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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걸친 동반자

사실 토베 얀센과 투티의 관계는 보통의 연애관계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이들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그저 연인이라거나 파트너라는 말보다는 일생에 걸친 동반자 lifelong partners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본다. 이들은 예술가로서 동료였고,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토베 얀센과 툴리키 피틸라는 1964년도에 무인도에 수도시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을 짓고 여름이면 늘 그 작은 바위섬의 오두막에 가서 여름을 보내며 작업을 하곤 했다. 두 사람 다 70대의 노인이 되어 체력이 부쳐 더 이상은 그 오두막에 갈 수 없게 될 때까지.

  • 김세정
  • 입력 2015.07.22 12:56
  • 수정 2016.07.22 14:12
ⓒ팝엔터테인먼트

무민Moomin은 내가 아주 어려서 읽은 책들 중 하나다. 만으로 다섯살이나 여섯살 정도. 그때는 무밍이었다. 물론 제목도 몰랐지만. 판형이 큰 그림책으로 봤는데, 검고 운두가 높은 모자에서 딸기주스가 흘러 넘치던 장면; 바닷가에 떠 내려온 뱃머리를 장식하는 처녀상maiden figurehead(나도 이 처녀상이 예쁘다고 생각했었고, 스노크메이든Snorkmaiden이 이 처녀상과 경쟁하고 싶어서 속눈썹을 길게 만들었을 때 덩달아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눈썹 정도로 되는 게 아냐. 하마잖아. 그렇다, 나는 꽤 오랫동안 무민을 하마라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코뿔소. 뿔이 없는 하얀 코뿔소. 트롤이 뭔지도 몰랐다고); 그리고 그 빨간 루비.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괴상하고 조그만 꼬마들이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고 소중히 들고 다니던 검정 가방 속에 든 건 엄청 커다랗고 번쩍번쩍 빛나는 루비였던 거다. 너무나 환상적인 책이었다고. 마법 비슷한 것도 있고 우정도 있고 사랑도 있고 모험도 있으면서도 예쁘고 따뜻한 책.

그리고 지금 읽어도 매우 훌륭한 책이다. 저 느슨하고 한없이 자유롭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사 가족이라니.

예전에야 없어서 못 샀다만 이제는 무민 숍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인형이나 컵 같은 걸 찌질찌질 사 모은다. 딸은 안타깝게도 무민을 나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딸이 열광하기만 하면 저런 걸 걍 죄책감 없이 왕창 사 들일 수 있는데! 책도 몽땅 다 사주고! 그릇도 다 무민으로 바꾸고! 쳇. 말하자면 나는 무민의 팬이다. 단순히 책의 줄거리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고백하자면 이제 와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실, 작가인 토베 얀센Tove Jasson과 그 인생에 걸친 파트너인 툴리키 피틸라Tuulikki Pietila, 즉 투티Tutti 의 고요한 '사랑'이다. 토베 얀센은 1956년에 세 살 연하인 투티를 만나, 2001년에 86세로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투티는 8년을 더 살았다.

이 둘의 관계가 최근 약간 화제가 된 것 같더라. 한국에 출판된 책의 날개 저자 소개에 토베 얀센이 '혼자 살았다'고 적혀 있다는 거다. 출판사 측에선 그건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했다지만 그건 궁색한 얘기다. 차라리 애들 부모들이 무서웠던 것이렸다. 한국의 부모들이란 아이들에게 사줄 책(한국에서 어른들이 무민을 볼 리는 별로 없고)의 저자가 동성애자였다고 한다면, '교육적' 이유로 구입을 포기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뭐 이런 짓을 하는 건 한국의 출판사 만은 아니다. 퍼핀 북스(펭귄 북스의 청소년 도서 브랜드)에서도 아주 똑같은 일을 했다 하니, 어른들이란 어떤 진실을 아이들에게 감추고 싶어하는 것일까.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지만, 토베 얀센은 혼자 살지는 않았지. 투티와 평생 같이 살았다고.

기본적으로 토베 얀센은 동성애자였다. 투티 이전에 유부녀였던 비비카 밴들러Vivicka Bandler와 짧고 열렬한 관계를 가진 바 있다. 이 둘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 팅구미Thingumy와 밥Bob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조그만 존재들은 늘 함께이며 손을 꼭 잡고 다닌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슈트케이스 속의 크고 아름다운 루비는 둘의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 슈트케이스를 열어 루비를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커밍 아웃이다.

사실 토베 얀센과 투티의 관계는 보통의 연애관계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이들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그저 연인이라거나 파트너라는 말보다는 일생에 걸친 동반자 lifelong partners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본다. 이들은 예술가로서 동료였고,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무민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투-티키Too-Ticky는 투티가 모델이라고 하는데, 투-티키는 주인공인 무민트롤Moomintroll이 힘들 때 조언을 하여 주는 현명한 (그리고 별로 여성스럽게 생기지는 않은) 여자아이다.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토베 얀센(왼쪽)과 툴리키 피틸라. photo : www.queerblog.it

토베 얀센과 툴리키 피틸라는 1964년도에 무인도에 수도시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을 짓고 여름이면 늘 그 작은 바위섬의 오두막에 가서 여름을 보내며 작업을 하곤 했다. 두 사람 다 70대의 노인이 되어 체력이 부쳐 더 이상은 그 오두막에 갈 수 없게 될 때까지. 그 둘이 그 오두막에서 보낸 여름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도 단편영화로도 있다는데, 보지는 않았다. 너무 부러울까봐.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같이 작업하며, 취미를 공유하며, 서로 의지하며 근 반세기를 같이 보내며 늙어, 평화롭게 죽는 관계. 대체 그것이 동성 간의 관계이건 이성 간의 관계이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건 그냥 아름다운 관계라고.

무민의 세계는 저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소소하고 아름답다. 그것이 트롤이건 사람이건 뭔지도 모를 존재이건 서로 배려하고 아끼되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다. 그러하니,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핀란드에 가고 싶어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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