으로 부상한 것을 연상시킴^^).

운명의 해인 1860년, 그 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링컨은 마침내 출마했고, 공화당에서만 3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대혼전 속에서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 그러자 연방 유지를 강하게 주장하는 링컨이 대통령인 이상에는 연방을 째고(응?) 탈퇴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 여기게 된 남부의 주들은 다투어 연방 탈퇴를 선언하는데, 이때 제일 먼저 깃발을 잡은 것이 바로 이번에 남부연합기를 비로소(!) 주정부 청사에서 끌어내린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그리고, 이렇게 탈퇴한 남부 11개주는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미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 그리고 전쟁부장관을 지냈으며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었음)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당연히 링컨의 북부 즉 미 연방정부는 남부의 이런 움직임에 맹렬히 반발하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주(또!)가 자신들의 주에 배치된 북군 즉 연방군이 있는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1861년 4월부터 미국은 내전인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에 돌입한다.

남부는 전쟁 초반 전황을 일부 유리하게 이끄는 듯 싶었으나, 압도적인 인구와 군사력을 가진 북부에 차츰 밀리기 시작하였고, 남부의 모든 항구는 북부의 해군에 의해 봉쇄되는가 하면 당시 초강대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국가로 승인을 받으려던 남부의 시도도 좌절되어 어려움에 빠진다. 결정적으로는. 1863년의 링컨의 노예해방령과 북군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승리로 링컨의 북부는 승기를 잡는다. 이어 북부의 셔먼 장군은 중일전쟁 때의 일본의 삼광(三光)작전ㄷㄷㄷ(죽이고, 태우고, 약탈한다) 못지 않은 무자비함으로 남부의 전쟁수행능력을 철저히 때려부수었고, 결국 1865년 4월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북군사령관 그랜트 장군(후에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현재 미국 50달러 지폐의 도안 인물)에게 항복했고, 남부연합 대통령이던 제퍼슨 데이비스도 체포되어 남북전쟁은 종결된다(전쟁 승리를 목전에 두고 그 전해인 1864년에 재선에도 성공했던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5일 워싱턴DC의 포드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 남부연합 지지자인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하여간 남부는 철저히 패배하였고,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결성했던 당대의 미국 진보정당인 공화당(응?)은 노예제를 폐지시켜 목적을 달성하고 미국 연방도 수호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는 패배한 남부에 일종의 군정을 실시하기에 이르니ㄷㄷㄷ 북군이 남부에 주둔하며 통치하는 이른바 재건시대(Reconstruction Era)가 무려 12년간이나 이어지게 된 것.

그렇다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뿌리뽑힌 미국 남부 노예소유 농장주들의 정치적 입장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는 왜 때문에 남부의 남북전쟁에서의 패배와 승리한 북부의 남부에 대한 군정통치인 재건시대를 거치고도 오늘날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고, 이제서야 겨우 그 깃발을 끌어내린 것이 어째서 큰 성취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을 살펴보려면 우리는 미국 역사상 공전절후의 베스트셀러이고, 영화화 되어서도 대히트를 쳤던 어떤 소설에 대한 일종의 뒤집어 보기(?)를 시도해야 한다. 짐작하셨겠지만 그 소설은 마가렛 미첼의 유일한 작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1936년에 출간된 마가렛 미첼의 유일무이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주 스칼렛 오하라의 불같은 사랑과 그녀의 농장 타라를 지키기 위한 불굴의 투쟁을,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를 배경으로 그린 소설. 특히 배우 비비언 리가 스칼렛역을, 클라크 게이블이 남주 레트 버틀러역을 맡아서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졌고, 영화는 어마어마한 흥행실적을 올린(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지금도 스타워즈를 누른 1위 실적이라고 한다) 할리우드의 고전이 됨.

소설의 주제는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응?)는 것으로서 여주 스칼렛 오하라가 남의 남자가 된 애쉴리를 잊지 못했으나 실은 그녀 닮은 악당(쿨럭;)인 레트 버틀러야말로 그녀가 진정 사랑한 남자라는 것을 막판에 가서야 깨닫는 안타까운 스토리. 그리고 남북전쟁으로 주변 호족^^들이 몰락하는 속에서도 그리고 끝내 레트마저 떠나버린 다음에도 아빠의 혼이 깃든 농장 타라를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리스 신화에서 땅에 닿기만 하면 기운을 냈다는 존재 같은 여주 스칼렛 오하라의 뜨겁고 펄펄 끓는 생명력, 그리고 마지막 절망적인 순간에서조차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것(Tomorrow is another day)"이라던 그녀의 단단한 낙천주의는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내게 큰 감동을 주었었다.

그러나 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전쟁에 패퇴한 남부가 일종의 문화전쟁 내지는 그람시식 진지전을 통해서 남북전쟁으로 상실했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어떻게 회복하여 갔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새끈하게 짜여진 일종의 프로파갠더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조금은 삐딱한(뭐래니?) 시각으로 바라 볼 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멜라니, 즉 애쉴리의 아내라고 생각함. 우리의(쿨럭;) 스칼렛과 애쉴리의 애절한 사랑을 막는 방해물(뭐래니?)이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가식일지 헷갈릴 정도로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는 착해 빠진(척하는?) 멜라니가 주인공!???

마가렛 미첼이 본 남북전쟁 전 남부의 백인 노예소유주들은, 목화와 똥폼밖에 가진 게 없으면서 당랑거철 같은 자세로 북부에 덤벼든 자들. 그들이 링컨과 그랜트, 셔먼의 북군에게 탈탈 털려 노예고 농장이고 다 잃어버렸을 때 그 폐허를 진짜로 재건한 멜라니 같은 강인한 남부 백인 전 노예소유주 여성들이란 것이다. 소설에서 멜라니는 남편과 수상쩍은 관계를 맺었다고 온 애틀랜터의 사교계가 의심하기에 이른 전(응?) 올케 스칼렛 오하라를 옹호하고, 심지어 사교계의 여론을 돌려놓기까지 한 혀를 내두르는 본처력(뭐래니?)을 시전. 그뿐인가 그녀는 남부의 전통(물론 이건 노예로서 압제하에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과거일 뿐이다)을 살리고 부인들의 모임을 조직해서 망한 남부연합의 부통령 같은 이를 초대해 후속세대에게 남부의 영광을 전수. 즉 덜 떨어진 사내들이 밖에서 잃은 나라를 단단하고 실제적인 멜라니 같은 남부의 숙녀들께서 되찾아가는 모습들이 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멜라니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생생하게 묘사됨.

이 만고에 쓸데없던 똥폼마초 남부 사내들도 멜라니 같은 강인하고 단단한 남부 여자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드디어 이른바 재건시대에 북부에서의 점령군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자경단 차원에서 조직했다며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온 것이 바로 큐 클럭스 클랜 즉 KKK단ㄷㄷㄷ

그렇다, 멜라니의 남편이고 여주 스칼렛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우유부단한 파리한 지식인(웃음) 타입의 남자 애쉴리나, 소설 속에 나오는 그의 동료 남부 남자들은 KKK단 멤버였던 것(뭐래니?)! 소싯적에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감동적으로 읽다가 이 장면에서 찬물을 확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마가렛 미첼은 스칼렛과 같은 남부의 숙녀들이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나 북부의 '야비한 사기꾼'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부의 신사들이 부득이 몰래 결성한 것이 KKK단인양 그린 것. 아아 근데 그게 이성으로는 틀린 게 분명하고 인종혐오 인종차별 완전 인간말자 큐 클럭스 클랜인데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너무나 설득력 있고 그럴 법하게 그려진 것이었다ㄷㄷㄷ

이 소설의 배경은 남북전쟁 전후이지만 소설의 출간 시점은 남북전쟁 종결 후 70년 정도 지난 1930년대.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그려진 것처럼 남부의 구 지배계급은 전쟁 패배로 상실했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이런 문화전쟁, 진지전을 통해 회복하고 말 안 듣는 해방흑인노예들한테 KKK단을 통한 적나라한 폭력행사 같은 걸 자행하며 롤백을 한 것. 그리고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둘 무렵인 남북전쟁 종전 70주년쯤인 1930년대 즈음에는 미국 전체가 이런 남부의 서사에 은근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성 되었던 것. 즉 남부는 4년 간의 남북전쟁에서는 패했지만 70년 걸린 문화전쟁, 진지전에서는 승리한 것. 남부연합기가 이런 회복된 남부전통의 상징이 되고 흑백 분리 학교와 흑백 분리 화장실ㄷㄷㄷ 그리고 흑인은 빈 버스의 백인 칸 앞자리에도 앉지 못하며 투표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역사의 퇴행과 후퇴가 진행되어 완성된 것도 바로 그 70년 간이었다.

패자가 교묘히 전쟁의 승패를 뒤집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바로잡히기 위해선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것은 헛소리라고 선언해준 1954년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 같은 미국 연방 대법원의 노력 및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의 민권운동을 기다려야 했고, 그 덕분에 1965년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안에 서명하기까지를 기다려야 했다. 실로 남북전쟁 후 100년만에(!) 남부의 흑인들은 당초 노예해방이 약속했던 과실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은 민권법안을 통과시켜낸 존슨 대통령을(심지어 그는 남부 텍사스주 출신이었다!)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 평가하기도 했었다.

그럼 1965년 이후에는 남부연합기니 하는 이런 헛소리는 다 사라졌어야 하는 것 아니냐, 왜 그로부터도 50년 더 지난 2015년에야 남부연합기가 내려갔느냐 하는 의문이 당연히 제기되리라 생각됨.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1850년대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모여서 창당하고 링컨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미국 공화당이라는 얘기를 이 글의 앞부분에서 했을 때 조금 갸우뚱했던 것을 다시 상기해 보시면 어떨까 싶음. 이거 뭔가 지금 우리가 외신에서 접하는 미 공화당과 민주당이 바뀐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안 드시는가? 공화당하면 꼴통 보수마초에 노답 복음주의적 기독교도들에 낙태반대론자 동성결혼 반대자 등등이 총집결한(응?) 정당 아닌가? 노예제 폐지에 뜻을 모은 이들이 모여서 창당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아브라함 링컨이란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 대통령 중에서 탄핵 위기에 몰렸으나 유일하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난 닉슨 대통령을 우리는 다시 어색하게 만나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래 남북전쟁의 기억 때문에 미국 남부의 지배계층 백인들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그런데 민주당 출신인 존슨 대통령이 민권법안에 서명하자 이들 백인들은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걸 파고든 것이 닉슨의 이른바 남부전략이었다. 케네디에게 1960년 대선에 패한 후 심지어 캘리포니아주지사 선거에서도 떨어져서 퇴물 정치인이 되었던 닉슨은 민권법안 통과와 이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불만을 기민하게 포착하였고 이들을 공화당 지지층으로 끌어들인다. 그때부터 남부는 미국 공화당의 아성이 되었으니 좀 거칠게 말하면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정당으로 창당되었던 공화당이 이제 자신이 폐지했던 노예제가 있던 시절에 노예주였던 이들의 후손에게 점령당한 셈이 된 기막힌 역설이라고나 할까ㄷㄷㄷ

역시 "빨갱이 사냥"으로 악명 높은 매카시 위원회에서의 맹활약으로(쿨럭;)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닉슨다운 솜씨(뭐래니?)라고나 할까;; 우리역사로 치면 군부정권에서 망국적 지역감정과 호남차별을 조장한 것에 견줄만한 게 닉슨의 남부전략인 셈. 남부 백인들의 강고한 지지도 보탬이 되어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근사반세기 동안 치러진 여섯번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겨우 한 차례를 제외한 무려 다섯 번이나 공화당은 승리를 한다ㄷㄷㄷ 남부전략의 창시자 닉슨이 부패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쫓겨난 와중에도 미국 공화당의 행정부 지배가 딱 한번(카터)을 빼고 20년이나 계속되었다니 정말 후덜덜할 수밖에;;

이 남부전략은 미국 민주당이 남부 아칸소주 출신의 젊은 주지사(남부 지배층 기준으론 백인 쓰레기(white trash)-_- 출신을 대통령 후보로 낸. 1992년에야 작동을 멈춘다;; 그러나 이 무렵이 되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빌 클린턴조차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로 미국 정치권 전체의 보수화 경향이 대세를 이룰 정도가 되었으니 남부연합기 끌어내리기 같은 진보적인 의제를 밀어붙일 동력은 없었던 것. (기억하시는지, 당시 영부인-응?-이던 힐러리 클린턴이 이끌던 건강보험 개혁은 실패했다는 것을.) 그나마 2000년 미 대선에선 조지 W 부시(쿨럭;)가 공화당 대통령들이 임명한 대법원 판사들 5명이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나서 중동에서 2개의 전쟁을 일으켜 거하게 미국 곳간을 털어먹고 나서야(쿨럭;) 미국은 비로소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남북전쟁 끝난 뒤로부터 150년, 민권법안이 통과된 후로부터도 반세기만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서 주 의회 의원인 목사님을 포함한 9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총으로 살해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후, 그리고 그 살해범이 평소 이 남부연합기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어 왔음이 밝혀지고 나서야 결국 남부연합기는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남북전쟁 후 150년간 치열하게 전개된 문화전쟁, 진지전이 비로소 진보와 이성의 편에서 매듭지어지는 느낌적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고속도로 순찰대 소속 경찰 2명이 7월 10일 오전 주 의사당에서 펄럭이던 남부연합기를 내리고 있다.

숱한 생명을 앗아갔던 남북전쟁은 그렇다면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미국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는 그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에서 남북전쟁의 사회경제적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고 평가한다. 그는 링컨 대통령의 북부가 남부 신사 숙녀(풉)들의 그 "좋았던 시절"을 박살을 내어 주지 않았다면 미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배링턴 무어의 이에 대한 답변은 소수의 특권 귀족층과 다수의 빈곤하고 억압받는 하층민들이 존재했던 사회가 아마도 미국에서 계속되었을 것이고 그 귀결은 독일의 파시즘이나 러시아의 공산주의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란 것. 배링턴 무어는 결국 링컨의 북부가 벌인 남북전쟁은 (페리 앤더슨식 관점으로는) 전세계적으로 16세기 네덜란드 독립전쟁부터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그리고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을 잇는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공세 중 최후의 것이었다고 평가. 그 승리가 불철저했기에 노예 소유주들의 깃발은 승리 후 150년이 지나서야 내려졌지만 그 승리로 인해 일단 달성된 노예해방과 법적 평등, 또한 그로 인해 막을 수 있었던 미국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로 굴러떨어질 위험 같은 것도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닌 셈이라고나 할까.

동성결혼 법제화 및 건강보험의 안착 그리고 압제의 상징 남부연합기의 퇴출과 함께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이 독립선언서에서 밝혔던 그 이상에 좀 더 충실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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