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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관두고, 삶의 항로 헤매던 백수의 '인생역전'

[짬] 신문기자 관두고 선원이 된 김연식 씨

입이 안 열린다. 가방 안에는 3천원짜리 조그만 지구본이 얌전히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 서울 구로역과 인천 주안역을 여러 번 오갔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가 지하철에서 지구본을 팔라고 내몬 것도 아니다. 하나도 팔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간다 해도 놀릴 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김연식(32·사진)씨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이야, 기필코 나는 할 거야.’ 단단히 마음먹고 승객들 앞에 섰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후다닥 옆 칸으로 도망쳤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붉어진 얼굴. 이때 ‘용기’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 더 넓은 세상을… 꿈…꾸도록…”. 집에서 그토록 혼자 열심히 연습했지만 엉망이었다. 스스로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처참한 시작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앞에 있던 아주머니를 시작으로, 건너편 아저씨, 멀리 노약자석에 있던 할아버지가 줄줄이 지갑을 열고는 “학생, 나 하나 주게”라고 말했다. 첫 전동차에서 여덟개를 팔았다.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 세상에 못할 것 뭐 있어?’

다음 칸에서는 여섯개의 지구본이 팔렸다. 자신감이 붙으니 말도 조리있게 했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꼭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 용기를 내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우리 아이들 침대 머리맡에 이런 지구본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매일 아침저녁마다 더 큰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은 다른 행상과는 다르게 어설픈 모습을 귀엽게 본 듯했다. 김씨는 그날 지구본 마흔개를 30분도 걸리지 않아 모두 팔았다. 동네 가게에서 먼지가 쌓여 있는 지구본을 1천원에 사서 3천원에 팔았으니 반시간 만에 8만원을 번 셈이다.

대학 졸업반 때 ‘용기’를 내어 전철에서 행상을 한 경험이 있는 김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 신문사에 입사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멋진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사회부, 경제부 기자를 거치면서 김씨는 위축됐다. 사람을 만나 취재하는 게 두려워졌다. 기자라는 직업이 내성적인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사실 기자라는 직업은 적성과 무관하게 남들 눈에 그럴싸한 걸 고른 것에 불과했다. 생애 두번째 용기를 냈다. 사표를 쓴 것이다. 그리고 나름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자동차 정비를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공사판 일용직을 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일상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것 같아 좀처럼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 스물아홉의 백수가 영영 방구석에 처박혀 총각귀신이 되어도 세상은 눈 하나 껌뻑 안 할 것 같았다. 초조했다. 더 늦으면 이대로 영영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우연히 항해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봤어요. ‘젊은 그대, 바다를 열어라!’라는 문구였어요.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게 올라왔어요.” 그 광고는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외항선원 해기사 단기양성과정 연수생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5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여섯달 동안 기숙사에 살면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뒤 1년간 선박에서 실습하며 실무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최하급 무보수 견습생으로 원양상선의 바닥을 체험하고 버텨야 한다. 하지만 실습 자리가 쉽게 나진 않았다. 김씨는 부정기 벌크선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다. 수많은 해운회사를 다니며 이력서를 넣었다. 마침내 전화가 왔다. “내일 출발입니다. 준비해서 항구로 오세요.” 해운회사의 안내전화는 건조했고, 하루 만에 1년간 바다를 떠도는 생활에 쓸 물품을 준비해야 했다.

“싱가포르에 정박해 있는 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갔어요. 배웅해주는 가족들은 마치 장례식장이라도 가는 표정이었죠. 전 혼자 들떴어요. 긴 여행을 마음껏 즐기자고 다짐했죠.”

그가 탄 배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배는 정신없이 바빴지만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인사했지만 저마다 일에 정신이 팔려 건성으로 대꾸했어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실습항해사에게 시간을 쪼개 응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김씨는 아프리카와 남미를 오가는 화물운반선에서 실습생 기간을 무사히 보내고 3등항해사가 됐다. 전세계에서 모인 선원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많은 경험을 했다. 망망대해를 떠 있는 배 위에서, 아마존 물길의 포구 선술집에서, 선박 검색에 뒷돈이 횡행하는 아프리카의 항구에서, 해적이 출몰하는 아덴만의 바다 위에서 김씨는 고독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지난 4년간 축구경기장보다 몇배 큰 부정기 화물선을 타고 김씨는 32개 나라 항구 46곳에 기항했다. 이제는 2등항해사가 됐다. 반년 배를 타고, 한달 정도 휴가를 얻는다.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를 크게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연봉도 대기업에 취직한 동기 못지않다.

“만약 용기가 없어 승객들 앞에서 지구본을 팔지 못했다면, 사람들의 편견에 위축돼 연수원에 지원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행복과 여유는 찾기 어려웠을 겁니다. 작은 용기가 큰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최근 자신의 경험을 담은<스물 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예담)라는 책을 펴낸 김씨는 인생의 반전은 아주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는 앞으로 환경운동을 하는 ‘피스보트’ 같은 배를 몰아보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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