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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이란 천일야화

"남자한테 청담동에 있는 바에 가자는 여자들의 심리가 뭔지 알아? 자기를 위해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보려고 데려가는 거야. 칵테일 한 잔 마시면 4만원 정도는 그냥 깨지니까." "소개팅할 때 차는 일부로 안 가져가. 만약 데려다 주기 싫은 여자를 만났을 때 주차장 입구에서 '잘 가요' 하고 헤어질 수 없잖아. 그래서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는 거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같이 택시 타고 가서 데려다 주면 되잖아." 남자가 하는 말에도, 여자가 하는 말에도 저마다에겐 일리 있는 주장이고, 저마다의 이기심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내심은 드물다.

  • 민용준
  • 입력 2015.07.22 10:42
  • 수정 2016.07.22 14:12
ⓒgettyimagesbank

여자가 없다. 남자가 없다. 만날 사람이 없다.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도 많고, 남자도 많은데, 정작 내 여자는, 내 남자는 없다. 소개팅만 계속된다.

"좋은 여자 없냐?" 남자 1호가 물었다. "좋은 남자 없어?" 여자 1호도 물었다. 일단 남자랑 여자는 있구나. 그래서 난 아무런 부담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그런데 남자 1호가 여자 1호의 사진이 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 1호에게 사진을 한 장 달라고 했다. 여자 1호는 살짝 볼멘소리를 했지만 사진을 주겠다고 했다. 전제가 있었다. "그럼 나도 볼래." 남자 1호에게도 사진을 달라고 했다. 군말 없이 사진을 보냈다. 중간에서 두 사람의 사진을 봤다. '위 사진은 실물과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메시지를 띄워줘야 하나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내 친구에게 관심을 더 보이며 날 조금씩 멀리하던 너를 보며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뭐,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위조 수준은 아니니까. 어쨌든 두 사람은 날짜를 정했다고 했다. 그런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남자 1호에게 연락이 왔다. 괜찮았냐고 물었다. "아니,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러니까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음... 그런데'라고 운을 떼더니 2% 부족한 느낌을 나열했다. 여자 1호에게 끌리지 못한 이유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았지만 남자 1호에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 스타일이 아님'을 스스로 다짐하는 이유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 뿐이었다. 여자 1호에게 문자가 왔다. 여자 1호에게선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적극적인 표현이 동원되진 않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발음하는 입 안의 자음, 모음마다 잔뜩 머금은 궁금증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곧 명확한 기대감을 분사했다. "혹시 나에 대해서 별 말 안 해?" 나는 여자 1호에게 약을 줬다. 모르는 게 약이다. "글쎄." 물론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남자 1호는 당연히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안부도 묻지 않았다. 여자 1호도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론 소개팅 한 번 한 게 대단한 인연이라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어떤 가능성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나치게 낭비가 없는, 효율적이지만 삭막한 엔딩이랄까. 소개팅의 애프터는 남자가 잡는 것이 무언의 룰이다. 연락 없는 남자를 기다린다는 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불이 켜진 상영관의 텅 빈 풍경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말하면 소개팅에서 여자가 차일 일은 물리적으로 희박하다. 어떤 기미도 없는 남자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듯 먼저 연락하는 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여자 2호는 난감했다. 어제 소개팅을 했던 남자에게 카톡이 왔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여자 2호는 일전에도 이런 문자를 받아본 적 있었다. 통신사 상담원에게 요금 관련 문의를 하고 통화를 마치면 이런 문자가 왔다. 그 문자에 답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카톡엔 답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네. 오늘 하루 행복할게요!" 당연히 이상하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침인데 벌써 하루가 끝난 느낌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말투로 시련을 주는 남자의 카톡 앞에서 여자 2호는 무기력해졌다. 일부러 이러는 걸까. 설마 어장 관리인가.

나는 그 사연을 듣고 의아했다. 정말 어장 관리일까? 놀아본 남자 2호는 말했다. "숙맥이네. 요즘 같은 세상에 관심도 없는데 다음 날 연락하는 애가 누가 있어. 그리고 선수라면 그렇게 어설프게 안 던지지. 최소한의 대화는 형성시켜야 할 거 아냐. 호감은 보이고 싶은데 요령이 없네. 뭘 몰라." 그렇다. 그는 그저 답답한 남자였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호감지수가 하락한다. 그리고 여자 2호의 의심도 정당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의 의지 없는 호의에 닳고 닳아서 생긴, 일리 있는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3호는 요즘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은 희한할 정도로 의지가 없다고 했다.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고, 대화도 잘 되는데 관계에 진전이 없는 거야. 계속 같은 자리를 뱅 도는 느낌? 문자를 주고받거나 통화할 땐 사귀는 것 같은데 막상 만날 의지도 안 느껴지고,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맞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남자도. "1등은 아니어도 3등 안에 드는 여자는 갖고 싶진 않지만 잃고 싶지도 않거든. 어차피 소개팅은 계속 잡혀 있고, 잡힐 거고, 그러니까 1등짜리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 하지만 3등짜리 여자를 놓치고 싶지도 않지. 그 이상의 여자를 만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남자 2호의 말이다. 하지만 어장 관리가 남자만의 특권은 아니다. 남자 3호는 말한다. "대답만 잘하는 느낌이랄까. A를 물어보면 정확히 A만 답하는 거지. 내가 다시 B를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진전이 안돼. 그런데 막상 만나자면 또 만나고. 그러면 또 어쩌자는 건가 싶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남자의 물음표에 응답하지만 스스로 물음표를 제시하진 않는다.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만나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남자가 궁금해하는 사연은 들려주되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애프터 신청의 칼자루는 남자가 쥐고 있지만 애프터 신청이 넘어오는 순간 그 칼자루의 칼을 뽑는 건 여자 몫이다. 여자가 칼을 쥐게 된다.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도 잡고 싶진 않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마찬가지다. 소개팅 기회는 널려 있고, 언젠가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쓸만한 칼이다 싶은 건 일단 뽑고 본다. 손에 쥐고 버리더라도. 칼자루만 쥔 남자가 발을 동동 굴리든 말든. "어차피 선택은 남자가 하잖아. 그러니까 사실상 남자한테 선택을 많이 받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도도해질 수밖에 없지. 남자가 지 잘난 거 알 듯이 여자도 지 잘난 거 아는 거지. 그렇게 잘난 값을 하는 거야. 남자는 계속 그녀의 주가를 올려주는 거고." 여자 4호의 말이다.

주마다 평균적으로 1회 이상의 소개팅을 한다는 남자 4호에게 소개팅은 습관이다. 그에게 소개팅 결과를 물어보면 항상 무덤덤하게 말한다. "잘 안됐어."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다. 아이러니하다. 이별의 효율성은 높은데 만남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니, 소개팅의 목적이 완벽하게 어긋난다. 물론 타석수와 타율은 비례하지 않는다. 두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친 타자가 10타석에서 안타 네 개를 친 타자보다 타율이 높은 것처럼. 하지만 타석 수가 많으니 안타를 칠 수 있는 절대적 기회가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100타석에 섰는데 안타 하나를 못 칠까. 한 방이면 된다. 하지만 그 한 방이 없다.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공이 적지 않은데 내가 기다리는 공이 오지 않아서 방망이를 좀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성격이 좋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교양도 있고, 스펙도 갖췄으면 좋겠다. 좋으면 더 좋은 게 아니라 다 좋아야 좋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인다.

"남자한테 청담동에 있는 바에 가자는 여자들의 심리가 뭔지 알아? 자기를 위해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보려고 데려가는 거야. 칵테일 한 잔 마시면 4만원 정도는 그냥 깨지니까." "소개팅할 때 차는 일부러 안 가져가. 만약 데려다 주기 싫은 여자를 만났을 때 주차장 입구에서 '잘 가요' 하고 헤어질 수 없잖아. 그래서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는 거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같이 택시 타고 가서 데려다 주면 되잖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가 집에 데려다 주는 것도 신경 쓰이지. 혼자 사는 집의 위치를 공개하고 싶지도 않고. 여러모로 부담스러워." 이 말 가운데 남자가 뱉은 말과 여자가 뱉은 말을 가려낼 수 있는가? 어쨌든 남자가 하는 말에도, 여자가 하는 말에도 저마다에겐 일리 있는 주장이고, 저마다의 이기심도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내심은 드물다. 남자든, 여자든, 나름의 기대를 안고 소개팅에 나오지만 생각보다 절박하지 않다. 여자도, 남자도 없어서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 한 번의 만남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하려 한다. 마치 로또 같다. 다음 주가 되면 새로운 로또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당첨 확률은 한결같이 희박하다. 가능성이 희박한 로또 당첨번호를 기다리듯 주말이 되면 소개팅 장소로 나간다. 마치 죽지 않기 위해 절정이 없는 이야기를 매일 밤 이어나가는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절정도 결말도 없는 일일야화가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1회적인 인연만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그래서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솔로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솔로다. 그리고 항상 여자도, 남자도 없다. 소개팅만 넘친다. 어렵다. 어려워.

(ELLE KOREA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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